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등학교 3학년 시험에 나온 문제란다. “다음의 설명을 읽고 생각나는 말을 적으시오. 결심한 것을 사흘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해버리는 것을 이르는 말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정답은 ‘작심삼일’이다. 선생님은 친절하게도 학생들을 위해 ‘작○삼○’이라고까지 적어두어 두 글자만 아이들이 채워놓도록 배려하였다. 덕분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정답을 잘 적어 넣었다. 하지만 한 아이만 유독 엉뚱한 답을 적었다. ‘작은삼촌’ … 채점하던 선생님은 결국 뒤집어졌다. 그 아이의 엽기적인 답은 또 이어졌다. 다음 문제는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이르는 말은 무엇입니까?”라는 것이었다. 역시 정답은 ‘고성방가’이다. 선생님은 이번에도 힌트를 주신다. ‘○○○가’.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답을 정확히 맞췄다. 하지만 그 아이는 또 한 번 엉뚱한 답으로 선생님을 웃기고 말았다. ‘아빠인가’.국어사전에 의하면 ‘정의’(正意/definition)란, ‘어떤 낱말의 의미를 규약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말의 정확한 뜻풀이는 더 없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그 말의 정의를 읽고 믿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기준 삼는다. 그런
(2) 구약 성경에서 사형에 대해 제일 먼저 언급된 부분은 하나님과 노아와의 언약 가운데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창세기 9장 6절은 노아가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방주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이 내리신 명령이다. 존치론자들은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살인자에 대한 심판권을 인간에게 맡기시겠다는 의미로 본다. 곧 법적 재판과 형무관 제도를 시사하고 있는 구절로 해석한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타인의 생명을 파멸시키는 자는 하나님께 폭력을 가하는 자이기 때문에 살인자는 반드시 자기가 가한 대로 보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총신대의 김정우 교수는 이에 대한 해석을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가르치기 위해, 살인자에 대해 법적 절차를 통한 사형제를 인준하셨다고 주장한다.(3) 출애굽기 21장 23-4절에 보면 모세의 율법을 근본 원리로 들어 사형제도의 타당성을 주장한다. 즉 구약의 동태보복법(lex talionis)이 현대 사회에서도 적용 가능한 정당한 법이라고 본다. 이런 근거들을 통해 십계명 가운데 2-6계명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해석하며, 그 명령을 어겼을 경우 처벌은 반드시 사형이어야 한다고
비전은 미래를 향해 마음에 그려지는 그림(Mental Image for the Future)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비전을 주실 때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창 15:5)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네 자손을 많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별들을 세어보라 하시며 하나님의 비전을 눈으로 보여(vision) 주신 것이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밤마다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으로 마음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이같이 비전은 열정을 불러일으키며 사람들을 움직이며 변화를 가져온다. 1. 비전(Vision)비전에 대하여 영성리더십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바로 “이 비전이 누구로부터 온 비전인가?”라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인 꿈(야망)’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비전)’을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 비전의 출처가 비전과 야망을 구별한다. 야망은 만드는 것이고 비전은 받는 것이다. 야망은 자기를 위한 것이고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사무엘하6:21-22)”왕의 찬양하는 모습에서 왕의 체통을 깎아먹을 만한 것이 있었다며 자신의 남편을 비난했던 미갈을 향하여, 다윗이 당당하게 반론을 폈던 이 선포적 예언 속에서, 세 번째로, 진정한 찬양과 경배의 핵심은 ‘영적 집중력’에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갈릴리호수의 물위를 걷는 기적을 맛보았던 베드로가 오직 예수님께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면 그가 누렸던 기적의 시간은 더욱 길어졌을 것이다. 물위를 걸었던 그 짧은 시간은 베드로의 마음이 빈틈의 여지없이 온전히 주님께 집중하며 그와 하나가 되었던 순간이다. 완벽한 찬양의 순간도 이와 같다. 찬양받으실 주인공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찬양으로 나아가는 자는 찬양의 시간 동안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하고, 그분만을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한다. ‘두 마음’을 품고 찬양하고자 하는 자는 찬양에 실패할 수밖
사형 존치론과 폐지론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들을 살펴볼 때, 폐지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를 말한다. 첫째, 사형 폐지론자들은 성서의 ‘살인하지 말라’(출 20:13)는 계명에 사형 폐지론의 정당성을 호소한다. 이러한 주장은 생명을 죽이고 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 영역임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사형제도 폐지 논의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에 대한 존엄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둘째, 사형제도는 사랑의 계명에 어긋나기 때문에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 구약 성서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은 ‘사랑’인데, 구약의 보복법을 근거로 사형을 찬성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보다 큰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셋째, 사형제도는 결국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을 부정하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어떤 죄인도 그의 십자가 아래서 속죄를 받을 기회와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형제도는 범죄자의 미래를 시간적으로 박탈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는 주장이다. 서양에서는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Voltaire, 1694~1778), 사형폐지론의 본격적인 시발점인 베카리아
리더는 무엇으로 사람을 움직이는가? 마키아밸리의 군주론을 보면 사자의 용맹함과 여우의 교활함으로 표현해 놓았다. 즉,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두려움을 갖게 만들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사자리더십과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였을 때 그에 합당한 보상을 약속하여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여우리더십인 것이다. 처세술에서는 이것을 “채찍”과 “당근”이라 하여 사람들을 이끌어 감에 있어서 사자 같은 두려움으로 아니면 여우같은 교활함으로, Push and Pull, 즉 밀고 당기는 리더십을 지닌 사람이 능력 있는 리더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영성리더는 질문한다.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들을 움직이셨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리더십을 살펴보면서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이 채찍과 당근을 주로 사용하셨는가?성경 속에 기록된 예수님의 리더십에는 채찍이나 당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의 방문을 거부할 때(눅 9:53) 화가 난 제자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두려움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강요 하지 않으신다. 불을 내리셔서 하나님의 무서움을 보여주었다면 저들은 두려워서 주님을 더 따랐
먼 나라를 여행하는 일이 결코 좋지만은 않은 이유는 좁은 비행기를 장시간 불편하게 타야하고 기후나 음식 등이 잘 맞지 않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차(時差)로 인한 적응의 어려움이 크다. 이번에 다녀온 남아공도 우리나라와는 7시간의 시차(時差)가 있다. 우리나라가 7시간 빠르다. 그러니 우리가 거기 도착한 오전 10시는 우리나라로는 오후 5시였던 것. 그건 그런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내가 강의를 시작한 시간은 그날 오후 4시, 우리나라로 치면 밤11시경이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거의 잠을 못 이루었음을 고려할 때 그 시간은 참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오죽하면 선교사님들에게 이런 농담까지도 했을까? “한국으로 치면 이제 저도 서서히 졸릴 시간이니, 혹 강의하다 헛소릴 하더라도 이해해주십시오.” 하지만 다행히 정신을 바짝 차린 탓에 강의는 은혜롭게 잘 마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남아공에서의 열흘은 오전엔 멀쩡, 오후는 헤롱이었다. 그렇게 그쪽 시간에 어느 정도 맞춰져갈 때 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또 시차 문제가 생겼다. 이젠 한국의 오전이 힘들어졌다. 거기는 밤이었으니까. 저녁만 겨우 말똥말똥하다. 거기는 낮이었으니까. 그래서 지난 주일 오전예배
1. 들어가는 글사형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아주 오래된 형벌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사형이 시작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다만 인간이 역사를 기술하기 이전, 특히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법률을 적용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고 추측할 뿐이다. 국제엠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의 2008년 사형관련 통계에 의하면, 2008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2,890건의 사형집행이 있었고, 이중 72퍼센트가 중국에서 발생했다고 발표했다.한편, 유럽에서 사형 제도를 존치하는 국가는 벨라루스(Belarus) 뿐이다. 국제엠네스티 아이린 칸(Irene Khan) 사무총장은 “사형 제도는 궁극적으로는 잔인하고 비인도적이 거나 굴욕적인 형벌이다. 참수형, 전기의자형, 교수형, 독극물주사, 총살형, 투석형 등은 21세기에 더 이상 존재할 여지가 없다”라고 밝혔다.우리 사회에도 사형제도 폐지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2001년 이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천주교가 주도하기 시작한 사형제도 폐지 운동에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유교 등이 참여하면서 이 운동은 범 종교운동의 하나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사형제도는 종교뿐 아니라 사회, 정치,
1. Calling과 Mission소명과 사명을 혼동할 때가 많다.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God’s calling)이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God’s given mission)이다. 소명의 중요함은 ‘누가 불렀냐’ 이고, 사명의 중요함은 ‘무엇을 맡기셨냐’ 이다. 소명과 사명의 좋은 예로 베드로를 들 수 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 라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이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맡기신 사명이다. 그러므로 소명은 내가 왜 여기 있는가? 라는 질문의 답이 되고, 사명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의 답인 것이다.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Charis)이다. 왜냐하면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이 소명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은사(Charisma)를 주신다. 2. 영성 리더십의 소명소명은 리더를 흔들리지 않게 한다. 리더에게는 리더만이 갖게 되는 어려움과
일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12:1-4은 A씨리즈에서 사순절 두 번째 주일에 사용되었지만 A씨리즈 일반 주일 다섯 번째 주간에 제시되고 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도 C씨리즈의 일반주일 두 번째 주간에 나오는데 12주 후 일반주일 열네 번째 주간에 다시 나온다. 이와같은 지적은 향후 개정 표준성구집의 다각적인 연구와 새로운 구성의 필요성을 요청한다. 4. 교회력과 성구집을 활용한 설교 자료들교회력과 성구집을 활용한 설교를 실행하려면 기본적인 자료가 요청된다. 가장 기본적인 자료는 “성구집”이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개정 표준성구집’은 3년을 주기로 1년 52주에 해당하는 구약의 말씀, 서신서의 말씀, 복음서의 말씀, 그리고 시편의 말씀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이한진은 성구집 자체만으로는 교회력과 성구집을 활용하여 설교하고자 하는 설교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현재 국내에서 출판되고 있는 두 개의 자료를 소개했다. 그중에 첫째는 ‘예배와 설교 핸드북’이다. 이 책은 현재는 한일장신대학교 정장복 총장이 1984년 장신대학교 예배 설교학 교수로 재직 중일 때부터 “표준성구집
필자는 사도 바울이 부활의 예수를 만난 체험을 통해 부활현현의 체험과 부활신앙의 관계를 살펴보고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사울의 체험을 세 번이나 제시했는데, 그 체험담은 부활의 예수라는 초월자의 존재를 보고 듣는 묵시적 체험의 형태로 제시됐다. 사도행전 9장에서 누가는 사울의 체험을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비취고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시청각적 체험으로 제시했다누가는 또 아나니아가 주님의 명령을 받고 사울을 찾아가 주님의 소명을 전달하는 과정에 관한 묘사에서 “다시 보다”라는 동사를 세 번이나 사용하여 사울의 체험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에게 보이신(나타나신) 부활현현 사건인 것을 제시한다. 사울은 이 체험을 통해 바리새파의 전통에 의해 그의 의식세계를 가리고 있었던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며 “다시 보는” 극적인 내적인 변화를 갖게 됐다. 사울은 이제 부활의 예수를 인정하게 되었고(빌 2:9~11), 나아가 그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영접하게 됐으며(롬 10:9), 그리고 그 예수를 중심으로 하나님과 세계와 존재를 다시 보게 됐다(고후 5:17).누가는 사도행전 22장에서 사울의 체험에 대한 두 번째 묘사를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의 체험담을 말하는 간증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사무엘하6:21~22)찬양자를 비난하는 미갈을 향해 다윗이 당당하게 반론을 폈던 이 선포적 예언 속에서, 두 번째로, 진정한 찬양과 경배의 핵심은 기억과 감사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찬양은 찬양의 대상을 높이며 자랑하며 인정하는 것이다. 경배는 높이며 자랑하며 인정하는 대상에게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다. 찬양의 본질인 높이며 자랑하며 인정하는 것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칭송’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칭송은 공개적인 것이 원칙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까지 감안한다면 비공개적인 것도 가능하다.무엇을 칭송하는가? 간단하게 말한다면 찬양받으실 분의 역사와 능력과 속성이다. 찬양받으실 분의 역사와 능력과 속성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들음과 체험이다. 들음은 로마서10:17에 기록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신 것과 같이 주님에 관한 기록인
2. 성구집을 활용한 설교매주 교회력을 중심한 예배에서 성구들이 봉독될 때, 설교자는 그 가운데 하나의 성구를 택하여 설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설교 계획은 다양한 면에서 권장된다. 성구집을 활용한 설교의 유익한 점으로는 다음의 내용들을 포함한다.첫째, 성구집은 짜임새 있는 설교 계획을 가능하게 한다. 효율적인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 목사라면, 좋은 설교는 급조되지 않으며 적절한 시간 속에서 성숙됨을 알 것이다.성구집을 활용할 때 설교자는 이미 준비되어 있는 성구들에 대하여 미리미리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확보한다. 충분한 시간을 통하여 준비되는 설교는 설교자의 깊은 묵상과 폭넓은 자료 수집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보다 질 높은 설교를 창출해 내게 한다.하나의 설교는 설교자의 가슴에서 되새겨지고 먼저 감동됨으로서 완숙한 내용으로 준비된다. 토요일 아침에 설교 본문을 찾아 서둘러 준비된 설교는 이미 계획된 본문을 가지고 설교자의 가슴과 생각 안에서 숙성되어 나온 설교와 질적으로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나아가 성구집을 사용하면, 설교자는 본문을 찾기 위한 시간 낭비를 없애고 효율적인 설교 준비에 집중할 수 있다.둘째, 설교자로 하여금 본문 중심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사무엘하6:21~22).법궤가 다윗성에 무사히 이송됨으로 인하여 기쁨의 찬양으로 충만했던 다윗이었다. 하지만 찬양의 열정으로 뜨거웠던 그를 향해 부정적인 말과 어투로 힐난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아내 미갈은 영적으로는 여전히 어린 아이와 같은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에 다윗의 마음을 충만하게 채우고 있었던 하나님의 영은 다윗으로 하여금 미갈을 향해 강력한 교훈의 입을 열게 하셨다. 다윗이 미갈을 향하여 선포했던 이 말씀은 촌철살인의 예언적 설교로 손색이 없다. 이 말씀은 미갈 뿐만 아니라 찬양에 무지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교훈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첫 번째로, 진정한 찬양과 경배는 영적인 시야가 열린 자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눈은 믿을 게 못된다. 프리즘이라는 장치가 없으면 빛 속에 담겨 있는 여러 가지
성구집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그 역사를 같이 한다. 성구집의 낭독은 초대교회 시대부터 전통적인 기독교 예배의 한 부분이었는데 4세기 경 교회는 교회력을 따르면서 성경 본문을 준비하여 예배시에 봉독했던 것이 관찰된다. 그러나 종교개혁 때 일부 교회들이 교회력과 전통적인 성구집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산물이라 간주하여 이의 사용을 배제했다. 금세기에 와서야 교회는 성구집이 기독교 유산의 소중한 것임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성구집의 역사는, 유대 회당에서 사용된 것부터 고대, 중세 교회를 거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퍼져있다. 현대 성구집은 3년 주기 성구집으로서 “개정 표준성구집”이다. 현대 교회는 종교 개혁 정신이 약화되고, 청중의 다양한 문화적 필요에 대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부응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전통적인 교회력과 성구집의 지침을 따르기보다는 그때그때의 상황에 대처하거나 청중의 필요를 주제를 고려하여 설교하는 것을 선호하게 됐다. 현대교회가 성구집에 입각하여 설교계획을 세우는 것은 교회의 전통을 되새기고 부활시킴과 동시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회복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2. 성구집의 역사 1) 유대교 회당 시대: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