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요셉을 모르는 새로운 왕이 일어나 이스라엘 민족을 학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강성하여짐으로 적과 합세해 우리를 물리치고 여기서 나갈 것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장정만 60만 명의 무보수 일꾼은 애굽 왕에게는 큰 유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고통과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이뤄지고 있었으니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았으니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어려운 고역으로 고통을 안겨줬습니다. 하루에 일할 계획표에 의해 철저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게 됐습니다. 그 후에 또 하나는 산파들을 시켜서 남아면 죽이고 여아면 살리라는 엄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합니다. 왕이 그그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고 물었으나 산파들이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튼튼하여 우리가 가기 전에 미리 잘 낳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도 안 되니까 군인들에게 명령합니다. 여아이면 살리고 남자아이면 죽이라는 엄명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순수하다’라는 말은 다른 것이 전혀 섞이지 않은 것을 뜻합니다. 빌립은 눈치도 느리고 특별한 재능도 은사도 없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순수한 믿음을 가진 제자였습니다. 순수한 믿은은 과연 어떤 믿음일까요? 단순한 순종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1:43) 예수님은 빌림을 만나셨을 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이때 놀랍게도 빌립은 예수님을 그냥 따라갑니다. 심지어 성경은 ‘빌립이 예수를 따라갔다’는 결과도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순종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자가 됐습니다. 순수한 믿음의 사람은 그대로 믿지만 의심과 걱정이 많은 사람은 쉽게 믿지 못합니다. 그러니 쉽게 순종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 명령에 의심하고 주저하기보다 오직 주님을 신뢰함으로 단순한 순종을 하기 바랍니다. 분명한 확신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고 하용조 목사의 ‘초점’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며 하나님의 길이 우리의 길과 달라
성경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며 또한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성경은 천지창조로 시작해 세상 종말까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하나는 구약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 기록된 것이고 또 하나는 신약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사역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알고 믿고 구원받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은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예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거기에 하나님의 시간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입니다. 출애굽기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녀들이 애굽으로 내려와 살게 됐다는 것으로 창세기가 끝나고 이 모든 것이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가 됐고 형제들을 초대했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앞서 보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
우리나라에서 욕심 많은 사람에게 ‘놀부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영어권에서는 의심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 ‘도마와 같은 사람’(Doubting Thomas)이라고 합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의심했던 제자 도마’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도마는 더 이상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의심이 변할 수 있었을까요? 의심이 찾아올 때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요 20:24) 도마가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자 자신도 함께 죽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는 자가 되겠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의심이 많은 도마가 됐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구멍 난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며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려주셨을 때 그 자리에 도마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니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이 닫혀 있을 때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
기독교 신앙을 역설의 종교, 역설의 진리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상식과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이해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버리는 것이 얻는 것이며 죽는 것이 곧 살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가장 큰 역설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이시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나귀를 타신 왕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마 21:11)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나귀를 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스가랴서 9장 9절 말씀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나귀를 탄 왕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볼품없어 보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섬기러 오신 왕, 낮아지고 겸손의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구속의 역사를 이루는 왕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보며 회개하고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진노하는 왕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
우리는 예수님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믿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4장 46~54절은 가버나움에 사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가나에서 말씀으로 치유한 표적을 다룹니다. 사마리아에서 갈릴리에 가셨고 가나에서 요한복음 7가지 표적 가운데 두 번째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고향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큰 배척과 영적 무관심이 팽배했던 곳입니다. 주님은 이 불신의 땅 갈릴리에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준 왕의 신하를 만납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혹시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을 바랐으나 주님의 엄한 책망에 불신을 깨고 말씀 하나만 붙들고 일어납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약 32km(80리)를 단숨에 달려옵니다. 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자기 아들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자마자 체면 불구하고 자기 집으로 모시어 아들의 병을 고쳐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왕의 신하는 주님의 능력이 필요하여 주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가리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고 책망하셨습니다. 그의 믿음은 바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기복신앙에 지나지 않았기
본질의 중요성 기독교 신앙의 이해를 위해 먼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본질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물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고유하고 독자적인 성질’을 뜻합니다. 사물의 현상 뒤에 있는 실제로서 ‘그 사물이 그 사물이 되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외형적 현상이나 일시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 사물이 그 사물로 존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만일 그 본질이 빠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원래의 존재 의미를 지닐 수 없으며, 결국 가짜가 되거나 헛된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를 들면, 팥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팥입니다. 팥이 들어 있지 않은 빵은 팥빵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그저 평범한 다른 빵에 불과할 뿐입니다. 팥빵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팥이 포함돼야 하며, 팥이 빠진다면 그것은 팥빵으로서의 본질을 상실한, 본래의 팥빵의 의미를 잃은 것이 됩니다. 이처럼 본질이 빠지면 다른 성질의 것이 되고 맙니다. 결혼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단순한 계약과 거래 관계에 불과하며, 진정한 의미에서 결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어떤 것이 그 본질을 상실하면,
신약성경에 두 사람의 요한이 등장하는데 한 사람은 침례 요한이고, 또 한 사람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요한서신을 기록한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는 ‘사랑의 사도, 사랑받는 제자’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 자신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합니다. 요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사랑하는자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 19:26)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쓴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닌 주는 것으로 발휘해야 할 기술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의 곁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주님을 따랐던 여성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인 요한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곁을 지킬 수 있었습니까? 주님을 사랑했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니까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곁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하나되는 자 예수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학(지식)은 필요 없어! 그냥 믿으면 돼! 머리로 따지지 말고 느끼는 대로 믿어!”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서도 생각을 멈추라, 연구(공부)를 멈추라, 질문을 멈추라고 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내용의 지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매우 지성적이셨습니다. 율법을 정확히 이해하셨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논리로 꺾으셨고, 성경을 통전적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지식과 삶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깨달아라”(신 4:39) “주의 율법을 묵상하라”(시 1:2)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라”(빌 1:9~10)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롬 12:2) 그렇다면 지식과 삶(행함)이 균형을 이루는 신앙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지식을 반, 실천을 반으로 섞는 절충적인 신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먼저 지식적으로 바르게 알고, 그 알게 된 그 지식의 토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열매 맺는 삶이 균형 잡힌 바른 신앙입니다. 여기에는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삶은 지식(이해와 깨달음)을 뿌리로 삼고 있습니다. 올바른 이해와 지식 없이 올바른 신앙과 삶이 나올 수 없고, 올
마태는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당시에 세리들은 로마에 납부해야 할 세금보다 더 많이 징수해서 자신들의 배를 채웠기에 민족의 반역자로 천한 자, 죄인이라 여겨졌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세리 마태에게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며 제자의 자리로 부르시게 됩니다. 일어나 따르라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 9:9) 사람들이 세리는 싫어하지만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에게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세금을 적게 내게 해달라고 머리를 조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마태는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는 단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행동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지금까지 선택했던 돈과 명예의 자리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주님이 부르실 때,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일어나 따라감으로 위대한 제자가 됐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담대하게 일어나 주님께 순종하고 따라가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함께 있으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