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기독교 한국침례교회 현황기독교 한국 침례교회의 교회수는 1997년에 2,118교회 교인수 600,000명, 2001년에 2,465교회(2002년도 동일한 2,465교회)에 교인수 774,259명, 2003년에 2,508교회 774,259명이다(교인수가 2001년과 동일한 숫자 임). 목회자 수는 목사 3,536명, 선교사 481명으로 총 4,017명이다. 최근의 통계는 2006년에 교회수 2,580개, 교인수 798,437이고, 2008년에 교회수 2,687개, 교인수 801,437명이다. 기독교 한국침례교회는 2001년 2,465교회에서 2009년 2,761교회로 296교회가 증가했고, 2001년, 2002년, 2003년 교인수 774,259명에서 2009년 801,437명이 되어 9년 사이에 27,178명이 증가하고 있다. 기독교한국침례교회는 2003년 이후에 성장이 심각하게 둔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기독교 한국침례교회 경쟁력 한국갤럽 리서치가 조사하여 인용한 「한국교회 미래리포트」는 1997년에서 2003년까지 조사한 21개 교단의 교회수, 교인수와 목회자 수를 볼 수 있다. 한국갤럽 리서치는 한국교회 11개교단의 경쟁력을 자세히 분석하고
우유부단(優柔不斷)이란 말이 있다. 부드럽고 연약해서 결정하지 못하고 끊지 못해서 어물어물 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를 이야기한다. 야고보서에도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1:8)가 나온다. 두 마음이란 단어는 두개의 혼을 가졌다는 뜻으로 생각이 많아서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리더라고 한다면, 결정하는 자리에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리더는 모든 사람을 힘들게 한다. 영성 리더에게 중요한 두 가지, 결정과 책임을 생각해 보자. 1. 결정(Decision)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결정을 한다. 리더는 다른 사람들보다 약 3배 이상의 결정을 한다고 한다. 리더의 결정이 중요한 것은 리더 한 사람의 결정이 그 공동체에 주는 영향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리더의 결정이 중요한 만큼 좋은 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 결정에 따르는 영향력을 고려하는 사람이라면 쉽사리 모든 일을 결정하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온전히 따라갈 것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하나님께서는
필자는 지금까지 바울서신들과 사도행전을 토대로 기독교인 박해의 선봉에 서있었던 바리새파 유대인 사울을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전파자인 사도 바울이 되게 만들었던 부활현현의 체험과 그것에 기초한 부활신앙의 관계를 살펴봤다. 이번부터는 사복음서들을 토대로 사도들이 체험했던 부활현현의 체험과 부활신학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복음서 기록의 측면에서는 마가복음이 맨 먼저 기록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부활현현 사건을 전달함에 있어서 마가는 다른 복음서들에서 전달되는 사건을 요약하여 제시하는 국면을 보여주기 때문에(막 16:9~20), 정경의 순서대로 우선 마태복음서부터 살펴보려고 한다. 사복음서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언이 두 가지로 곧 빈 무덤 사건과 현현 사건으로 전달된다. 빈 무덤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간접 증언의 성격을 가진 반면, 부활현현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직접 증언의 성격을 갖는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하여 빈 무덤 사건에 담긴 신학적 의미는 예수의 시신을 두었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신체적 국면의 요소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소식을 전달하는 천사(혹은 청년)의 전갈
몇 년 전 우리 교회 성도들이 단체로 영화관에 몰려가 너무나 재밌게 보았던 ‘에반 올마이티’(Evan Almighty/2007년作). 그래서인지 6년이 지난 지금도 그 영화의 명대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하나님께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면 용기를 주실까?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까? 사랑을 달라고 기도하면 사랑을 주실까?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까? 세상을 바꾸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세상을 바꾸게 해주실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실까?”영화 속 그 대사는 실로 충격이었다. 그것은 내게 더 좋은 기도, 더 좋은 응답에 대한 새로운 지평도 열어줬다. 역시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기도보다 멋졌다.그렇다면 난 이제 어떤 기도를 드려야할까? 무엇이 내겐 더 좋은 기도일까? 어떤 기도가 하나님의 더 좋은 응답을 부를까? 그래서 정리해봤다. 난 이제 더 높아지기보다 더 낮아지기를 기도해야겠다. 하나님의 은혜는 늘 아래로만 흐르니까. 내 생각이 더 복잡해지기보다 더 단순해지기를 기도해야겠다. 그래야 내 믿음이 더 깊어질 테니까. 난 더 부유해지기보다 더 가난해지도록 기도해야겠다. 그래야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감사하게 될 테니까. 나의 자랑거리를 찾기
II. 200만 성도와 5천 교회 운동에서 전도에 대한 이해2) 개인전도자의 자격들개인전도자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전도자는 영생을 소유한 투철한 그리스도인이 돼야 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듯이 불신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믿음의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눅 22:32).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아래 있게 할 수 있기 이전에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했다. 개인전도자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성령은 구원 받은 사람과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을 영과 혼과 육체로 만드셨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요약 할 수 있다. 구원 받은 사람의 마음은 성령의 전이된다. 우리의 영은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성령님께서 전도자의 마음을 다스리셔야 한다. 그는 성령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그의 존재를 확신해야 한다. 성령께서 지도해주시고 지시하심을 신뢰해야 한다. 전도자 빌립은 이 문제의 좋은 실례를 보여준다(행 8:29). 빌립은 성령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따랐다. 성령께서 그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바를 아무 것도 묻
리더십은 영향력이다. 그럼 그 영향력은 어디서 올까? “하나님이 교만한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약4:6).” 리더의 교만은 리더십의 허영심으로 나타난다. 영성리더십의 영향력에 관하여 기억하고 조심해야할 두 가지가 있다. 지위와 파워의 대명사가 아닌, 진정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영성 리더십의 영향력이라면 말이다. 마가복음 6장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침례요한과 분봉왕 헤롯의 이야기를 통해 마음에 다시 되새겨 보자. 1. 지위(Position)의 허영심“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막 6:20) 헤롯은 엄청난 파워를 가진 왕이었지만 침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는, 보잘 것 없고 아무 지위도 없는 죄수였다. 하지만 이 침례요한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가를 생각해 본다. 이것은 지위나 타이틀이 있다고 그것이 저절로 그 사람의 영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리더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위치나 타이틀이 리더십이라고 생각하기에 더 훌륭한 리더가 되기 위해 더 높은 직급과 더 큰 타이틀을 추구한다. 하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진정한 영향력은 신뢰에서 온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삶
사도바울은 주님께서 귀히 사용하시는 최고의 복음의 사도에 걸맞은 수많은 고난과 싸워야 했다.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 유대인들의 위협과 참소로 인하여 늘 생명의 위협과 살해의 위협 속에 살았다. 여러 차례 감옥에 투옥되는 고난도 겪어야만 했다. 그는 이 모든 고난을 기꺼이 감당했다. 하지만 그 많은 고난들 중에서도 그의 몸에 박혀있던 ‘육체의 가시’는 정말 참기가 힘든 것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바울이 곱추였다는 설, 선천성 말더듬이였다는 설, 심한 안질이 있었다는 설, 간질이 있었다는 설 등이 있다. 의사 누가가 사도바울을 계속해서 동행했다는 점과, “사탄의 사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의 육체의 가시는 간질이었다는 주장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는 세 번이나 이 가시를 제거하기 위하여 주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는 응답을 주시고는 사도바울의 기도를 거절하셨다. 인간적으로 섭섭함을 가질 수 있는 거절이었다. 육체의 가시 없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상황을 상상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거절이었다. 웬만한 사
II. 200만 성도와 5천 교회 운동에서 전도에 대한 이해목회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성도를 봉사하게 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주력하게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전도하기를 명령하셨다(마 28:18~20). 교회는 영혼 구원에 최우선을 두고 전도해야 한다. 교회의 목적은 5가지가 있는데 예배, 전도, 교육, 봉사와 친교이다. 예배를 통해 풍성한 삶을 경험하고, 전도를 통해 주님의 사역을 확장하고 장려하며, 교육을 통해 신앙의 깊이를 더해가고,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실행하는 방법들은 계절의 옷처럼 변할 수 있으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원리는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목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성도들이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강한 도전을 주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1. 전도의 원동력 성령성경은 하나님의 구속 경륜의 실제성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롬 8:29~30).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의 아들을 보내주셨고, 죄에서 멸망하지 않도록 십자가를 통해 그의 사랑을 확
목회자의 기도를 받는다는 것. 어찌 보면 성도가 목회자를 너무 지나치게 의존하는 건 아닐까? 성도라면 누구든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기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데, 굳이 목회자를 찾아가서 기도 받을 필요가 있을까? 혹 그 물음을 내게 묻는다면, 난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다른 건 잘 모르겠다만 순전히 내 목회경험으로만 보면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벌써 십수년 전 해군의 군목으로 사역할 때다. 그 분은 대위였는데 사람이 그렇게 신실할 수가 없었다. 함정생활로 무척 피곤할 텐데도 정박하면 어김없이 새벽제단을 지켰다. 뿐만 아니라 제일 늦게까지 두 손 들고 기도하였다. 그런데도 그분은 또 내게 기도받기를 즐거워했다. 장기간 출동을 나갈 때면 꼭 목양실을 들른다. “목사님, 이번 출동도 잘 다녀오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알고 보면 뭐 특별한 기도제목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랬다.더 놀라운 건 기도 받을 때마다 꼭 무릎을 꿇으셨다. 그냥 맨바닥에 본인이 의자를 밀고서 앉으셨다. 그러니 내 기도가 어찌 간절하지 않을 수 있으리. 그분이 바로 지난 번 아덴만여명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해적에 생포된 우리 삼호 주얼리호 인질들을 무사히 구출해 낸 조영주 집
교회성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축복하셔서 놀라운 성장을 주셨고 부흥케 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시며 구원의 기관으로 교회를 세우셨다(마 16:18).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교회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교회의 부흥은 온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다.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축복하셨고 성장한 이후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 교회성장의 추세는 지속됐으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회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는 1990년 중반부터 성장의 침체 현상이 시작되고 2000년부터 정체가 계속되고 있고 2002년 이후로 정체 현상을 통계로 볼 수 있다. 성령의 역사로 부흥하던 한국교회는 최근 20년 가까이 고원현상을 유지하고 있고 잘못하면 장기적인 침체기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에 있다.정부의 통계는 그리스도인의 인구분포가 줄어든 실정이다. 그러나 한국인구의 43%는 아직도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다. 아직도 전도할 대상자들이 많은데 한국교회들이 미국교회가 쇠퇴하던 시기를 닮아 벌써 현상유지에 급급하고 있다.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가 되기 위해 가져야 할 중요한 두 가지 조건이 있다면 무엇일까? 또 우리가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서 보기를 원하는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리더로서의 성숙함을 말하며 이에 꼭 필요한 두 가지를 실력과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력이란, ability라고 하며 노력이란, willingness라고 한다. 즉, 리더가 얼마나 할 수 있느냐는 실력과 얼마나 하고자 하느냐는 노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리더에게서 이 두 가지는 참으로 중요하다. 1. 실력리더의 실력은 때론 전문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리더로써 나아가야 할 방향, 그리고 상황에 따른 결정과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는 능력으로 리더십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을 말한다. 리더의 능력은 리더로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 받으며 사람들에게 따르기를 원하는 또 다른 카리스마가 된다. 그래서 리더의 실력은 따르는 자들에게 신뢰를 준다. 실력 없는 리더를 따를 때, 따르는 자들은 불안하고 비참해 질 수 밖에 없다. 실력이 없는 리더는 언젠가는 그 마지막이 드러나기 마련이며, 실력을 갖춘 리더는 언젠가는 분명히 빛나게 되어있다. 나는 리더로써 내게 맡겨진
찬양은 불러주시고 은혜주신 주님을 향하여 믿음을 고백하며 표현하는 것이다. 믿음을 고백하며 표현하는 방식에는 제한이 없다. 노래, 악기, 춤, 선행, 그림, 조각을 포함한 그 어떠한 방식도,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면 모두 찬양이 될 수 있다. A. Nygren에 의하면 믿음의 핵심은 주님사랑이다. 찬양이 믿음의 고백이자 표현이고, 믿음은 주님사랑이므로 찬양은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표현하는 것이 된다. Wes. Sutton이 작사 작곡한 유명한 찬송가,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뵙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는 주님께 고백하는 찬양자의 뜨거운 마음과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정갈한 이 찬송시가 로맨틱한 선율과 하나로 잘 엮어져서 주님과 영적으로 연애하는 분위기를 더욱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다. 평생에 걸쳐 찬양하며, 세상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주님께 사랑을 고백한 사람은 다윗이다. 그의 노래가 시편의 150개의 찬송시들 중에서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이니, 시편에
사형은 제도적 살인이라고 주장하는 소리는 사형수의 생명권만 생각하고 살해당한 자의 인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또한 정일웅 교수는 오히려 사형제를 존치함으로 생명의 귀중성에 대한 경각심과 교훈을 더하는 상징적인 의미는 분명히 있다고 강조했다.반면 구약학자 김정우 교수는 사형제도 존폐와 관련하여 신중론을 밝혔다. 김정우 교수는 모세의율법에서 의도적인 살인죄는 사형으로서 그 죄 값을 갚아야 하며 이 과정에 있어서 엄밀하고도 공정한 법적인 절차가 요구됐다며 이 모든 사형과 관련한 성경본문들은 사형제를 찬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구약의 법을 세속 문화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또 김정우 교수는 성경은 인간이 만든 제도에 대해 하나의 답만을 주는 책은 아니기에 우리는 성경 안에서 존치론과 폐지론의 근거를 모두 다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교회사학자 이상규 교수는 사형제도에 대한 특별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으나 교부시대로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사형제도를 인정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고신대 신원하 교수는 창세기 6장에 있는 노아의 홍수 본문을 사형제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 보고 이 말씀이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우리는 흔히 많은 재능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켜 ‘달란트가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달란트를 각각 그 재능에 따라 주었다고 말씀하신다 즉 달란트는 재능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달란트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재능에 따라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라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 ‘기회’라는 단어를 리더십에선 ‘변화(Change)와 도전(Challenge)’이라고 한다. 1. 변화(Change)사람들은 변화를 외치지만 변화는 싫어한다. 또 타인의 변화에는 적극적이지만 자신의 변화에는 소극적이다. 왜냐하면 변화의 필요가 있다고는 하지만 막상 그 변화가 우리를 불편하게 할 때 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변화할 때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야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의 딜레마는 ‘그렇게 힘든 변화를 꼭 해야 하는가’에 있다. 하지만 변화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하나님이 주신 기회의 달란트를 놓고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했던 것도 아무리 아름다웠던 것도, 아무리 컸던 것도, 아무리 잘하던 것도 어느덧 화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기독교인 박해의 선봉에 서있었던 바리새파 유대인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극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복음전파자로 변화된 사건을 세 번이나 전달함으로써 사울의 체험과 변화의 중요성을 크게 부각시켰다. 사도행전 9장과 22장에서는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 혹은 “큰 빛”이 비취었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과 함께 아나니아를 통해 부활의 주님을 다시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리는 내적인 변화의 요소가 강조됐다. 사도행전 26장에서는 그의 체험담이 로마 총독 베스도와 유다 왕 아그립바 그리고 여러 고관들이 배석한 법정에서 자기 자신을 변명하는 형태로 제시된다. 여기서도 그의 체험은 앞의 두 번의 묘사와 거의 유사하게 진행되지만, 한 가지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점은 그에게 주시는 소명의 말씀이 아나니아를 통하지 않고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그에게 직접 전달되는 부분이다.바울의 변명은 유다 왕으로서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을 지목하여 그에게 자기 자신의 체험담을 말하는 형태로 제시된다. 바울은 그가 전에는 유대교의 가장 엄격한 분파인 바리새파의 생활을 했다는 것과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간절한 소망 때문에 그가 심문을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