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기독교인들이 가진 부활신앙 곧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에 믿는 믿음(롬 10:9)이 부활현현의 체험이라는 하나님의 계시의 결과로 주어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는 주제에 집중해 거기에 담긴 신학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부활현현의 체험을 부활의 주님께서 여러 증인들에게 ‘보이신’ 사건으로 제시했다(고전 15:5~8). 그것은 하나님이 부활하신 주님의 존재를 여러 증인들에게 보여주시는 계시의 결과로 인하여 그들에게 ‘보이신’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부활의 주님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초월적인 계시 행동이 먼저 있었고 그 결과로 사람들은 그 계시를 받아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초월의 존재를 “보게 되는” 시각적인 신비의 체험을 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그 체험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갈 1:12) 혹은 “하나님의 계시”(갈 1:15~16)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그 체험의 결과로 부활의 주님을 깊이 인정하고 인식하게 됐으며 그 체험을 자기의 사도직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는 그의 사도직이 의심을 받을 때마다 그 체험의 결과로 갖게 된 복음의 확신과 전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주님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주님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주님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주님의 쉴 곳 없네.”최근 교회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성도들과 함께 불렀던 이 노래가 여전히 내 마음과 입술에 맴돈다. 왜일까? 이 노래만 읊조리면 높았던 마음도 금세 낮아지고, 욕심 가득찬 마음도 왜 텅 비어지는 것 같을까? 아무래도 이 노래에 무슨 마력이 있는 듯하다. 하덕규 집사가 지었다는 이 노랫말은 무엇보다 지금의 내 마음을 정확히 집어낸다. 노랫말 하나에 여지없이 내 마음을 들킨다. 정말이지 난,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실 자리마저 뺏을 만큼. 알량한 자존심과 고집과 교만이 목회자 마음에 먼저 채워져야 할 풍성한 주의 은혜를 다 밀어낸다. 심지어 주일 아침조차도 오늘 우리 공동체에 주실 하나님의 은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회는 예배 갱신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예배 현장에 두 가지의 변화가 시도됐다. 하나는 예배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말씀과 성찬의 균형이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기 후반에 들어 나타난 변화로서 성구 봉독과 설교가 예배의 핵심 요소로 자리잡게 된 것이었다. 설교가 예배의 핵심 요소로 자리하면서 현장 목회자들에게 설교는 그들 사역의 중심이 되었다. 매주 주일 아침 예배를 비롯한 주요 예배들과 새벽예배, 철야예배, 그 외 특별 예배 등등으로 수많은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목회자 입장에서 균형잡힌 설교사역을 위한 설교계획은 매우 중요한 관점으로 부각됐다. 물론 목회자들은 설교 준비를 위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할 수 있지만, 그에 앞서 어떤 특정한 설교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효율적인 설교 사역을 위한 설교자의 지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특정한 설교 계획이 수립되어 있지 않은 목회자에게 ‘다음 주일 설교 본문을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라는 생각은 언제나 사역의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 목회자들의 설교사역을 돕는 설교계획 방법에는 몇 가지가 고려될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교회력
필자는 기독교인들이 가진 부활신앙이 부활현현의 체험에 기초한 것으로서 사람에게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혹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는 것을 제시했다. 이것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롬 10:17)라는 사도 바울의 교훈에서도 제시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원어로 ‘레마’인데, 이 레마는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 감동과 능력으로 다가오는 생동적인 말씀을 가리킨다. 곧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레마”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하여 선포되는 감동된 말씀을 듣는데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레마” 곧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감동의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는 것이다.사도 바울은 그가 전파한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전 15:3-4)라는 것이며 그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을 체험한 사람들의 명단을
이탈리아에서 유학했던 친구가 어느 늦은 밤에 자동차에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소를 찾았던 적이 있다. 밤이 깊어 다른 곳은 문을 다 닫았고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열려 있던 셀프주유소를 찾았다. ‘5만리라’를 현금투입구에 넣은 후 기름을 넣고 있는데 기름통이 넘치기 시작했다. 그 당시 ‘5만리라’면 기름통의 약 절반 정도밖에 채울 수 없는 금액인데 이상하게 흘러넘쳤다. 아뿔싸. 경유주유기를 들고 휘발유주유기로 착각했던 것이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경유를 가솔리나(Gasolina, Gasolio)로 부르고, 휘발유는 특별히 벤지나(Benzina)라 부르므로 주의가 요망된다. 휘발유차에 경유를 가득 넣었으니 초비상이 걸린 셈이다. 당장 차를 뒤집어서 기름을 다 토해내야 하는데 새벽 1시에 도와줄 직원이 있겠는가? 불행 중 다행으로 이미 밑에 조금 깔려 있던 휘발유 덕분에 기적적으로 차의 시동은 걸렸다. 길길거리는 소리를 내며 집까지 돌아왔다. 하지만 그 차는 며칠 뒤 고속도로에서 엔진이 눌어붙어 완전히 죽어버렸다. 휘발유차에 경유를 넣었던 그날 밤의 사건으로 인해서 바로 그날 낮에 맛보았던 뜨거운 영적 체험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밀라노한인교회의 임마누엘찬양선교
6. 교회의 목적 성취에 비추어 프로그램을 평가하고 그 결과를 교회에 보고한다.교회협의회는 교회 사역의 질적 발전과 향상을 위해 부단히 각 프로그램들을 평가하고 보완되거나 계속 격려할 사항들을 파악하여 다음 연도의 계획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핸드릭스(Olan Hendrix)는 “경영 통제의 한 정의는 ‘사역의 진행과 그것의 완성을 점검하는 일’이다.…어떻게 우리가 진행 중인 사역을 누군가가 점검하고 조정하는 책임을 지지 않은 채 계획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하겠는가?”라고 언급하면서 교회협의회의 평가기능을 강조한다.이상과 같은 임무와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파워스(Bruce P. Powers)가 지적하는 교회협의회의 임무들은 추가적으로 고려할만한 사항들이다. 비록 그것들이 앞서 언급한 기능들 중에 포함되긴 하지만 별도의 항목으로 고려함으로써 더욱 충실한 교회협의회의 기능수행이 가능해질 것으로 믿어진다. 그것들은 첫째, 교회로 하여금 그 사명을 이해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도록 돕는다. 둘째, 교회와 지역사회의 필요 연구를 조정한다. VI. 교회협의회의 운영대부분의 경우 목회자는 교회협의회의 회장직을 맡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회의는 회장의 회
담임목회로만 쳐도 벌써 20년째 맞이하는 주일이다. 하지만 주일을 맞는 목회자로서의 마음은 여전히 매주일 특별하다. 반드시 승부를 걸어야만 하는 결전을 앞둔 최전방 장병 마음 같다고나 할까? 무척이나 두렵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맛난 음식을 열심히 준비하는 주부 마음 같다고나 할까? 흥분도 되고 신도 난다. 마지막 해산을 앞두고 숨을 고르는 분만실의 산모 마음 같다고나 할까? 기대와 긴장이 교차된다. 타향에 갔다가 명절 되어 고향을 찾아오는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 마음 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설렐 수가 없다. 준비는 늘 부족한데 날짜만 벌써 내일로 다가와 버린 시험을 앞둔 수험생 마음 같다고나 할까? ‘과연 잘 치를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사뭇 초조하다. 각종 사고와 질병으로 고통하며 ‘나 좀 고쳐달라’며 찾아온 환자를 맞는 의사 마음 같다고나 할까? 어떻게든 그들을 말씀과 성령으로 치유해주고픈 심정이다. 그러니 이 마음을 누가 알까? 오직 주님만이 아신다. 매 주일 이 마음을 누가 진정시켜 주실까? 오직 주님만이 진정시켜 주신다. 이 긴장과 흥분과 설레임과 초조함과 두려움과 간절함을 주님이 아시고 오늘도 멋지게 사용해 주신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저
교회협의회는 그림2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회의 주요 사역기관들과 각종 교회위원회, 집사회, 그리고 전담사역자들로 구성된다. 주요 사역기관들을 대표한 책임자들(기관장들 : 교회학교 교장, 제자훈련부장, 여선교회장, 형제회 또는 남선교회장, 교회음악부장)들, 그림에서는 지면상 재정위원회와 위원장, 예배위원회와 위원장만 보여주지만 교회의 모든 위원회 위원장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안수집사들로 구성된 집사회를 대표한 집사장이 구성원이 된다. 이러한 구성은 교회 전체의 사역과 프로그램 및 활동들을 통합적으로 구상하고 통제하며 조장함으로써 원활한 유기체로서의 교회 활동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킬린스키와 워포드는 “Board는 조직의 다양한 기능들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가지는 기본 단위”라고 하면서 각 기관이나 조직들은 그들 중 한 명을 Board의 회원이 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그림2에서 담임목사와 사역자(교육목회자, 음악목회자, 또는 선교목사 등)는 교회협의회를 의미하는 원을 벗어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위원회나 조직을 갖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외의 작은 원들의 경우 그 위치가 교회협의회와 교회협의회 밖으
필자는 지난 번 기사에서 부활현현의 체험이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믿는 부활신앙을 낳았으며 이 부활신앙은 부활신학을 담은 신앙고백과 복음선포(케리그마)로 표현됐다는 것을 제시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출발점이며 중심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약성서의 모든 내용들은 바로 이 부활신앙의 시각과 입장에서 기록됐다. 필자는 기독교의 중심적 신앙이며 기독교 신학의 출발점과 중심점이 된 부활신앙을 태동시켰던 부활현현의 체험에 대한 보다 더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도 지적했다. 그래서 이번 기사에서는 최초 사도들이 경험했던 부활현현의 체험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한다.신약성서에서 부활현현의 체험은 두 가지 종류로 제시된다. 하나는 열 두 사도들의 체험인데, 그것은 사복음서에서 빈무덤 사건과 함께 공통적으로 다뤄진다.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의 체험인데, 그것은 바울 서신들에서 간헐적으로 제시된 반면 사도행전에서 집중적으로 3회에 걸쳐서 제시되었다(행 9장, 22장, 26장). 부활현현 사건에 담긴 신학적인 국면을 제시하는 점에서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제시한 것과 사도행전에서 사울의 체험으로 제시된 사건에서 좀 더 구체적이며 직
블레셋이 골리앗을 앞세우고 히브리군대를 위협하고 있을 때 사울왕은 골리앗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골리앗에 맞서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사울왕은 많은 재물을 포상하고, 가문의 세금을 면제해 주며, 자신의 사위로 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어걸었던 것이다(삼상17:25).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골리앗을 무찔렀다. 베들레헴출신의 촌놈 다윗이라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적적인 승리에 많은 히브리백성들이 그를 칭송하며 추종하는 사태로 발전하자 사울왕은 다윗을 견제하려는 옹졸한 마음에 사로잡혀서 사위로 삼겠다는 약속을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했다. 사울왕은 애초에 내걸었던 현상조건을 변경해 일방적으로 또 다른 조건을 내세웠다. 블레셋남자들의 생식기 100개를 가져오면 자신의 딸 미갈을 아내로 주겠다고 했다. 이 조건은 블레셋남자 100명을 반드시 죽여야만 채울 수 있는 조건이므로 내심 다윗을 전투 중에 죽게 하려는 속셈이었다(삼상18:25). 하지만 사울왕의 계략은 완전히 빗나갔다. 죽으라는 다윗은 죽지도 않고 오히려 200개나 되는 포피를 확보해 의기양양하게 사울왕 앞에 나타났다. 사울왕은 다윗에게 자신의 딸 미갈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다행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의 침례교회들이 통치기구로서의 교회협의회라는 조직을 교회 내에 두고 있지 않거나 또는 이에 상응하는 타교단의 유사 조직을 여과 없이 교회에 받아들여 활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한국에서의 침례교회가 침례교회다운 회중정치를 정착시키는 일에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음을 주목한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침례교회의 회중정치를 정착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는 침례교회 교회협의회의 구성과 운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밝히고 한국침례교회들에게 적합한 적용점들을 제안하는데 있다. I. 전체 교회구조 속에서의 교회협의회의 위치회중민주주의 정치를 중심으로 하는 침례교회는 그 전체적 구조를 다음과 같이 그릴 수 있다. 아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회의 최고의결기관은 사무처리회이다. 교회 전체에 관계된 사안들에 대한 궁극적 결정권은 전체 회중들로 구성되는 사무처리회가 가지며 이를 위해 교회는 전체의 결정을 요하는 사안에 대하여 사전에 보다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교회 전체에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즉 사무처리회는 즉각적으로 언제든지 개최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주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도록 충분
말의 위력에 대해서는 새삼 재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지도자의 말은 구성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느냐, 분열시키느냐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리더십 덕목이다. 따라서 말을 잘 할 필요는 없다 해도 잘 말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말보다 더 큰 위력은 웃음에 있다. 유머에 있다. 윈스턴처칠의 리더십도 사실 이것이었다. 물론 그는 노벨문학상까지 탈 정도로 말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웃음과 유머 역시도 명성이 자자했다. 한 번은 강연을 하러 단상에 올라가다가 그 육중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다. 그러자 숨죽이며 그의 입장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웃긴 모습에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처칠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저 때문에 웃을 수만 있다면 저는 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 큰 박수로 화답했다. 결국 그의 그 여유있는 웃음의 리더십이 세기의 영웅을 만든 셈이다.나도 요즘 성도들로부터 곧잘 듣는 말이 있다. 전에 비해 확실히 그렇다. “목사님. 목사님이 전보다 많이 여유로워지신 것 같아 좋아요. 웃는 모습도 많아지셨고….” 칭찬인지 뭔진 몰라도 하여간 전보다 나아졌다니 감사하다.그도 그럴 것이 난 요
CBS 열린 간증 프로젝트『Amazing Grace』에 우리 교회 열한 명의 성도들이 출연했다. 게임 중독자, 마약 중독자, 알콜 중독자, 도박 중독자, 조직 폭력배, 우울증 환자, 안티 기독교, 심지어 자살 중독자까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는 다양했지만 그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오직 ‘부활의 복음’이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었던 이들과 20여년을 함께 해 온 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있다. 그것은 ‘복음이면 다 된다’는 큰 확신이다. 복음은 로마서 1장 16절 말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복음은 이 세상 어떤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그 어떤 문제도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CBS 간증 프로젝트『Amazing Grace』에 나간 열한 명의 간증자들이 그 증거이다.그런데 지금까지 나의 목회를 돌아보며, 과거에도 동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했는데 ‘왜 지금과 같은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과연 어디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첫째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Nothing but Jonah`s sign) 없다’는 것을 강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마 12:39). 서기관
이 글은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출간된 복음과 실천(50)에 나오는 박영철 교수의 글을 발췌, 게재한다 침례교회 회중정치에 대한 이해와 건강한 침례교회를 세우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편집자주들어가는 말본질 그 자체가 공동체인 교회는 그것이 하나의 유기적 몸으로 세워져나가는 일에 있어서 누가 어떻게 교회를 조정(control)하는가의 문제가 침례교의 회중정치(congregational polity)를 성공적으로 시행함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 요소이다. 군주정체의 독단적 모순을 피해 회중 전체가 교회 일에 책임을 지고 적극 참여하는 일은 반드시 공동체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묶어주고 다양한 사역들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시행하고 통제하고 평가하고 통치하는(governing) 책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나 조직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담임목사 한 사람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거나 또는 비정상적으로 소수의 교인들의 권리만 강조되어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따라서 교회가 회중정체를 적극적으로 살리면서도 효과적으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책임과 권한이 부여된 통치(governing) 기구나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물론 이러한 일은 회중 전체와의
요즘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활발하다. 세상살이가 복잡다단하고 바빠서 실제로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늘 부족하기 때문이다.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상에서 단체 채팅 등의 방식으로 동창회도 하고 각종 계모임도 하며 활력을 얻는다. 동창들이나 친구들의 성공적인 소식을 접하면서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한다. 이러한 면에서 온라인상의 채팅방은 긍정적인 소통방식이다.그러나 이러한 소통방식이 때때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도 있다.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체면이나 자존심으로 인해 본심을 숨기는 사람들에게 다른 동창들이나 친구들의 화려한 성공소식이 오히려 의욕저하라는 부작용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물론 실제보다 부풀려서 자신의 성공담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많지만, 필요이상으로 남에게 자신을 비교하며 비관하는 사람들이다. 친구들의 성공이 나를 위축시키고, 친구들의 행복이 나를 불행하게 한다. 이러한 부러움은 필경 시기심이나 미움으로 변질된다.열정적으로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저렇게 요란을 떨어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가? 저렇게 시끄럽게 떠들어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