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서재] 저자 등판 미래세대 프로파일링 - 김현철 목사
창세기 2장 3절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읽고 나면 모든 창조가 끝나야 할 것 같은데, 바로 이어지는 2장 4절에서 다시 한 번 창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앞선 창조이야기와 어딘가 다르다는 점이죠. 2장 4절은 사실 두 문장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개역개정은 한 문장으로 번역했지만 새번역은 두 문장으로 번역해서 보다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앞 문장은 앞선 2장 3절까지의 창조이야기의 끝마무리로 볼 수 있습니다. 문장 마지막에 마침표를 찍듯이 1장 1절로부터 시작된 창조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문장은 앞선 창조 이야기를 잊기나 한 듯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또 다른 창조 이야기가 2장 말미까지 계속되죠. 결과적으로 1장과 2장에 창조 이야기가 두 번 나오는 셈인데, 특히나 앞선 이야기에서는 사람 창조 이전에 식물이 만들어진 반면, 두 번째 창조에서는 사람 창조 이후에 식물이 나타난 것으로 나오다 보니 독자 입장에서는 더욱 헷갈립니다. 새번역처럼 2장 4절이 두 문장으로 분리되면 그나마 다른 이야기로 느껴지지만 개역개정처럼 한 문장으로 써 놓으면 앞뒤 구분이 되지 않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대부분 부자 청년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그는 율법적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날 이와 같은 청년이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결국, 청년은 근심하다가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증언입니다. 한번 가정해 볼까요? 만약 이 청년이 재물을 다 팔았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혹은 이 청년에 대한 세상의 판단은 어땠을까요? 먼저 세상의 판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날 정말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전 재산을 다 바친 청년이 있다면, 세상은 이 청년을 존경할까요? 존경은커녕, 아마 미쳤다고 하진 않을까요? 그를 괴짜라며 비웃거나 어리석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가정해, 그 부모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대성통곡을 할지도 모를 일이고 당장에 그를 잡아와 정신병원 의사의 감정을 받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도와 성공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원익이 쓴 ‘신화, 인간을 말하다’는 이 말을 조금 더 심층 깊은 의미에서 다룹니다. 고대 신화나 스토리에서 보면, 주인공인 영웅에게는 언제나 그를 이끌었던 정신적 스승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아세아연합신학교 신성욱 교수는 오늘날 설교자의 설교가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처럼 설교자들이 설교했다는 것이지요. 이것만큼이나 비성경적인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강단에서 자주 인용됐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판을 통해 신 교수는 이 문장을 바꿉니다. 오히려 성경적인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능력이 없는 자를 도우신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스스로 선을 행할 수도 없고 구원할 수 없는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필자는 이와 같은 설명도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돕는지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더 깊은 논의를 위해 요한복음 1
‘당신은 어느 세대입니까?’ 책 속에 이런 질문이 있다. 이 글, 아니 신문을 읽고 계시는 당신도 답해 보시면 내가 어느 세대인지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사를 들으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1번, 다 사랑스러워 / 2번, 핫이슈 / 3번, 오로나민C / 4번, 이근 대위 / 혹 이 중에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다면 당신은 X세대 이전의 베이비부머 세대가 확실하다. 그렇다면 Z세대 이후인 알파 세대와 소통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불가능할 소통을 가능케 하는 묘약이 여기에 있다. “미래세대 프로파일링” 의 저자는 청소년들의 냉철한 프로파일러가 돼 다음세대의 행동패턴과 심리학 측면, 실제적 통계를 분석해 우리가 앞으로 만날 미래세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실 “프로파일러”라는 명칭이 범죄자의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것이라서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미래세대를 분석하고 그들의 행동방식과 성격을 분석하는 것은 범죄자의 심리상태를 분석할 만큼 고도의 전문성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메타버스 교회와 다음세대 현장 전문가인 저자의 이야기는 미래세대와의 진정한 소통의 가이드를 보여준다. “부모님과 말이 안 통해요!” “우리 아
용감한 전사가 대담하게 앞으로 나가면서 적의 모든 화살을 가로막을 때, 또한 뒤따라오는 그의 병사들을 보호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 병사들이 그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랑스러운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남편에게 그토록 닮고 싶었던 인생의 아름다운 본보기를 찾았을 때, 그리하여 그를 의지하면서 그의 옆을 걷고 있다면, 우리는 이 아내가 남편을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대담한 스승이 조롱으로 에워싸이고 질투로 핍박받으면서 조용하게 그의 자리에 서 있을 때, 모든 공격이 오직 스승에게만 향하고 있고 그를 지지하는 제자에게 향하고 있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이 제자들이 그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암탉이 적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암탉의 날개를 펴 뒤에 따라오는 병아리들을 덮고 있을 때, 우리는 이 병아리들이 암탉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관계는 바뀌어야 합니다. 용감한 전사는 그의 병사가 진실로 그를 따르는지 분명히 할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서야 합니다. 모든 화살이 병사의 가슴을 겨냥할 때, 실제로 나타난 위험에서 그가 그를 따르는지, 혹은 병사가 용감한 자를 잃었
“그 어려운 개척교회 목사로 어떻게 살려고요.” 부목사 생활을 정리한다. 7년을 함께 했던 성도들, 밤낮 살피던 교회 건물과 시설, 어려운 일을 함께 치르던 동료들과도 헤어지게 됐다. 교회 가족들이 손을 잡고 위로와 격려를 건넨다. 자격 없는 내게 전해지는 감사 인사에는 민망한 마음마저 든다. 이제 모든 익숙한 것에서 떠나게 됐다. 이렇게 또 걸음이 옮겨지는구나. 이제, 가장 속도 내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생겼다. ‘개척지 선정? 개척 멤버? 비전 선포?’ 아니다. 오실 사역자를 위해 얼른 사택을 비워 드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식구들이 살 집을 찾아야 했다. 하나님께서 조급한 마음을 살피시고 불쌍히 여기셨을까? 재정은 어려웠지만 넓은 집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개척 앞두고 내 생애 가장 넓은 집에서 살게 될 줄은 상상해 본 적도 없다. “우리 이런 아파트에서 살아도 돼요?” 개척교회 목사가 너무 큰 집에 사는 것 아니냐며 아내는 좋아하면서도 불안해하는 눈치다. 그렇지. 주변 시선이 염려도 되겠지. 나 역시 그런 부담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개척 선물이라며 우리 부부는 금방 재잘거리며 털어버린다. 40세대, 한 동짜리 작은 아파트였지만 우리 가정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여섯째 날의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은 처음으로 ‘심히’(‘참’)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쩐지 이 부분에서 그간 미소만 짓던 하나님이 크게 웃으며 기뻐하시는 모습이 상상되네요. 이렇게 창조의 설계는 실제 세계에 그대로 반영됐습니다. 하지만 인간을 만드시기로 결정하면서 세우셨던 다른 계획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죠. 계획이 완전히 성취되기 전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창조 자체는 이것이 마지막이었기에 하나님은 안식을 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 하나님의 일에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 그리고 하나님도 쉼이 필요하다는 점은 어쩐지 좀 낯설게 느껴집니다. 전능한 신이고 시간과 공간을 모두 뛰어넘는 분이라면 휴식 따위는 필요치 않을 것 같거든요. 때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하나님의 이미지에 인간이 만들어낸 절대자의 이미지를 덧붙이곤 합니다. 신은 인간과는 다른 차원의 분이며, 그가 할 수 없는 것은 세상에 없고, 엄중한
쇠렌 키르케고르는 철학뿐 아니라, 기독교에 굉장히 중요한 많은 작품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거의 소개가 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키르케고르에 대한 오해로 인해 국내 신학계에 저평가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신학뿐 아니라, 문학, 철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음에도 이러한 사실이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공간을 통해 조금이나마 신학과 기독교에 어떤 작품을 남겼는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미 키르케고르에 대한 개론적인 소개는 많이 있으나, 기독교적인 작품에 대한 소개는 거의 전무한 상황입니다. 따라서 저는 각론으로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고 이것을 현대적으로 각색하여 제공하고자 합니다. 그는 생전에 가명의 사상서와 본명의 강화집을 남겼습니다. 가명의 사상서는 굉장히 철학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전체가 철학적인 것은 아닙니다. 일부의 작품은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습니다. 가명의 사상서에 대한 내용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그의 본명의 강화를 먼저 소개할 예정입니다. 우리말로 ‘강화’로 옮긴 덴마크어는 ‘taler’이고 영어로는 ‘discourse’라는
신앙생활은 새로운 활력이 됐다. 성공이 전부라고 믿었던 내게 다른 희망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줬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예수님의 뜻을 살피는 재미가 독특한 즐거움이 됐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나를 돌보시는 이모 입장에서는 나의 변화된 모습이 영 마뜩지 않았던 것이다. 부모 떠나 이모 손에 자라고 있었는데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최소한 이모님의 시각에서는) 교회라는 곳으로 매주 출근하고 있었으니, 많이 불편하셨으리라 짐작이 된다. 오르지 않는 성적, 잦은 외출로 결국 나는 ‘교회 출입 금지’ 명령을 받게 된다. 명령을 어기고 교회를 가다 걸리고 말았다. 나름 조심스럽게 갔는데,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교회 가는 모습이 보인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더는 교회를 갈 수 없게 됐다. 지금까지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살았는데, 이번에도 말씀 잘 듣는 아이의 태도를 유지해야 할까? ‘교회를 옮기자. 멀리 가자.’ 큰 결단을 하게 된다. 거짓말. 나쁜 것 알지만 학교 간다는 핑계로 친구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로 옮겨 계속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무려 버스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이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고 이 즐거움을 놓아버릴 용기도 나지 않았
제가 대학생 시절, 기독교 서점에 가면 무슨 무슨 예화집이 꽤 있었습니다. 어느 출판사에서 기획하고 펴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다양한 신앙예화들이 있어서 설교에 필요한 글들을 끌어다 쓰기도 했고, 유명 설교가들의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예화도 있었지요. 양심적인 예화 사용은 당연히 출처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유행하던 예화의 대부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극적 헌신이나 사랑이 전도의 열매를 맺거나 축복을 받는 결론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런 류의 예화가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당시 유행했던 번영신학에 기반한 축복론과 성장주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이 예화들을 설교에 인용한 분들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런 예화들의 심각한 문제는 사실이 왜곡되거나 확인되지 않은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포장한 가짜 간증들이 넘쳐나거나 왜곡되고 과장된 이야기들이 버젓이 설교에 끼워져 성도들에게 무분별하게 뿌려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와 같이 소재불명이나 심각하게 왜곡된 예화를 설교 시간에 인용하는 분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최근 그 추세가 바뀌었고, 시대에 맞게 팩트 체크 후 출처를 분명하게 언급한 후 사용하는 변화가 이
“들리는 설교 유혹하는 예화”의 저자는 우거진 정글의 길을 만드는 정글도 같다. 또한 그의 독서는 거침없이 단단한 문장들을 파헤치고 의미를 뽑아내기에 시기와 질투를 유발한다. 이 책의 단단하고 수려한 문장은 시선을 고정하게 만들고 깊이 있는 통찰과 신박한 시각은 차원을 달리한다. 수많은 책을 탐독하고 결정체로 얻은 진액을 저자의 내공으로 꾹꾹 눌러 담은 책 이어서 개인적으로 성도들에게는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동안 얕은 묵상과 식상한 예화로 인스턴트 메시지를 남발했던 나 자신이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목회자에게 가장 영광이며 부담스러운 것을 묻는다면 단언컨대 “설교”라고 대답하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어떤 일이든 하면 늘고 시간을 더하면 쉬워지지만 설교는 차원이 다르다. 하면 할수록 어렵다. 시간을 더하면 부족한 나의 모습과 동시에 행간의 뜻을 발견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메시지가 목회자 개인만의 누림이 아니라 듣는 공동체의 사람에게도 전달돼야 하기에 목회자는 더 깊은 묵상의 부담을 매번 경험한다. 이 책의 저자 이재현 목사는 목회자에게 필요한 책 읽기는 잃어버린 균형을 다시 찾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균형을 잃고 넘어진 자리는 스스로에
일요일 아침, 오늘도 운동복 차림에 칫솔 들고 동생과 목욕을 다녀왔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이어오던 패턴이다. 늘 가벼운 걸음이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못하다. 고등학교 첫 수능 모의고사 결과를 받았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까지 버티던 성적이 기어이 무너지고 말았다. 중학교 때는 전교 10등에서 20등을 오갔는데, 고등학생이 되어 받아 든 첫 성적표는 반에서 10등이라는 숫자가 박혀 있었다. 늘 벼락치기로 성적을 유지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너무 큰 폭으로 떨어져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내 인생이 끝나는 기분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며 큰 꿈을 품고 부모님을 떠나 대전으로 왔다. 부모님은 내가 학교 선생님이 되거나, 경찰대학을 나와 간부가 되기를 원하셨다. 나도 부모님의 바람대로 화이트칼라로 양복 입고 출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노동자이신 아버지의 삶, 그래서 부모님도 나도 더 간절했는지 모르겠다. 내게는 두 날개 인생 성공 전략이 있었다. 첫째는 공부 잘해서 꼭 성공하겠다는 것. 둘째는 도덕성을 지키며 성공하겠다는 것. 착실하게 공부해서 내 삶을 멋지게 만들어내고 싶었다. 양복 입고 출근하며 예쁜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의 배웅을 받는 것? 아,
창조 이야기는 신비로운 스토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과 섭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참고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완전하게 충족시켜주지는 못하죠. 읽어도 의문점이 남고, 어떤 것들은 앞 뒤가 안 맞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검찰이 법정에 제시한 증거물이 아닌 이상 오류를 찾아내기 위해 우리가 아는 지식들을 총동원해 세세하게 검증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창조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하나거든요. “세상은,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됐다.” 과학적, 철학적 논쟁들은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맡겨 두고 우리는 독서를 계속하도록 하죠.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개역개정)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새번역) 하시고, 여섯째 날에는 사람이 창조되는 이야
앞집, 방 한 칸에 혼자 사는 아저씨. 나는 그 아저씨를 ‘농협 아저씨’라 불렀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아저씨가 농협에 출근하고 있었기 때문. 시골살이, 재미있는 게 별로 없었던 내게 자주 놀러 오라는 아저씨 말씀에 민폐인 줄도 모르고 거의 매일 문을 두드렸다. 거기에는 맛있는 빵도 있고 뭔가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흐르는 라디오가 있었다. 우리 집과 다르게 연탄 따위는 아끼지 않는 훈훈함도 있었다. 뜨끈한 이불 위에서 뒹구는 여유는 어린 내게도 충분한 쉼이 되었다. 최고다. “재철아, 교회 가보지 않을래?” 함께 교회 다녀보지 않겠냐는 제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인데 두렵기보다는 뭔가 모를 설렘에 냉큼 엄마에게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주일학교 예배를 참석하게 됐다. 교회는 농협 아저씨 방보다 더 좋았다. 친절했던 농협 아저씨 같은 어른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화장품 향 짙었던 선생님.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은 화장품 방문판매 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뭔가 분위기 있게 양복 입은 부장 선생님. 앞에서 멋지게 노래 부르는 선생님까지. 커다란 종이에 그려진 악보를 보며 큰 소리로 따라 부르던 노래도 재미났다. 교회에서 보고 들은 것을 집에 와서 재잘거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