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시편을 읽으면 찬양과 기쁨, 격려와 위로 그리고 감사와 환희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실망과 낙심, 낙담과 억압, 그리고 고통과 사별 수많은 상황들이 그 가운데 있어서 우리가 시편을 읽을 때 큰 도움을 얻게 됩니다. 시편 19편 1~6절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줍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이 하신 일을 나타내도다.” 그래서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들만 하나님께서 하신 위대한 일들을 보지 못한다고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53:1) 그렇습니다. 오로지 어리석은 바보들의 눈에만 저 아름다운 우주의 신비로움이 어떤 폭발에 의해서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우깁니다. 하지만 1~6절의 말씀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창조되었고 존재하며 그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자기를 계시(啓示)하심을 보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7절 이하에는 대 반전의 말씀을 보이십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통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살전 5:10)” 저는 예수님 때문에 미국에서 힘들게 취득한 일반 대학 졸업장을 버렸습니다. 저는 예수님 때문에 미국 시민권뿐만 아니라 같이 살던 부모, 형제, 친구들을 다 버리고 92년도에 한국으로 역 이민 왔습니다. 저는 예수님 때문에 한국에 올 때 부모님이 사 준 아파트를 팔아 성전 구입할 당시 헌금으로 모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저는 예수님 때문에 개척할 당시 수 년 동안 병이 들어 천안에 있는 단국대병원, 순천향병원, 천안의료원, 심지어는 한의원까지 다니면서도 효험이 없어 먹다 남은 약만 해도 농구공 부피만큼 될 정도로 건강을 잃어 죽음 바로 앞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저에게 어느 날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몸이 지쳐 파김치가 되어 잠을 자던 저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분은 저의 앞 시계 2시 방향으로 1m 거리에 앉아 계셨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희미하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몸 전체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분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지식의 은사가 임하면서 주님이라는 깨달음이 왔을 때, 저는 얼마나 기뻤던지 말로
들어가는 말 성서를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접근은 신학적 관점에서 주어진 본문의 원래적 의미를 찾는 것이다. 주어진 본문의 의미 파악은 성서 저자의 저술 목적과 주요 관점을 이해함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떤 글이든 그것을 이해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것은 그 기록된 내용의 문학적 형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문학적 형태는 장르(genre)와 구조(structure)와 문체(style)라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로 구성된다. 독자가 어떤 문학 작품의 장르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글에 대한 해석은 달라진다. 실제로, 독자들은 픽션과 논픽션을 다르게 읽으며, 과학과 신화를 다르게 읽는다. 장르를 오해하면 글의 내용과 의미를 오해하게 된다. 저술가는 특정한 표현 방식을 택하여 자신의 생각과 뜻을 드러낸다. 장르는 그의 이러한 선택 곧 글을 쓰는 방식이다. “장르”(Genre)는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말로서 영어 단어 중에 “general”(일반적인), 또는 “generalization”(일반화) 같은 단어와 연관된다. 문학에 있어 하나의 장르는 유사성이라는 조건으로 서로 연관되는 본문의 한 종류를 말한다. 문학에서 장르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서로서로 하나 혹은 그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실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드셨다.”- 프리드리히 폰 쉴러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정의 달이기 때문입니다. 왜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했겠습니까? 3월이나 12월 혹은 다른 달은 가정의 달 자격이 안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5월에 가정 또는 사람과 관련된 의미있는 기념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1일 근로자의 날을 시작으로 5일 어린이날, 8일 어버이날, 11일 입양의 날, 16일 성년의 날, 21일 부부의 날 등 참으로 뜻깊은 좋은 날들이 몰려 있습니다. 특히 15일은 스승의 날인 동시에 UN이 정한 가정의 날입니다. 가정의 달에서도 가정의 소중함을 깊이 아로 새기는 날입니다. 현대 사회는 핵가족화 되면서부터 많은 가정들이 수많은 위기와 진통을 앓으며 시련과 아픔을 겪는 요즘입니다. 많은 가정들이 무너지면서 가족해체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집(house)은 늘고 있지만 가정(home)이 줄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정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부부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오고 그 결과 “3H”(Holy, Harmony, Happy)가 깨졌습니다. 그로 인해
나무에 대해서 특별한 경험을 가졌거나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나무를 사랑하고 가꾸어 본 사람이라면 대게 자기 나름대로의 식견(識見)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필자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로서 나무에 대한 몇 가지 소견을 나누고자 한다. 목적을 가지고 심는 나무 알다시피 과일과 열매를 얻기 위해 심는 유실수, 아름다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조경수(造景樹), 목재를 생산하기 위한 조림수(造林樹), 홍수와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사방수(砂防水), 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림(防風林), 양반집 뜰에 심었다 해서 양반나무라고 불리는 남천(南天), 파란 열매가 빨갛게 익은 채 겨우내 달려 있어서 귀신을 쫓는다는 산수유, 우물가의 향나무, 울타리에 측백나무, 노충(路?)을 막아주는 상록수, 뒤안 울타리 대나무, 심은 이의 품위를 지켜주는 나무 중의 귀공자 소나무 등이 있다. 고창 선운사 둘레의 동백나무는 소나무가 화재에 약한 점을 고려해서 화재 시 불길을 막기 위해 심었다고 하며, 선비들은 글방 앞에 길상목(吉祥木) 또는 학자나무라고 불리는 회나무(懷花木) 한 그루를 심었다. 목적에 따른 관리 목재생산을 위해 조림한 나무는 아래 가지와 잔가지를 쳐서 숲에
할렐루야!(Hallelujah) 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듣고 또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헨델의 메시아 할렐루야를 합창할 때 할렐루야! 부분을 부를 때는 관중들이 다 기립하여 할렐루야! 를 합창하면 할렐루야! 라는 말이 얼마나 장엄하고 감동적이고 멋있고 은혜로운 말인지 온 몸으로 느낄 수가 있다. 선교사역을 위해 외국에 가서 목회자세미나나 집회를 할 때 말이 통하지 않아서 답답할 때가 많은데 할렐루야! 라는 말은 어디서나 다 통한다. 중국에서도 베트남에서도 태국에서도 인도네시아에서도 미국에서도 그리스도인들끼리는 다 통하는 세계 공통어다. 할렐루야! 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는 뜻으로 환희, 감사, 간구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기쁠 때도 할렐루야! 하고 감사할 때도 할렐루야! 하며 기도할 때도 할렐루야를 한다. 기쁨과 감사를 표현할 때 하나님께 고백할 때 할렐루야! 라고 하는 것이다. 기쁘고 감사할 때,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기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뜻으로 할렐루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복을 주셨기 때문에, 사업을 잘되게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활력 있는 삶을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실제적 삶에서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의식적으로 가져야하며 주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용서, 변화 이런 삶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연속적인 관계 안에서 “열매”맺는 삶을 말합니다. “열매”란 영성, 내적인 인격, 이러한 것들이 주님과 교제하는 삶 가운데서 주님을 닮아가며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을 그림같이 명쾌하게 설명하시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많은 결실의 예(例)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익숙한 것으로 우리와 주님의 관계를 설명하셨는데 그것이 포도나무와 가지, 그리고 농부입니다. 우리는 이 포도나무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 정체성에 대해서 우리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라는 주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배타적의미를 가진 말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관계 안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끼어들 여지가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조차도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주님의 관계를 넘어설 수 없음을 천명하신 말씀입니다.
군목 6년차부터 한 2년간 충남 홍성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충남 강경이 부모님의 연고가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내면에 충청도의 성향이 흐르기는 했겠지만, 본격적으로 충청도에서 살아본 것은 대전이 광역시가 되기 이전 학교 다닐 때 이후론 처음이었습니다. 한 번은 홍성의 왕복 1차선씩 밖에 안되는 지방도로로 예하부대 교육을 가고 있었는데 앞에 가는 차가 영 속도를 내지 않아 제 차 뒤로도 적잖은 차들이 줄을 서서 답답한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차 뒤에는 “초보운전” 뭐 이런 문구가 아니라 좀 더 복잡한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그렇게 큰 글씨가 아니어서 좀 가까이 가서 읽어보았더니 “답답하시지유? 지는 환장하겄슈~”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결국 초보운전이라는 얘기를 그렇게 써놓은 것입니다. 그냥 속도내고 지나는 길이었다면 차 뒤에 무슨 글을 써놓았는지 관심도 없었겠지만, 그 차가 내게 신경을 쓰게 하는 바람에 관심을 가지게 되니까 그런 장난 같은 글이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다른 경우도 있었는데, 한참 러시아워에 대전 시내를 운전하고 가고 있었는데 앞서가는 택시 뒷 범퍼에 작은 글씨로 뭐라고 붙여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평소라면 보일 리 없었던 글씨
넷째로, 침례교운동은 종교의 자유와 교회와 국가의 분리(국교체제의 기독교가 아닌 자유교회)를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신자들의 영적인 공동체”(Spiritual Body of Believers)여야 한다는 확신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네델란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향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에서 발견해 낸 신앙원리였다. 교회와 국가가 긴밀하게 결탁되었던 로마가톨릭 교회의 유산인 유아세례 전통을 초창기 침례교 개척자들은 과감하게 배격하였고, 교회는 세속국가나 권력기관과는 무관한 신약성서적 교회, 다시 말하면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 313) 이전의 순수했던 교회를 회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초창기 침례교 개척자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Religious Freedom for All)를 이상으로 하여 세속권력자들은 인간 내면의 종교나 신앙이나 양심의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침례교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사함과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임을 고집스럽게 믿지만, 동시에 불신자들과 다른 종교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믿는다. 다섯째
강경 옥녀봉에 비가 내린다 1944년 5월 10일 일제의 강요된 신사참배 거부에 순교, 몰수, 해체의 고난을 받아내느라 십자가를 져야하였던 동아기독대의 아픈 슬픔, 칠십이년 세월 참았던 무게감 견딜 수 없어 2016년 5월 10일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눈물이 비로서 옥녀봉을 적신다 이제야 우리들 기억속에 씨앗 뿌려저 기독교한국침례회 신사참배 거부교단 기념예배로 움 돋은 거룩한 예배 옥녀봉 적신 비로 옥녀봉 초목의 푸르름이 생명으로 가득하듯 우리 선조들의 그 슬프고 아팠던 눈물이 오늘의 우리 기독교한국침례회 부흥을 가져왔는데 1944년 5월 10일 잊혀진 과거로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질뻔한 하마터면의 순간이 아찔하게 전율하며 옥녀봉에 내린 비는 우리의 뇌리를 두드린다 옥녀봉에 내린비는 슬픔인가? 은혜인가? 우리 선조들이 진 십자가는 슬픔속에 담겨진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이거늘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 어떻게 받고 있는가? 기독교한국침례회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은 어떤 역사로 그려지는가? 칠십이년전의 동아기독대 그 모습따라 그려지고 있는가? 순교의 피로 지켜져 물려받은 선조들의 유산 삼삼오오 짝을지어 이리저리 뜯어대는 우리들 아닌가?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