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같은 말이로되 경우와 대상에 따라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같은 말을 하고서도 박수를 받을 때가 있고 비난 받을 때가 있는 것은 시의에 적합한 말을 하거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말이란 공연히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화자(話者)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므로 청자(聽者)는 말을 들고 화자의 관심사와 생각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더욱 바르고 신중하게 말해야 한다. 부주의한 말한가한 오후 시간에 몇 목사들이 한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며 두어 시간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대화의 내용이 시종일관 음식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목사라고 해서 음식 이야기를 하지 말란 법이 없고 또 항상 먹는 이야기만 하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다사다난한 시대 젊은 목사들의 대화가 음식에서 시작해서 음식에서 털고 일어나서야 되겠는가(목회서신 48회 참조).국내외를 막론하고 관광지 목회자는 친구나 지인(知人)의 방문 통보를 받으면 흔히 숙소를 마련(예약)하고, 공항에 가서 영접하고, 다음 날은 관광안내까지 한다. 한 목사가 방문자들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폭포에 안내했는데, 폭포를 본 방문자들이, “이게 다야? 이
예수가 천상의 성소에 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임을 함의한 표현이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기 원하는 자는 반드시 거룩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 물론 본 구절에서 말하는 ‘거룩’은 윤리적인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거룩함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로 제시한 것은 거룩함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요건임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가 본 구절에서 ‘하나님을 보다’를 언급한 것은 구원론을 그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자가 주를 본다’에는 종말론적 의미도 함의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종말이 오면 구원 받은 거룩한 자들은 누구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문헌(구약)과 신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보다’는 통일성과 이견을 함께 보여준다. 유대문헌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존재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볼 수 있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존재임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을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려는 특성이 있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님의 감동하심 가운데 메시아의 사역을 예언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이사야 40장 11절이다.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목양의 기본이 양 떼를 돌보는 것인데 그 세 가지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영육 간에 양식을 배불리 먹이고, 연약한 양들을 품에 안아 위로하고 안정시키고, 기운 내서 일어나 걷도록 해주는 것이 목회이다. 목회는 양들에게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목사는 여러 가지 목회활동을 구사한다. 즉 목회활동이라 함은 예배 인도, 설교, 심방, 상담, 기도회, 찬양인도, 성경공부 등등의 목회활동들을 통해 양 떼를 변화시키는 목회가 성취되는 것이다. 목회에서 양들에게 일으켜야 할 변화의 내용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변화의 목표가 있다. 오늘은 그 중 첫 번 째 것을 알아보기로 한다. 그것은 불신자에게 복음을 증거해 신자가 되게 하는 복음전도 사역이다. 복음전도 사역은 불신자를 신자 되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해 구원의 신앙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단번
단독 목회를 갓 시작하는 젊은 목회자가 작은 교회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순리일 것이다. 그런데, 큰 교회 목회를 꿈꾸다가 작은 교회를 담임하게 되는 이들 가운데는 좌절하고 무력감에 빠지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목회자는 먼저 스스로 준비된 일꾼이 된 후에 부르심을 기다려야 한다.필자는 기관사역을 하면서 구직자는 많으나 준비된 일꾼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많이 경험했다. 취업이 어려웠던 시절, 교단 안팎에서 자녀나 신자를 우리 부서에 추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원장 선교사의 지시로 막상 구직자를 만나(면접)보면 타자치는 법도, 회계(會計)도 배우지 못했고, 교정 경험도 없어서 사무실이나 출판 관련 부서 등 어느 곳에서도 쓸 수 없는 사람일 경우가 많았다. 대학에서 구직이나 추천을 요청하는 학생들에게 필자는 언제나 1) 출석교회와 봉사분야(믿음), 2) 전공에 대한 전문지식과 자격증(성취), 3) 영어와 워드 프로세서 사용 수준(능력), 이 세 가지 질문을 한다. 준비된 일꾼이라야 채용하거나 추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한국과 같은 교육환경에서 교수가 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대학 몇 학과에서 본 교단에 인재가 없어 다른 교단에서 교수를
둘째, 랍비문헌에도 ‘하나님을 보다’라는 내용이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특히 랍비문헌들에 묘사된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활발한 논쟁이 있었다. 랍비 아키바(Akiva)는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을 의인화(擬人化) 관점에서 해석한다. 반면에 랍비 이스마엘(Ismael)은 하나님의 현현을 우화적 측면에서 해석한다. 하나님의 현현을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육체로 임함을 의미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화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을 말한 것인지에 대한 차이를 말한다. 이 논쟁은 랍비문헌이 인간의 육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해석으로 확대됐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 분명하다(창 1:26).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음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모습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랍비문헌의 하나님의 현현은 하나님이 실제로 인간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남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의 실제는 종말에야 일어날 사건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실제적인 일은 인간이 의인으로 부활할 종말에나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종종 거론된다. 야곱의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은 20에 팔리고, 죄 없이 옥에 갇히고, 애굽의 총리라는 영광의 자리에 앉는 등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행적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요셉의 생애와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훌륭한 롤 모델을 제시해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꿈을 꾸는 자요셉의 가장 첫 번째 특징은 그가 꿈꾸는 자였다는 것이다. 그의 별명은 꿈꾸는 자였다. 우리도 꿈을 꿔야 한다. 꿈은 미래에 하나님께서 이뤄주시리라고 믿고 기대하는 비전이다. 목사에게는 교회의 꿈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통해 어떤 사람을 일으켜 세울 것인지, 어떤 교회를 세울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청사진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외형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요셉 생애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 사람들에게 보였다. 그리고 요셉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며 인식하고 살았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이 바로 ‘코람데오’이다. 늘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아비멜렉이 자신의 형제 70명의 왕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독재군주의 자리에 오른 이후, 약 3년간은 정치적으로 안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3년 이후부터 하나님의 징계가 시작됐다. 쿠데타는 쿠데타를 낳는 법. 아비멜렉과 손을 잡고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던 세겜 사람들이 오히려 아비멜렉을 반역하기 시작했다. 특히 세겜 사람들의 지도자였던 에벳의 아들 “가알”은 스스로 사람들을 모으고 새로운 반역 세력들을 집결시켰다. 그는 사람들을 끌어 모아 연일 잔치를 베풀고 그들에게 술과 음식을 먹이며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다져나갔다. 우리나라의 특정지역사람들이 라이벌 지역 사람들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서로 매도하고 욕하듯이, 가알도 자신들은 세겜 사람들인데, 왜 바보들처럼 세겜 사람도 아닌 므낫세 사람 아비멜렉을 왕으로 모시고 있냐고 말하면서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쿠데타를 통해서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선동질에 절대로 속지 말아야 한다. 돈 몇 푼에, 알량한 자리 약속에 쿠데타의 사냥개가 되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다. 넓게는 국가적으로, 좁게는 직장과 사업터에서, 혹은 교회 안에서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최고의 권력을 쥐겠노라고 선동질하는 사람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마태복음 5장 8절의 “하나님을 볼 것이요”는 시대별로 다양한 해석 변천 과정을 거쳐 왔다. 3세기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보다’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영적인 해석은 우화적 해석이 팽배한 시대의 산물이다. 헬라 철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대에는 ‘하나님을 보다’를 성화 관점에서 해석했다. “하나님을 보다”를 종말론, 영적 그리고 성화의 관점에서 해석한다고 해도 그 의미는 모든 시대를 망라해 하나님의 가시적이고 종말적 현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경향들은 여전히 마태복음 5장 8절의 “하나님을 볼 것이요”를 해석하는 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III. 유대교와 신약 성경의‘하나님을 보다’앞 단락에서 살펴본 마태복음 5장 8절 “하나님을 볼 것이요”의 해석 결과는 하나님은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을 비롯한 유대교와 신약성경은 ‘하나님을 보다’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유대교 관점이란 구약성경과 1세기 유대교 사상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란 마태복음을 제외한 다른 성경에서 ‘하나님을 보다’가 어떻게
야곱은 무한경쟁시대 속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고 무조건 이기기 위해 돌진하고 있는 현대인의 표상입니다. 현대의 많은 목회자들이 어떤 면에서 “동역자”가 더 무서운 목회 환경 속에서 자신의 소명과 사명 그리고 현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현대판 야곱과도 같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크게 얍복 나루터를 건너기 전의 전반부와 건넌 후의 후반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생애에 나타나는 목회적 교훈을 살펴봅시다. 1. 야곱은 아주 치열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난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탈취했고,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는 경쟁하고 다투며 자신의 성공과 목표 달성을 향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며 달렸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피신한 후에도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무서우리만큼 참으면서 견뎠습니다. 그렇기에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항상 긴장하며 평안이나 기쁨, 보람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도망치는 도중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 벧엘의 제단을 쌓으며 자신의 생애를 의탁하기도 했지만 그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정당화 될
어느새 한 장밖에 남지 않은 달력이 눈에 들어온다. 무려 11장의 달력을 벌써 내 손으로 다 떼어내니, 올해 내 남은 날이 한눈에 들어온다. 끝이 훤히 보인다. 난 지금 그 마지막 달력의 한가운데에 서있다. 물론 달력이야 새로 걸면 된다. 하지만 정말 이 12월이 내 인생에 남은 날들이라면 어떨까? 지금 난 뭘 해야 할까? 왠지 올 12월 달력은 그 물음을 강하게 던진다. 벌써 재작년 12월, 故강영우 박사가 췌장암에 걸려 그를 사랑했던 이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e-메일을 보낸 것이 세상에 공개돼 화제가 됐었다. “의료진이 최선을 다했지만 지금 내게는 한 달 여의 삶만이 허락됐다”고 그는 당당히 알렸다. 그래서 “더 이상의 치료는 중단한다. 차라리 퇴원하여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겠다”고 밝혔다.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시각장애인으로 살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박사가 된 자랑스런 인물이다. 조지부시 대통령시절엔 백악관국가장애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 두 아들 역시, 장남은 워싱턴포스트가 선정한 ‘2011년, 최고의 슈퍼닥터’, 차남은 오바마 대통령의 선임 법률고문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장애를 극복한 성공모델이며, 훌륭한 가장이며, 자
I. 들어가는 말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경 본문 가운데 하나다. 그중에서도 팔복은 성도들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데, 여섯 번째 복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makavrioi oi` kaqaroi; th’/ kardiva/, o{ti aujtoi; to;n qeo;n o[yontai)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얻을 축복을 말한다. 즉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보는”(visio Dei) 축복을 얻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보다’를 매우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을 본 자도 없으며 하나님을 본 자는 살 수가 없다고 말한다(출 3:6; 19:21; 요 1:18). 둘째, 하나님을 보는 것은 축복이며,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볼 수도 있겠지만 죽음 이후에나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고도 말한다(욥 19:26; 시 11:7, 17:15). 이러한 상반된 견해는 마태복음 5장 8절의 “하나님을 볼 것이요”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게 됐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볼 것이요”는 종말론 관점에서 해석됐다. 헤거너(D. Hagner) 역시 “하나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을 족장이라 부르면서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다. 그들의 생애는 믿음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특히 목회자의 삶과 사역의 단면을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이삭에 대해 살펴보자. 사실 이삭에 대해서는 그다지 강조되고 있지 않다. 그만큼 어떤 면에서 평탄하고 굴곡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 큰 문제없이 자라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에게도 의미 있는 사건들이 점철되고 있다. 우선 이삭은 약속으로 주어진 자녀였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후사가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아들에 대한 염원이 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들을 약속하셨다(창18:10).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기가 막혀 웃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약속을 지키셨다. 잠시 인간적인 의욕이 앞서서 이스마엘을 후사로 여기고자 하는 실수도 있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로 이삭을 주셨다(갈4장). 모든 목회자는 하나님의 약속된 자녀이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섭리 가운데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우시는 사람이
필자는 엠마오 현현 사건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누가는 이 사건을 통해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들의 어두웠던 영적인 눈을 여시고 그들로 하여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세 가지로 제시했다. 부활의 예수께서 두 제자의 영적인 눈을 여기기 위해 하신 두 번째 일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관하여 구약에 “기록된 말씀들”을 그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일이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들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7).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구약에 기록된 말씀들에 기초해 일어났다는 것과 그래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마음에 믿는 믿음도 그 말씀들에 기초해야 한다는 누가의 입장이 부활현현 이야기들에서 모세와 예언의 말씀들과 성경에 대한 반복적인 언급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눅24:25, 27, 32, 44, 45, 47). 엠마오 이야기에서 선지자들에 대한 언급(눅24:25)과 모세와 선지자들에 대한 추가적인 언급(눅 24:27)은 제자들이 메시아가 반드시 고난을 통과하여 그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필연성을 성경으로부터 인식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기드온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것은 아주 잘 한 일이지만, 지나치게 많은 아내를 둔 것은 잘 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외면적으로는 왕의 권력을 다 포기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삼천궁녀 의자왕과 유사한 인간적인 부귀영화를 다 누렸다고 볼 수 있다. 기드온은 아들만 무려 70명을 낳았으니, 딸까지 합치면 모든 자녀의 수가 약 200여명에 육박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손자 손녀들까지 계산에 넣으면, 그의 후손들이 상당히 많았으리라.왕조국가에서는 왕손이 많아야 보위가 든든하다고 하지만, 지난 역사들을 살펴보면, 지나치게 많은 아들들은 오히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비극의 역사를 야기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기드온의 아들들도 무려 70명에 이르렀으므로 그들 중 한 명 정도는 덜떨어진 아들이 나올 법도 했다. 성경에서는 그 덜떨어진 기드온의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고 밝히고 있다. 원래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 하는 것이지만, 이 이름은 애굽의 ‘바로’와 같이 왕의 명칭을 의미하는 이름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아브라함과 이삭이 활동하던 창세기 시대에 이미 많이 사용되던 명칭이다. 그리고 차후에 블
해석공동체로서 신앙공동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세 번째 기본 전제는 공동체 구성원의 해석 틀은 ‘중요한 타자들’(significant others)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구성원들의 변화를 위한 인식 재구성(reframing) 과정은 신앙공동체라고 하는 사회적 조건 안에서 사회화를 주관하는 사람들과의 강한 정서적 동일화과정을 상당한 정도로 반복함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신앙공동체 내의 중요한 타자들이 새로운 틀을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사실 신앙적 회심은 신앙공동체의 역할을 앞선 경험이지만 이러한 신앙적 회심의 경험을 계속하여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전의 삶의 상황을 대신하는 근거 구조를 제공하는 신앙공동체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근거 구조를 제공하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중요한 타자들과의 상호작용과 대화에 의해 개인의 주관적인 현실이 바뀌게 된다. 이 과정에는 과거의 모든 중요했던 사건들과 인물들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과정이 동반되며, 과거보다 더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새로운 현실은 기억하고 있는 사건의 재해석을 통하여 현재 자신의 삶의 구조 안으로 수용되게 된다. 2. 해석공동체를 통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