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에벤에셀의 영웅 사무엘도 어느새 힘없는 노인이 됐다. 사무엘상 8장은 “사무엘이 늙으매”라는 말로 시작된다. 너무 빨리 늙었다. 어머니 한나에 의해 잉태됐다는 것과 어린 시절에 대한 분량에 비해 사사와 선지자, 제사장으로서의 사역 분량이 너무 짧다. 미스바 집회 이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대승했다는 말씀을 하자마자 바로 은퇴를 준비한다. 물론 이후에 아예 안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적인 사역은 여기가 끝이다. 앞으로는 사울과 다윗으로의 왕정 승계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런데 이게 사무엘의 사명(使命)이다. 왕을 세우고 왕정의 기초를 닦는 일 외에 다른 인생 이야기는 없다. 왕 세우는 일도 사무엘 입장에서는 기쁨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과 백성들의 요구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 그런데 이런 게 사명이다. 사명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는 게 아니고, 싫어도 하는 것, 사무엘은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명에 충성했고, 위대한 다윗 왕조를 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노년의 사역이 그의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요구였던 “왕을 세워 달라”라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생각대로 할 때가 더
구약시대에는 백성들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며 불태워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수많은 짐승이 죽었고 이런 제사를 끝도 없이 드려야 했다. 그래서 제사장도 백성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제사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번거로운 일로 여기며 저는 것 병든 것을 제물로 드리며 제사를 멸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경고하셨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도 없고 끝도 없는 제사를 계속 드리며 지쳐 갈 때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예수님이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를 끝내주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예수님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셨다. 이 말씀에서 ‘영원한 속죄’
필자는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영적인 의미 곧 복음으로서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맹인 치유 사역은 단순히 육신의 맹인이 눈을 떠서 시력을 회복하는 신체적 치료라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 보다 더 심오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 맹인 치유 사역에는 영혼의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의미이다. 그래서 맹인 치유 사역들에서 사용된 핵심 동사인 “다시 보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통해 영혼의 눈이 열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고 구원에 참여하는 것으로써 영적인 의미를 알아봤다. 이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치유 선언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라는 구원의 선포가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구원의 의미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의 영적인 의미를 보다 더 분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이 사도행전에서 기독교인 박해에 선봉에 섰던 유대인 바리새인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극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건이다. 사울의 체험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 듣는 묵시적 체험으로 묘사됐다. 사울은 빛(빛, 큰 빛,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임하신 주님을 보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사울은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몇몇 청년들과 공원에서 만났다. 햇살도 따스했고, 공기도 상쾌했다. 게다가 모두 코로나 백신을 맞아서 마음도 아주 편했다(미국에서 목회하다 보니 성도 대부분이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 그런데도 우리 모두는 늘 그랬듯이 아주 반뜻하게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여기가 병원도 아니고 마트도 아닌데, 우리 너무 오바하는 것 아닌가?”라고 묻자 모든 청년들이 미리 이야기라도 한 듯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쓰면 허전해요.” 코로나가 사라져도 영원히 마스크는 안 벗을 태세였다. 코로나19가 세상에 등장한 지 1년 반이 지나가고 있다. 이 동안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특히 마스크는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됐다. 우리 모두는 연일 마스크가 코로나를 얼마나 잘 예방하는지에 대한 놀라운 뉴스들을 접하다 보니, ‘마스크 강박증’이라고 할 만큼, 마스크를 안 쓰면 죽을 것 같은 마음까지 드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마스크 강박증’은 코로나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믿음직한 마스크를 아주 오래 전부터 쓰고 살아 왔다. 심리학에 ‘페르소나’라는 용어가 있다. 원래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는 가면을 말하는 것
해체주의자인 데리다(Derrida)는 글을 쓰는 행위를 ‘글쓰기’로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텍스트의 의미는 또 독자의 사용에 따라서 다른 언어나 말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또 다른 단어나 말에 의해서 상치시킴으로써 이전의 의미는 현재의 독자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로 출현한다. 텍스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텍스트의 의미가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원의미를 연기하게 하는 것이다. Derrida에 있어서 텍스트의 의미는 차이와 연기를 결합한 “차연”, 즉 디페랑스의 개념이다. 하지만 해체주의 해석은 새로운 의미를 열어주기는 해도 텍스트가 지시하는 의미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기 때문에 성서해석에 접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신학자 캐빈 밴후저는 해체주의가 성서 텍스트의 의미를 “무위화” 또는 “니힐리즘”으로 이끌어갈 위험성이 있다고 비판하고, 영국의 신학자 엔서티 티슬턴은 성서라는 텍스트를 독자 자신에게만 애착을 느끼게 하는 “나르시시즘”으로 이끌어갈 위험성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에 근거하여 본 연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 그 자체를 환원시키거나 재고려해야 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이때 환
침례교 특히 미국 침례교회는 설교 뒤에 영적초청을 한다. “오늘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겠다는 사람은 손을 들어 표해 주세요.” 이에 손을 든 사람은 담대하다. 결단성이 강하다. 그러나 손을 못든 사람은 “어떡하지?”하며 망설이다가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다. 이런 경험을 수차례 하게 되면 영영 예수영접의 결단신앙이 사라진다. 불행하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하는 후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사랑하면 “사랑해요”라고 말하라. 예수 자기 땅에 오셨을 때 영접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로 갈라져 있다고 하였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에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이 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0~12) 짐을 지고 무거워 괴로움 당한 자를 초청하고 있지 않는가? 초청에 그냥 응할걸 그랬지하고 후회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지금이 바로 때는 때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고후 6:2) 우리는 부
이해인 시인은 ‘봄의 연가’라는 시에서 “우리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겨울에도 봄/ 여름에도 봄/ 가을에도 봄, 어디에나 봄이 있네, 몸과 마음이 많이 아플수록/ 봄이 그리워서 봄이 좋아서, 나는 너를 봄이라고 불렀고/ 너는 내게 와서 봄이 되었다, 우리 서로/ 사랑하면/ 살아서도/ 죽어서도, 언제라도 봄”이라고 봄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했다. 다윗도 드디어 그리워하던 봄을 맞았다. 인생의 봄이자 영혼의 봄이랄까? 그래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장래에도 인도하실 것”이라고 “에벤에셀 하나님”을 노래한다. 에벤에셀! 원래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돌 하나를 세우고 불렀던 이름이다. 원어 그대로는 ‘도움의 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이다. 전쟁에서 패하고 법궤까지 빼앗겼지만(삼상4:1, 5:1) 결국 패배는 승리로 바뀌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물론 이 승리는 그저 한 번의 승리가 아니다. 그래서 불렀던 에벤에셀 하나님, 우리 모두의 노래가 되면 좋겠다. 회개하며 부를 이름 ‘회개’는 사무엘 사역의 첫 선포였다. 마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외친 예수님이나 침례 요한의 첫 선
첫째, 비밀은 생각을 한다고 그 정체가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 비밀을 만들게된 원인이 어린 시절 특히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어린 시절 부모와의 대상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로 그비밀들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좋다. 그 비밀을 인지하기도 어렵지만 비밀을 찾아야만 한다는 강박에 빠지면 실제의 비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어린 시절에 받았던 고통에 직면하고 그 이후에 나타난 현상들을 살펴본 후에 자신이 쓴 가면에 대하여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대상과의 관계 가운데 대상에 의해서 비춰진 왜곡된 자아상을 가진 거짓 자기가 비밀이란 포장지로 참 자기를 꽁꽁 싸 놓았다. 역기능의 가족체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 부정적인 비밀로 참 자기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역기능의 가족체계를 유지시키는 원인을 모르는 가운데 꽁꽁 싸여진 비밀이 드러나게 된다면 고통이 더욱 가중되리란 두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그 비밀은 말해져서도, 드러나서도 안되는 존재로 비밀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지키기 위해 스스로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도 자신을 억눌러 마비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인지하고
“나 미국을 쓸고 주름잡고 다녔어요.” 오래 전 미국에서 조금 생활하다 온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으면 ‘미국에서 잘 나갔나 보다.’ 생각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타행에서 그것도 머나먼 이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나마 싸들고 간 사람들이야 다르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하층 생활을 하며 생활을 해야 한다. 그 말대로 대부분 이민자들이 건물 청소를 하거나 뜨거운 스팀이 나오는 세탁소에서 빨래를 하며 일을 한다. 말 그대로 미국의 건물을 쓸고, 수 많은 옷을 다림질로 다리며 주름을 잡는 것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오신 어느 목사님께서 “미국 유학시절, 미국 음식은 그렇게 맛이 없고, 과일도 달지도 않고, 고기도 질기기만 한 줄 알았다”며 나중 집회 초청을 받아 갔을 때 “그렇게도 음식도 맛있고, 과일도 달고, 질 좋은 고기가 있는 줄 알았다”고 하신 소리를 들었다. 계층에 따라가는 식료품이 있는 미국에서 가난했던 유학시절에 싼 것만 사서 먹었다는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얼마 전 연휴에 타지에서 직장을 다니던 딸들과 함께 이야기하다 “아빠는 대학을 가지 말고 한 해 쉬라고 했으니까 용돈 안줄거야” 말하
김난도란 교수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이 책엔 사회의 구성원으로 첫 발을 내디딘 새내기들, 곧 어른 아이들에게 용기와 격려, 도전과 비전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이 있었다. 그는 천 번만큼 이나 흔들린 후에 겨우 어른이 될 수있다고 피력했으며 사회에서의 부적응, 실패, 좌절, 시련 등은 인생 여정에서 당연히 있는 것이기에 극복해야 한 다고 썼다. 어린아이와 같은 크리스천 역시 온전해지고 성장해야 한다. 이것에 대해서 에베소서 4장 13절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추구해야할 목표를 제시해줬다. 또한 장성한 크리스천이 되기까지는 시험과 장애가 있어 수 없이 흔들릴 수 있다. 사탄은 크리스천을 그냥 두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미리 말씀하시길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 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고 하셨다. 이것은 베드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함으로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