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구성요인은 성경의 주요 교리와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과학은 인간을 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된 하나의 생명체라고 말하고; 성경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육체에 생기(하임)를 불어 넣어 창조하신 생령(하야), 즉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네페쉬)라고 말한다(창2:7). 그런데 인간의 정신적 실체인 영혼을 영과 혼으로 구분해서 삼분설(三分說)을 주장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삼분설은, 성경에는 영(루아, 프뉴마, spirit)과 혼(네페쉬, 프쉬케, soul)이라는 별개의 어휘가 있고, 또 그것은 각각 독립된 실체로서, 영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선한 일을 도모하며 혼은 육체에 기인한 지정의(知情意)에 속해 있어서 육의 소욕대로 살려고 하는 의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혼’이라고 번역된 ‘네페쉬’(히)와 ‘프쉬케’(헬)는 때로는 영으로, 때로는 영혼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삼분설의 주장과는 달리 ‘네페쉬’가 ‘혼’이 아니라 사람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몇 곳을 제시하면:(1)“야곱의 집 사람(네페쉬)으로 애굽에 이른 자”(창46:27), (2)“사람(네페쉬)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창14:21), (3)“피를 먹는 그 사람
구약성경에 보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수1:1)와 같은 식으로 어떤 사람을 소개할 때 그 부모를 함께 소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좀 심하면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우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삼상1:1)라는 말씀처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집안 내력을 다 소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믿기는 성경은 어느 한 부분도 의미 없이 기록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을 소개하는 것에도 다 특별한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에는 하도 같은 이름들이 많다보니까 그 부모와 할아버지까지 내력을 소개함으로 구분했을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같은 이름이 많았기 때문에 상당히 혼란스러웠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다보면 저도 모르게 어떤 사람에 대한 인상과 기대가 그 부모가 누구인가에 어느 정도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훌륭한 사람이면 그 자녀도 어느 정도는 훌륭한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되고, 그 부모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하면 그 자녀의 삶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경계해야할 신앙의 형태 가운데 하나가 민족주의적 신앙이다. 심지어 국수주의(Ultranationalism)적 메시지도 아무렇지 않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8월 15일 우리는 광복 70년이라는 뜻 깊은 날을 보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보다 이 날을 축하하고 애국, 애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애국과 애족심이 잘못 되었다면 잘못된 의식을 수정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와 메시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동방의 한 나라 우리나라와 민족을 선택하셨다”고 한다. 이 사상과 신앙은 매우 위험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선택하셨다. 신약에 와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를 향하여 아모스 선지자는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사회와 국가에 잘못된 안전에 무심할 뿐만 아니라 편승하기까지 한다. 다윗과 솔로몬 치세 이후 가장 번영하고 있는 북이스라엘을 향해 40여년 후에 닥쳐올 국가의 멸망의 위험을 선포 했듯이 잘못된 안전에 취해 있는 대한민국
완화돌봄 대상인 시한부환자의 심리적 변화과정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밝힌 퀴블러-로스(Elisabeth Kubler-Ross)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환자들이 다음과 같은 심리내적 단계를 겪는다고 설명한다. 첫째, 부정/부인 단계: 자신의 진단에 대한 부정. 때때로 이 단계는 “충격”으로 묘사되어 멍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둘째, 분노 단계: 초기의 충격과 부정이 지나간 뒤, “왜 하필이면 나인가?” 이러한 분노는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대상에 여러 가지 방법과 표현으로 투사된다. 셋째, 흥정 단계: 환자가 현재 상황 해결을 위하여 의료진이나 하나님께 흥정을 해보는 단계이다. 넷째, 퇴행(의기소침) 단계: 여러 가지 부정적인 신체적 증상을 경험하면서 환자는 자신이 회복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고, 스트레스, 긴장, 죄책감이나 무가치함과 더불어 임박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어 우울하게 된다. 이 때, 환자는 점점 외부와의 반응을 회피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에 의해 압도당하게 된다. 다섯째, 수용 단계: 이 상태의 느낌은 임박한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함으로 고통과 투쟁이 멈추고 그냥 아무생각이나 느낌이 없는 휴식과 같은 시간이다. 이
필자는 요한복음에서 주 예수의 세 번째 현현 사건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계속 살펴보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고 제자들을 초청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직접 주시는 주님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저자는 이것을 통해 부활의 예수께서 오병이어 사건 때 무리에게 떡과 생선을 주시던 때의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그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을 표현한다. 이것은 누가의 엠마오 사건에서 부활의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신” 사건에 상응한다(눅 24:30). 요한은, 누가와 마찬가지로, 부활의 예수께서 오병이어 사건 때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최후의 만찬 때의 모습으로 현현하신 것이 제자들로 하여금 부활의 사실을 확고하게 받아들이게 만든 결정적 사건이라는 것을 나타낸다.예수는 베드로가 큰 물고기들로 가득 찬 그물을 끌어온 상황에서 그가 준비한 아침 식사에 제자들을 초대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21:12). 예수께서 준비한 조반과 관련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 거기에 이미
아랍의 기원‘아랍인’은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민족을 형성하고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뜻하며 현재 약 삼억 명의 인구가 대부분 팔레스틴 주변에 거주한다. 성경이 말하는 그들의 기원: 1)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의 후손사래에게 쫓겨난 하갈이 어린 이스마엘을 안고 광야 술 샘물가에서 통곡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이스마엘의 후손이 번성해서 열 두 두령을 낳고 큰 나라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창16:10,17:20). 야곱의 아들들에게서 요셉을 사서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아넘긴 대상(大商)들이 바로 그들의 이복 할아버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었다(창37:25~28). 2)롯의 두 딸이 낳은 암몬과 모압의 후손롯이 소돔의 멸망을 피해 산 속 동굴에 숨어 지낼 때, 그의 두 딸이 땅 위에는 자기들 세 사람만 생존한 것으로 판단하고 후손을 남기기 위해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먹여 잠들게 하고 동침해서 큰 딸은 모압을 낳고 작은 딸은 벤암미, 즉 암몬을 낳았으니 그들이 각각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되었다(창19:30~38). 3) 아브라함은 만년에 그두라를 첩으로 맞아 시므란과 미디안을 포함해서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창25:1~4
며칠 전 TV를 보다가 정말 봐서는 안 되는 장면을 보았다. 전라도 전주에서 새벽 5시쯤 산책을 가던 70세 노인을 20세 청년이 무차별 폭행하는 장면이다. 서로 길을 가다가 어깨가 조금 부딪쳤는데, 청년이 기분 나쁘다고 술김에 3분 이상이나 방어능력이 없는 어르신을 폭행한 것이다. 그 청년은 정말 비겁하다. 자신보다 확실하게 약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약자 앞에서 갑질하고, 조금 강한 사람 앞에서는 비굴해지는 사회는 저주 받은 사회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병든 영혼에서 비롯된다. 육신은 마음의 지배를 받고 마음은 영의 지배를 받는다. 성령을 거부하고 악령에 사로잡혀 살고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는 패륜으로 치닫는다. 창궐하는 동성애의 패륜도, 별 거리낌도 없이 벌어지는 불륜도, 싸이코패쓰적인 묻지마 살인도, 부자관계를 망각한 경영권다툼도, 악랄하게 조교를 괴롭히는 어느 교수의 행패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빚어지고 있다. 기독교를 비방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악한 행동들 역시 그 근원이 악한 마귀의 영에 있다.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으로 다시 회복되어야, 이 사회가 다시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으리라.
자유라는 개념과 의무라는 개념은 서로 상반된 개념처럼 보인다. 실제로 현대사회와 국가들이 이 두 개념을 보완하지 못해서 사회갈등을 조정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자유와 의무는 우리가 믿는 성경의 진리이다. 특히 우리 침례교 선조들에게 있어서 자유와 의무는 그 누구보다 투철했고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침례교도들은 어떤 정부나 체제 아래서도 신앙의 자유와 의무를 굽히지 않고 주장해 왔으며 실천해 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자유와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민으로 지켜야할 의무가 성경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미가선지자는 신앙의 자유와 시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본문은 진정한 신앙의 자유와 시민으로서 의무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그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세상과 국가, 정부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교회는 자유를 가질 권리가 있다. 그 바탕은 교회의 지체가 되기 위해서는 각 개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사실 고통마저도 성서의 가르침은 개인이 겪는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에의 동참으로 보고 있으며(골1:24), 죽음은 영생의 과정의 필연적인 부분이라 여긴다(고전15:51~54). 그렇기에 신자들에게 있어서 삶에서의 고통과 죽음은 단순한 육체의 아픔과 소멸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의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에서 정점을 이루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발자취를 닮아가는 과정이며 성숙함과 성화(聖化)에 이르는 단계를 밟아가는 일이라 하겠다.나아가서 완화돌봄의 과정에서 수반되는 하나님과 사람에의 ‘의존’(dependence) 역시 부끄럽고 피해야 할 과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삶의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과정이며 완화돌봄과정에서 생기는 고통과 의존함과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님을 포함한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게 만든다. 따라서 목회자는 효과적인 완화돌봄을 통하여 영적으로는 숙명적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가운데 섭리적이며, 자신과 하나님 모두와 평화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의 재해석을 통하여 의미를 발견하고 긍정적으로 반추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3) 목회상담 패러다임의 전환으로써의 완화돌봄전통적으로 목회자의 돌봄은 ‘요람에서
창설목적 이슬람국가 라고 불리는 “아이에스”(IS), 또는 “이시스”(ISIS)는 일찍이 1999년에 “유일신과의 성전”(JTJ)이라는 기치 아래 ‘알카에다’에 충성을 맹세하고 그 하위 조직으로 창설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 이렇다 할 활동이 없다가 2014년 1월, 이라크 서부와 시리아 일부 지역을 점거하고 이슬람국가(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Syria])라는 국호로 독립을 선포하면서 ‘지하드’(투쟁, 또는 聖戰을 뜻함) 조직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영토는 한반도 보다 큰 32,132km², 인구는 800만 명가량, 언어는 아랍어, 통화는 니나르(IQD)와 파운드(SYD)를 사용한다. 투쟁 방법은 타 종교에 대한 적대정책, 세계 문화유산 파과와 밀매, 무분별한 세력 확장 등이며, 이를 위해 납치, 화형, 참수, 강간, 집단 테러 등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영국인 데이비드 헤인즈를 참수하고 일본인 고노 겐지와 언론인, 의료인, 민간인 등을 무차별 공개 처형하는 것 등을 볼 때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배타적인 무장단체가 틀림없다. 유관 테러 조직들 1) 알카에다(al-Qaeda)는 1988년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세 번째 현현은 제자들이 현현하신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많은 고기를 잡은 후에 예수께서 마련한 아침 식사 자리에 제자들이 참여하게 된 것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진행한다. 제자들은 실패와 낙심하는 상황에서 예수께서 준비한 생선과 떡을 먹으면서 주 예수와 교제를 나눈다. 주 예수는 제자들이 실패하고 낙심하는 현장에 다시 찾아오시어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신다.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함께 계시는 주님을 통해 새 힘을 얻고 그들의 사명을 위해 다시 도전하는 용기와 능력을 얻게 하신다. 요한은 이것을 통해 제자들이 부활의 예수를 생생하게 만나는 자리는 바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도전하며 고난을 당하는 현장이라는 것을 부각시킨다.저자는 베드로가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예수에게 가는 동안에 다른 제자들의 행동을 설명한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21:8). “작은 배”는 ‘배’와 동의어적으로 사용된다(6:24; 눅 5:2). 그러나 요한의 상징성에 주목하는 학자들은 배는 사도적 공동체들을 포함하여 보다 더 큰 의미의 교회를 가리키고 작은
공공시설에는 대게 이용 요금표가 붙어 있다. 이용자들에게 요금을 받아서 그것으로 시설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그런 일을 위해 재산을 쾌척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무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도 있다. 미국 개척 시절에 어떤 사람이 저 유명한 촌시 데퓨(Chauncey Depew) 철도회사에 무료 정기승차권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는 얼마 후에 회사로부터 아래와 같은 답장을 받았다: 월요일: “너는 우리 가운데로 지나가지 못하리라” 민수기20:18화요일: “한 사람도 건너가지 못하게 하였고” 사사기3:28수요일: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 하리로다” 나훔1:15목요일: “이 세대가 지나가지 [않으리라]. 마가복음 13:30금요일: “그것으로 영원이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리라]” 예레미야5:22토요일: “그리로 지나갈 자가 영영이 없겠고” 이사야34:10일요일: “배 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1:3(Ludlow 메모 참조)내용인즉 삯을 내고 표를 끊기 전에는 기차를 탈 수 없다는 말이다. 상냥한 거절은 절반의 승낙과 같다”는 말처럼, 촌시 데퓨 회사의 “무임승차 불허” 답신에는 딱딱한 거절 대신 유머와 풍자가 넘친다. 회사
사실 말기 암환자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고통이다. 말기 암환자의 약 90%가 고통을 호소하며 이 가운데서 절반정도 환자가 겪는 고통의 정도는 치통 또는 그 이상 정도의 고통이며, 약 25-30% 환자는 거의 산모의 산통에 버금할 정도 또는 그 이상의 고통을 경험한다. 심한 통증은 환자의 본래 인격을 파괴하기까지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즉, ‘의학적인 치료에 환자의 병세가 더 이상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점차 악화되어 가까운 시일 내에 임종을 맞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태의 환자에게 통증관리를 포함한 신체적, 실존적, 심리정서적, 그리고 영적 영역에 대한 조력과 완화를 목적으로 제공되는 돌봄’이 완화돌봄이다.완화돌봄의 주된 대상은 대체로 다음의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임종 전 수개월 또는 수주 전까지 비교적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는 환자이다. 둘째는 급작스러운 사망에 이를지 모를 점진적으로 악화되는 만성적인 장기부전 환자의이다. 셋째는 대부분의 병약한 노인들에 해당되는 꾸준히 진행되는 오랜 시간에 걸친 기능약화 환자이다. 일반적인 완화돌봄의 개입 단계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즉, 가정에서 간병인의 도옴을 받는 외래돌봄부터 시작하여 요양병원으로
저마다 오늘도 인생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안 그래도 피곤한 그들의 삶일 텐데 오죽했으면 이 새벽에도, 이 밤에도 기도한 번 해보겠다고 나왔을까? 그들의 눈망울에서조차 그들의 무게가 읽힌다.멀쩡하게들 차려입고 폼 나게 앉아는 있지만, 그게 그렇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아마 내가 저들의 목회자이기에 더 그랬을 수도 있겠다. 다행히 기도로 그 삶의 무게를 해결하려는 모습들이 있어 고맙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나오기까지의 저들의 삶, 기도 후에도 여전히 이어지는 저들의 삶의 무게는 부인 못할 현실이다.생각해보니 정말 우리 인생들은 이런저런 져야 할 짐들이 많다. 어떤 이는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것부터가 짐이다. 게다가 학업의 짐, 취업의 짐, 결혼의 짐, 아내로서의 짐, 남편으로서의 짐, 부모로서의 짐, 자녀로서의 짐, 관계의 짐, 직장이라는 짐, 사역이란 짐까지…. 게다가 나의 육체, 성격, 능력에서 원래부터 부족하게 갖고 태어난 태생적 한계로 인한 짐. 게다가 내가 굳이 지지 않아도 되는 짐,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인한 짐들까지 그냥 지워지기도 한다.그렇다면 우린 이 짐들을 어찌해야 할까? 버려야 할까? 떠안아야 할까? 이를
교회 사역자를 표현하는 명칭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 중 하나가 “일꾼”(고전 4:1)일 것이다. 일꾼은 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사실 “꾼” 자가 붙은 말은 해당 분야에 숙달된 사람, 그것 밖에 모르는 사람, 그 일에 몰입한 사람 등 전문적인 기능을 갖춘 사람을 지칭한다. 그런데 부정적인 말이 많은 것 같다. 사기꾼, 노름꾼, 말썽꾼, 장난꾼. 긍정적인 것은 소리꾼, 일꾼 그리고 뭐가 있을까? 일꾼이란 일에 전문적인 식견과 숙달된 기능 그리고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태도로 무장된 사람을 말한다. 목회자는 어떤 일꾼이 되어야 할까? 1.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목회자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과 교회를 맡은 하나님의 일꾼이며, 복음의 일꾼이고 교회의 일꾼이다.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부름 받고 세움 입은 사도적 사명자로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담당한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그리스도 때문에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처럼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해야 한다.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는 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모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