우리가 어떤 진실을 마주할 때 거치게 되는 세 가지 과정이 있다. 첫째는 불편하더라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정직함이며, 둘째는 그것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균형 잡힌 시각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 진실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내는 실천이다. 정직한 사실 확인과 올바른 해석을 거치지 않은 신앙은 결국 공허한 위선에 머물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의 저자 랜달 발머(Randall Balmer)는 다트머스 대학교 종교학 교수로, 미국 복음주의의 정치화 과정을 수십 년간 추적해 온 학자다. 복음주의 목회자 가정에서 자란 그는 내부자로서의 애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학자로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객관성을 놓치지 않는다. 이 책은 기독교인이라면 차마 믿고 싶지 않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모순과 거짓’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저자는 1990년 한 비공개 콘퍼런스에서 나온 충격적인 증언을 언급하며 포문을 연다. 그 내용은 ‘종교적 우파(Religious Right)’의 설립자이자 헤리티지 재단 공동 창립자인 폴 웨이리치(Paul Weyrich)가 “낙태는 종교적 우파 출현과 아무 관련이 없다”라고 단언한 것이다.
낙태 문제에 관해 1973년 미국에서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로 낙태가 합법화되었을 때, 복음주의자들의 반응은 뜻밖에도 ‘침묵’ 혹은 ‘지지’였다. 남침례회 등 주요 교단 역시 일정 부분 낙태를 허용하는 입장이었으며, 당시 신학자들 대부분은 낙태 문제에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저자에 따르면, 진짜 기폭제는 인종 차별을 유지하던 사립학교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법원은 인종을 차별하는 사립학교들이 “자선 기관이 아니며 연방정부의 면세 지위를 받을 수 없다”라고 결정했다. 1954년 공립학교 인종 차별 폐지 이후 백인들이 설립한 ‘인종 분리 학교들’의 면세 지위가 박탈되자, 인종 분리를 옹호하는 것은 대중적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것을 간파한 전략가들은 ‘낙태’라는 ‘고상한 명분’을 내세워 자신들의 진정한 동기를 은폐했다.
다시 말하면 저자는 종교적 우파의 태동은 생명 윤리가 아닌 ‘인종 분리’라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망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힌다. 실제로 기독교 우파단체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의 제리 폴웰(Jerry Falwell)은 “인종을 통합하면 궁극적으로 우리 인종이 파괴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밥 존스 대학교는 1971년까지 흑인 학생 입학을 거부했고, 학교 설립자는 “성경이 인종 분리를 명령한다”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저자는 2016년 백인 복음주의자 81%가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한 현상도 이 맥락에서 해석한다. ‘가족의 가치’를 외치던 이들이 세 번 결혼하고 성 추문으로 얼룩진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것은, 그들의 진짜 동기가 다른 곳에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보수 정치인들은 명시적인 인종 차별 발언 대신 “법과 질서”, “국가의 권리”, “복지 여왕” 같은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하여 인종주의적 성향을 보인 유권자들에게 호소한다. 오늘날 많은 백인 복음주의자는 ‘낙태’라는 단일 이슈만으로 투표하는 경향을 보이며, 이는 후보자의 인종 차별적 성향이나 부도덕한 정책을 무시하거나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자료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다. 발머는 레이건, 포드, 카터 대통령 도서관과 밥 존스 대학교, 리버티 대학교 문서 보관소를 샅샅이 조사했다. 개인 증언과 역사적 기록을 교차검증하여 설득력 있는 서사를 만들어 냈다. 복잡한 논쟁을 “낙태 신화 대 인종 문제”로 명쾌하게 단순화하여, 마치 탐정 소설처럼 읽히는 대중적 소구력도 갖췄다. 학자로서의 엄밀함과 내부자로서의 통찰이 균형을 이룬 연구다.
물론 발머의 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에는 몇 가지 짚어 볼 지점이 있다. 당시 미국 복음주의는 다양한 사회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기에, 모든 동기를 인종 문제 하나로만 환원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때때로 복음주의 전체를 ‘종교적 우파’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자신도 인정하듯 모든 복음주의자가 인종차별주의자인 것은 아니며, 진보적 복음주의 전통도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매우 크다. 우리 역시 성경의 진리를 단순화하여 차별금지법 논쟁을 특정 이슈로만 축소하거나, 종교적 신념이 권력의 이해관계에 포섭되고 ‘극우 기독교’가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패턴을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명분 뒤에 숨겨진 동기를 면밀하게 살핀 발머의 분석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종교적 신념’이 ‘시대와 권력의 이해관계’에 어떻게 포섭되는지를 보여주는 이 책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이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다.
“회개는 영혼에 유익하다”라는 저자의 마지막 권고는 단순한 도덕적 훈계가 아니다. 과거를 정직하게 직면하고, 진정한 복음의 가치로 돌아가라는 따뜻한 초대다. 이는 이데올로기적 종교 신화에서 벗어나, 불편하지만 반드시 마주해야 할 ‘근원적 진실(Radical Truth)’을 담대하게 드러낸 용기 있는 메시지다. 진리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진실이 비록 불편할지라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박찬익 목사(교회진흥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