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반열에 서 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로서 인간에게는 인간 생명을 지배할 권리는 물론, 인간 생명의 발전을 앞당기거나 유전학적으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기독교 생명윤리의 또 다른 핵심 원리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살인은 가증스러운 범죄이다. 이러한 존엄성은 생명의 신성함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 세상에서 악이 넘쳐났을 때 하나님은 대홍수를 일으켜 세상을 정화하였으며(창6:11), 그 이후에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의 신성함을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라는 구절 속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며 신성성은 경외심을 일으킨다. 이것은 인간생명이 숭배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신성하게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 19
포스트모던 문화와 더불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성 외에 지식으로 인도하는 다른 도구들에 관심을 가진다. 이를테면 감정, 경험, 그리고 은유와 같은 것들이다. 이성주의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의 현대인들은 어떤 사실이나 지식을 접할 때, 그것의 보편타당성이나 객관적인 기준을 배제하는 반면 시각적으로 직접 보고 느끼는 방식으로 접촉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현대인의 욕구는 설교에서도 일방적인 선포보다는 이미지를 선호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이미지와 영상으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더니티 문화의 영향과 함께 현대 청중의 의식의 변화에서 오는 현상이다. 현대를 지칭하는 멀티미디어 시대는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한 정보전달 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조성하였다. 매체의 발달 과정에서 보여주듯이 지식과 정보의 전달은 단순히 듣는 과거의 방식에서 이미지와 영상을 통하여 보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현대 청중은 설교 역시도 단순히 말하고 듣는 통화 방식에서 이제는 이미지나 영상을 곁들인 전달 방식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포스트모던 문화에 전면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저 연령층의 청중에게서 두드러지게 발견된다. 이러한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전통설교 방식의 한계를 지
축복(祝福)이라는 말은 복을 빈다는 뜻이다. 누구에게 복을 빌어주는 말을 축복의 말이라고 한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말을 하는데 복을 많이 받으라고 빌어 주는 말이 바로 축복의 말이다.자녀들에게나 주변사람들에게 축복의 말을 하는 것이 좋은 줄은 알지만 잘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남을 축복 할 수 있나 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축복의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하고 바로 왕을 축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창47:10) 바로왕은 그 당시 천하를 호령하는 왕이지만 야곱이 바로에게 인사하러 가서 바로를 축복하고 나왔다고 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보내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눅10:5) 고 했다.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평안이 임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시면서 어느 집이든 가면 평안하기를 축복 하라고 했다.대부분의 사람들이 판단하고 비난 하는 말을 잘하면서 축복 하는 말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아서 잘 못한다. 말은 태어나면서부터 수없
1. 호칭과 상징 이상 성애의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에 호칭 역시 여러 가지이다. 동성애자들은 1990년부터 LGBT를 공식 명칭으로 결정했다. LGBT는 Lesbian(레즈비언), Gay(게이), Bisexual(양성애자), Transgender(성전환자)의 첫 자를 딴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반’(Ivan), 이성애자들을 ‘일반’이라 하며, 무지개를 상징으로 채택했다. 2. LGBT의 오늘동성애자들은 그들의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하자 바로 연대(連帶)를 구성해서 ‘동성애자’ 또는 ‘이상성애자’ 대신 ‘성소수자’라는 명칭을 사용해서 인권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한국에서는 2,000년 서울에서 퀴어영화제(Korea Queer Culture Festival)가 열리면서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전신인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이 결성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행사와 시위를 통해서 동성애의 도덕성이나 사회적 문제점은 ‘성소수자의 인권’이라는 포장지에 싸여버렸다. 동성결혼 인정 문제에 관한 2001년의 여론조사에는 찬성 17%, 반대 67%이던 것이 2014년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발표에는 찬성이 35%로 증가했고 반대는 56%로 줄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1
필자는 요한이 제시하는 부활현현 이야기에 담긴 부활의 신학을 살펴보고 있다. 요한은 부활의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을 전달한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 평강을 주시는 것에 관한 두 번째 언급은 제자들의 삶에서 평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 예수의 길을 반대하고 적대시하는 사람들로 인한 박해와 고난의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하는 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평강의 생명이다. 이 평강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들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요한은 부활현현 이야기들에서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는 것을 세 번이나 언급한다(20:19, 21, 26; cf. 눅 24:36).부활현현 이야기의 중심적인 내용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확신시켜 주는 것과 함께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일을 계승하고 재현하는 사명을 위임하는 것에 있다. 사복음서 기자들이 공통적으로 제자들이 주 예수의 현현을 경험하는 자리에서 받는 위임의 말씀을 전달한다(막 16:15; 마 28:19f.; 눅 24:47). 요한은 ‘보낸
군(軍)에 와서 처음 목회를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부분이 “과연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에 대한 대답을 찾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군종장교로 임관해서 들어오기 전에도 나름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인정받는 사역을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역 영역이 불신자들인 군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예배에 참석하는 형제들도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은 군에 와서 처음 교회에 나와 본 것이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보면, 산고의 고통(?)을 느끼며 만들어낸 심혈을 기울인 설교에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눈앞에는 깜깜한 군인형제들의 머리만 보였습니다. 기가 막히게 단결된 모습으로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간간이 섞여 있는 간부들과 가족들만이 고개를 들고 목사를 쳐다봐줬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도 뭐 그렇게 은혜 받은 충만한 표정들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예의있게 목사를 대해줬습니다. 단지 아내만이 유일하게 “당신 죽 쒔어요!”라고 모니터를 해줬습니다. 사실 저는 그 때 그 성도들에게 참 고마움을 지금도 느낍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어떤 때는 설교하고 있는 내가, 지금 무슨 설교를 하고 있는지를 모를 때가 있을 정도로 형편없었던 것 같습니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반열에 서 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로서 인간에게는 인간 생명을 지배할 권리는 물론, 인간 생명의 발전을 앞당기거나 유전학적으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기독교 생명윤리의 또 다른 핵심 원리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살인은 가증스러운 범죄이다. 이러한 존엄성은 생명의 신성함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 세상에서 악이 넘쳐났을 때 하나님은 대홍수를 일으켜 세상을 정화하였으며(창6:11), 그 이후에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의 신성함을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라는 구절 속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며 신성성은 경외심을 일으킨다. 이것은 인간생명이 숭배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신성하게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 1
포스트모던 문화와 더불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성 외에 지식으로 인도하는 다른 도구들에 관심을 가진다. 이를테면 감정, 경험, 그리고 은유와 같은 것들이다. 이성주의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의 현대인들은 어떤 사실이나 지식을 접할 때, 그것의 보편타당성이나 객관적인 기준을 배제하는 반면 시각적으로 직접 보고 느끼는 방식으로 접촉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현대인의 욕구는 설교에서도 일방적인 선포보다는 이미지를 선호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이미지와 영상으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더니티 문화의 영향과 함께 현대 청중의 의식의 변화에서 오는 현상이다. 현대를 지칭하는 멀티미디어 시대는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한 정보전달 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조성하였다. 매체의 발달 과정에서 보여주듯이 지식과 정보의 전달은 단순히 듣는 과거의 방식에서 이미지와 영상을 통하여 보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현대 청중은 설교 역시도 단순히 말하고 듣는 통화 방식에서 이제는 이미지나 영상을 곁들인 전달 방식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포스트모던 문화에 전면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저 연령층의 청중에게서 두드러지게 발견된다. 이러한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전통설교 방식의 한계를 지
사사기 19~21장은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남색과 성폭행의 심각성과 그 비극적 결말을 보여준다. 사사시대는 대략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을 탈환한 때부터 엘리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성경은 이 무정부 시대를, “[그때에]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하고 묘사했다(삿21:25).그 시절, 에브라임 산골에 살던 어떤 레위 사람이 불륜을 저지르고 친정으로 도망친 첩을 찾아서 멀리 베들레헴까지 갔다. 그는 친정아버지 집에 숨어있는 첩을 발견하고 따뜻한 말로 달래서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를 했다. 그런데 사위가 길을 떠나려 하면 장인이 자꾸 붙들어서 레위 사람은 닷새를 더 머물렀다. 엿새째 되는 날도 장인이 해가 기울 때까지 붙들자 레위 사람은 장인을 뿌리치고 저녁 무렵에 첩과 하인을 데리고 나귀에 짐을 싣고 길을 떠났다. 그들이 가까운 여부스[예루살렘] 부근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베냐민 지파의 마을 기브아로 들어갔다. 그들은 마침 길에서 한 노인을 만나 하룻밤을 유하려고 그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날 밤에 마을 불량배들이 몰려와서 집주인에게,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 하리라”하고 위
지난 주 어떤 강의를 들으면서 “동안보다 동심을 유지하라”는 메시지가 참 마음에 꽂혔다. “동안도 동심에서 우러나와야 진정한 동안”이라는 말 또한 그러했다. 그러면서 그 강사가 회중에게 던진 동심이 살아있다는 증거 세 가지. “1. 계절의 변화에 여전히 민감하다면... 2. 다른 사람의 얘기에 잘 웃는다면…. 그리고 3.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면….” 이 말에 얼마나 많은 뉘우침이 있었는지 모른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동안의 얼굴과 피부를 갖고픈 소망은 너무나 강렬하다. 그래서인지 경기는 불황이어도 성형외과와 피부과만은 늘 호황이다. 우리나라 성형시장규모는 이미 5조원을 넘었다. 거기다 돈 쓰는 건 아까워하지도 않는다. 이에는 남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남자화장품의 시장규모도 벌써 1조300억원에 달했고 매년 10%이상 증가하고 있다. 그러니 이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누가 뭐랄 수 있을까? 나 역시 나이가 들어도 추해보이지 않고, 나이보다 젊게 보이면 기분 좋아하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동안’에 신경 쓰는 만큼, 더 중요한 ‘동심’을 깨우는 일도 얼마나 중요한가? 얼굴만 동안이면 뭐하나? 마음도 동심이어야지. 차라리 나이에 안 맞
그러므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고통의 의미에 대한 바른 성찰이 없이 고통을 피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자신들의 무지한 생각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안락사는 고통을 감소시킬 다른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취하는 극단적 해결 방법이다. 안락사를 선택한다는 것은 고통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의미도 부정해 버리는 것이며, 고통과 더불어 삶의 가치까지도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고통과 삶의 포기는 소중한 인간의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다. IV. 성경적 반성과 입장 1. 죽음에 대한 올바르고 정확한 이해와 인식목회자에게 있어서 죽음 앞에서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인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 웨이브라이트(G. L. Waybright)는 3가지 인식을 강조했다. 첫째,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죽음에 직면하면 슬픔과 고통의 경험이 동일하다. 둘째,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죽음에 관한 많은 ‘왜 그런가의 문제’에 대해서 충분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셋째,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죽음에 직면해서 그들의 관심은 ‘현 세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다. 죽음은 인간의 적이
들어가는 말설교에 대한 변화의 요청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일찍이 20세기 초, 기독교는 설교와 함께 흥망을 같이 하였다고 말했던 포사이트(P. T. Forsythe)는 당시 설교에 대한 위기의식을 직시하며 만일 기독교에서 설교가 사라진다면 교회는 세상의 시녀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간파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설교에 대한 위기의식은 프레드 크레독(Fred Craddock)의 책, 「권위 없는 자처럼」(As One Without Authority)이 발표되면서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혹자는 이러한 변화는 마치 설교학에 있어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바람은 학자들에 의해 신설교학(New Homiletics) 운동이라고 불려지기 시작했다. 신설교학자들은 신설교학 이전의 설교를 전통적 설교로 분류했다. 신설교학 관점에서 보는 전통적 설교는 설교자가 자신이 설정한 진리를 입증시켜 나가기 위해 연역적 논증 방식을 취한다. 일반적으로 명제 중심의 연역적 설교는 3개요(three point) 형식을 취하면서 설정된 명제를 설명하고 입증하며 설득의 작업을 펼쳐 나간다. 이와같은 방식을 크래독을 비롯한 신설교학자들은 청중을
창세기 18, 19장에는, 여호와께서 두 사자와 함께 마므레 상수리나무 숲에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가셔서 사라의 출산을 예고하고 소돔 고모라의 재앙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사실이 기록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고 죄악이 심히 무거워 직접 가서 확인하시겠다고 말했다(18:20~21). 아브라함은 롯과 죄 없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하며 여호와께 매달려 소돔에 의인 50명, 45명, 30명, 20명, 10명이 있으면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18:22~33). 한편, 먼저 떠난 두 천사는 소돔성에 도착해서 마침 성문 앞에 앉아 있는 롯을 만나 그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잠자리에 들 무렵 소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 집을 에워싸고, “오늘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하고 롯을 위협했다(19:5). 롯은 그들을 달래다가, 남자를 모르는 두 딸을 줄 터이니 대신 손님들을 괴롭히지 말아달라고까지 간청했으나 무리들은 롯을 밀치고 문을 부수려고 했다. 그 때 천사들이 롯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무리들의 눈을 멀게 했다. 천사들은 롯에
1621년 ‘유몽인’이 저술한 ‘어유야담’에 실린 논개에 관한 내용이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에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어 군사들은 패배했고 백성들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곱게 몸단장을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바위 아래는 깊은 남강의 강물이었다. 왜적들이 그를 바라보고 침을 삼키면서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던 차, 왜장 하나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 논개가 미소를 띠고 그를 맞이하니, 왜장이 그녀를 꾀어내려 하였지만, 오히려 논개에 붙잡혀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최경회가 전라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사를 훈련할 때 그의 소실 논개는 의병 훈련을 뒷바라지했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2차 진주성 전투를 할 때에도 성안에서 전투의 뒷수발을 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일본 장수들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강가에 서서 술에 잔뜩 취한 왜장을 유인해 그를 끌어안고 함께 남강에 투신하였다. 술에 취해 호기를 부리다 물고기의 밥이 되어 버린 불쌍한 인간, ‘게야무라 로쿠스케’. 잡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욥1:21) 4. 고통을 피하기 위한 선택안락사 옹호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무엇보다도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생동안 남의 도움이 없이는 거동조차 할 수가 없고,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안락하게 죽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고통과 죽음의 연관 관계를 이야기하는 욥의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욥기 2:9에 보면 욥의 아내가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한다. 이는 더 이상의 고통과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욥은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과 같도다”(욥2:10)라고 일축하며 입술로 범죄 하지 않는다. 욥은 지속되는 악과 고통 속에서도 믿음으로 이기고 승리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태도에 대해 신약은 욥의 인내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보라 우리가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5:11) 그렇다면 인간이 고통대신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