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대학교에 입학하니 교수는 웃으면서 말했다. 1학년은 신입생 풋내기로 “Freshman”, 2학년은 조금 배웠다고 “Sophomore”, 3학년은 아직 손아래 미숙 “Junior”, 사가독서학년은 손위의 잘난 고참 “Senior”라고 했다. 인상 깊은 말이었는데 2학년에서 3학 년에 걸쳐 시건방진 나는 별도의 사전 없이 읽을 수 없는 미국인 최초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교수 의 걸작 “사랑과 법“(Love and Law)이란 책을 읽고 학보에 논문을 기고했는데 뒤돌아보면 정말 나의 인생과 목회에 가장큰 영향을 준 위대한 스승의 글이 됐다. 지난번에 기고한 글에 이어 “사랑과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먼저 칼 바르트(Karl Bart)는 독일의 위대한 신학자로 그의 교의학(Dogmaitc)에서 뜻깊은 문구를 인용하면 “다만 믿음”(Sola Fide)으로 “다만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 우리의 응답인데 “유한은 무한을 포함하지 못한다”(Finitum non capax infiniti)였다. 신대원에 들어와 그의 글을 읽으며 그의 몇 마디 단순한 신학사상의 표현이 오늘에 이르는 감명이겠다.
아내 할멈은 기침약을 먹고 대낮에 잠에 떨어져 버렸고 나는 거실 소파에서 복음송을 조용히 감상하고 있었다. 나는 아내를 잠 깨우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고요의 방 분위기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런데 잠자던 아내가 놀란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부엌싱크대로 달려가면서 또 외친다. “어쩌면 좋아 솥이 까맣게 다 타버렸네” 나도 달려가 보니 아들이 선물한 독일제 솥이 검게 타 버렸다. 기침에 좋다는 무슨 열매를 끊이려고 올려놓은 솥이었는데 아내의 곤한 잠 때문에 시간을 놓쳐 솥이 타 버린 것이다. 연기도 났다. 나도 코가 막혀 그 냄새를 잃었다. 나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여기 있다간 아내로부터 불똥을 맞을 테니 도망치자. 주섬주섬 대강 책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고 허겁지겁 아파트 문을 열고 달아났다. 달아나면서도 뭘 내가 잘못한 것이나 있나 생각해 봤다. 그 솥이 타 버린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굳이 범인으로 끌고 들어간다면 함께 있으면서 왜 타도록 모르고 있었느냐 일 것이다. 하여간 나는 아파트를 빠져나와 달아나고 있었다. 구리지구촌교회 목양실로 피난처를 정했다. 후유, 잘 도망쳐왔지. 계속 미련스럽게 집에 있었더라면 아내 할멈으로부터 무슨 책임추궁에 꾸지람을 받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사랑은 현대 신학적 논쟁에 있어서 양대주류로 해석된다. 그 하나는 사랑의 본래 어의가 자기희생으로 보는데 이것을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의 입장으로 보면 그는 “인간의 모든 양상이 상호 간의 이해타산으로 선택되어진 것이라는 사실 속에 발견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한 상호관계가 희생적인 사랑과 모든 양상의 상호 사랑 사이에 존재한다는 논증에 있어서 니부어는 “상호간의 사랑 개념이란 상호간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라고 비평했다. 다니엘 윌리암스(Daniel Williams)의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소망’(God’s Grace and Man’s Hope)에서 “현재 인간의 상태가 악독과 곤궁이 그리스도의 영역 내의 선과 혼합해 진치고 있다. 사실적으로 모든 사랑은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선과 혼합하는 것이다. 욕망은 가능한 무의식을 포함하는데 자기 자신의 선을 위한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선을 위한 자기의 욕망으로 나눈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에 의하여 찾아진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요구는 우리가 진정한 상호애의 생활을 하자는데 있다. 그러나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을 따르면 “모
1953년 1월 5일 그땐 한국전쟁 중이었는데 파리의 바빌론 소극장에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작품이 공연됐다. 무대에는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이 서있는 황량한 무대였고 특별한 줄거리나 극적인 사건도 없는 작품이라서 인기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 놈의 고도(Godot)가 한국에서는“고도를 기다리며”의 연출가 임영우 83세 선생께서 한평생을 바쳤으며 한국 초연 50돌을 맞아 공연하기도 했었다. 무엇을 기다릴지는 자유라고 했다. 무엇인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사람들은 그래도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기다리는 자이다”라는 교훈이다.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차이점이란 기다리는 인간과 기다림이 없는 동물이었다. 저자가 어떤 질문에 답한 것을 보면 고도(Godot)의 정체를 알만하다. 사람들이 고도의 정체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소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 같은 소동은 베케트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미국인 연출자 알랭 슈나이더의 질문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에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한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고도는 고도라는 이름뿐 텅 빈 내용이었다. 사람들의 기다림의 대상은
어릴 적에 동생과 싸우면 어머니는 소리 질러 꾸짖고 말린 후 저녁에 일터에서 귀가하신 아버지께 이야기하셨다. 우리들은 아버지께 사실 경위를 아뢰고 백양나무 회초리를 꺾어오게 해서 동생이 다섯 번 맞으면 나는 열 번 종아리를 맞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동생이 까불고 소리치며 달려들더라도 형으로서 동생을 사랑하고 참고 용납하라는 아버지의 “사랑의 법”이라는 것을 철이 든 뒤에 깨달았고 나도 자식을 키우면서 체험하게 됐다. 수많은 얘기가 우리 형제들이 자라면서 있었지만 아들 다섯, 딸 다섯 10남매를 낳아 가난한 농촌 개울가에 힘들게 논을 만들어 자식들을 양육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오른다. 우리들이 어려서 만만한 게 엄마로 투정 부리고 애먹일 때 “야 이놈의 손들아! 너희들이 자라 장가가고 시집가서 자식새끼 키워보면 그때야 내 심정 알 거다!" 하시던 말씀이 귓가를 울려와 있다. 한국전쟁이 예고도 없이 일어난 것이나 일본이 미국과 전쟁 때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침공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전쟁은 법 없이 감행됐다. 성경을 배울 때 구약은 율법이요, 신약은 사랑이라 배웠다. 율법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율법이 분노한다고 배웠
이른 아침 피어있는 나팔꽃 사이로 진홍빛 분꽃이 피어났어요 저녁에 피는 꽃이 왜 아침에 피었지 궁금했어요 오늘도 이른 아침 분꽃을 보다, 문득 박노해 시인의 새벽별이 생각났어요 맞았어요. 분꽃은 이른 아침 피어난 게 아니라 밤새도록 우리 곁에 있었던 거예요 우리와 함께 아침을 기다렸던 거예요 분(粉)꽃은 씨앗의 껍질을 벗기면 하얀 가루가 들어 있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이 분가루를 얼굴에 바르며 곱게 단장하곤 하셨다. 오후 4시경에 핀다 하여 포어클록(four-o'clock)이라 불리는 분꽃은 시계가 없던 시절 우리네 어머니들에게 저녁밥 지을 시간을 알려주던 고마운시 계꽃이기도 했다. 해 질 무렵이면 피기 시작해 아침이면 시드는 분꽃이 이른 아침인데 활짝 피었다. 참으로 낯선 광경이다. “저녁에 피는 꽃이 왜 아침에 피었지?” 그러다 문득, 생각나 깨닫게 되는 박노해 시인의 <새벽별>, 그랬다. 이 생생한 진홍빛 분꽃은 아침에 피어난 꽃이 아니라, 밤을 견뎌낸 이들을 가장 나중까지 지켜주는 희망의 꽃이었다. 임경미 사모 / 비전교회
퇴짜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상납(上納)한 포목(布木)의 품질이 낮아서 “퇴(退)”자(字)가 찍혀 도로 물려 나온 물건을 말하는데, 그것의 의미는 퇴(退)박 맞았다는 것이니, 이는 또 무엇을 주었건만 받는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물리침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로 본 퇴짜를 목사며 교수인 나는 내가 가르치는 현장에서 몇 번 당했던 체험이 있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밝힌다. 퇴짜 당한 심정이 어떨까? 언필칭 낙담스럽다고 하겠지! 그러나 나는 나의 강의가 거부당한다고 해서 놀라지 않았다. 그 첫째 이유는 당연히 거부당할 수 밖에 없는 성격의 진리 강의였기 때문이었고, 그 둘째는 좀 핑계스러울지 모르나 수강자들의 질(質)의 문제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첫째 퇴짜 체험은 어느 해 신학교에서 신학과와 기독교 교육학과의 학생들에게 조직신학을 강의하는데 신학과 학생은 매시간 “아멘, 할렐루야”로 응하는데 반해서 기독교 교육과 학생은 강의를 거부하더라는 것이다. 교과서 위주로 꼼꼼히 가르치는 것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다 같은 교재로 다 같은 선생 밑의 수강자들의 찬반 갈라짐은 수강자들의 질의 문제일 따름이다. 솔직히 신학과 학생은 더 성숙하고 영적인데 비해 기독교 교육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석학은 자유는 인간의 자기 이해 곧 ‘자신이 무엇이며 무엇이 되느냐’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니버의 그러한 자유정신을 위한 인간의 사랑은 생활의 법칙이라는 내용을 이끌어 올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가 부정의 소리에서 중요하고 심오한 결론을 이끌어낸 것 같이 우리는 자연과 이성의 구조에 대한 사랑과의 관계도 숙고할 수 있다. 사랑은 법보다 고차원적 단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행위의 강제력이 없고 성문화되지 아니한 법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우선 법으로 처리하려 한다. 그래서 인간을 위한 도덕적 율법인 사랑을 잊어 버리기 쉽다. 사랑은 인간을 위한 법이며 사랑의 법은 인간의 제한된 상태에서의 인간을 위한 무제한의 법이며, 인간은 자신의 종말까지 자기 자신을 형성해 갈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 또한 인간의 사상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자신의 빈약 속에서 그것을 견지할 수 없다. 지고의 사랑 아가페(agape)는 인간 존재의 궁극적 하나님의 법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인식이 불가피하게 궁지에 빠진 자신을 위해서나 자신의 자유를 요구하는 것보다 잘 견지된 자신을 위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A hungry child knows no politics” 위의 말은 1984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에티오피아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강조하며 꺼낸 말이다. 국내외 정치 싸움에 어린 것 들이 아사 직전이다. 그것들이 무슨 정치를 알겠나. 그 것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나. 그것들은 어른들의 정치는 모른다. 배가 고파서 아직 빵 밖에는 생각나는 게 없다. 어린아이들에게 이데올로기의 변화와 차이 설명도 무의미하다. 우선 고픈 배를 채워주는 게 어른들 특히 정치인들의 우선 과제가 아 니냐는 의미가 레이건의 말 속에 들어 있다. 한국의 통일부 장관 김연철 씨가 4 월 8일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레이건 대통령의 말을 강조했다. 북 한의 주민이 배고파하니 인도적 차 원에서 식량을 지원하는 게 마땅하지 않겠냐고 한 것이었다. 레이건이 식량 지원할 때 하역비용을 제공했는데 그 돈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아서 정치적으로 이용 되지 않았나 우려가 있다는 코멘트도 김 장관이 했다는 것이다. 사실 톤당 12달러를 독재 정부의 주었었다는 등. 내가 지금 레이건 대통령의 발언과 한국 정보 장관의 그 말을 가지고 와서 말하고자 하는 결 론적인 의미는 딴 곳에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 엘 백성을 위기에서 구하시기 위해 홍해를 가르시고 자연적 위기에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구조하셨다. 요단강 강물을 3번이나 도하했는데, 첫 번째는 여호수아가 인도하는 이스라엘 백성이요, 두 번째는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 하기 전 겉옷을 취하여 요단강을 갈라서 엘리사와 같이 건넜고, 마지막은 엘리야의 승천에서 떨어진 두루마기를 엘리사도 주워서 엘리아의 하나님을 외치며 치니 요단 강이 육지처럼 갈라져서 건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 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7~18).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의 850인 제사 장들과의 대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재물을 태우고(왕상 18:30~40),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왕 상 18:42) 일곱번째 기도해 비를 내리게 했다. 또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 내고 니느웨 성에 회개를 선포하여 다 회개한 것 등을 살펴보며 이 시대의 위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선포해야 함을 다시금 생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