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지 않은 어둠 속을 지나와서 매화 향기 속에 교회당 문을 열고 주님께 머리 숙여 인사드리는 사이 하루분의 태양 빛이 찾아온다. 교회당 지붕 시멘트 기와 사이에 세 들어 사는 참새들이 아침 찬송을 부르며 날고 교회당 복도에 피기 시작한 수선화의 노랑과 흰 화분에 핀 라벤더의 보라가 아름다워지기 시작한다. 지붕에는 일 년을 기다려온 영산홍과 장미가 제각각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벽에는 기도 등이 손을 모아 빛나고 강단에는 소박한 십자가가 빛 속에 있다 지하이기도 하고 아직은 난로를 피워야 할 때다. 등유 날로가 소리를 내며 발갛게 타오르고 원적외선 히터의 붉은 불빛에 필경대 옆 분홍 튤립 세 송이 잎이 벙글어진다. 열두 개의 장의자 중 맨 앞줄에 앉아 기도를 드리고 큐티를 하고 주님 주시는 기쁨으로 가슴이 젖으면 지하 예배당은 에덴의 풀꽃 냄새로 가득해진다. 빛도 없는 곳에서 겨울을 나며 다섯 달을 함께 예배하고 기도해 온, 그러느라 기다랗게 잎이 두 개만 남은 여윈 글라디올러스, 어여쁘다. 주님이 찾아오시는 이곳, 모든 것이 복스러워라. 땅속 이곳, 이 시간, 아래로도 위로도 옆으로도 막힌 것 하나 없이 은총과 영원이 성운처럼 흐른다. / 시인인 시집
루터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늘 분주했지만 바쁘기 때문에 더욱 기도한다고 즐겨 말했다. 기록에 따르면 루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네 시간씩 기도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종교개혁이라는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기도에 관한 장황한 설명보다 자신이 직접 삶속에서 경험한 기도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고 이 책을 집필했다. 루터는 이 책에서 단지 기도만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 기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알아야 할 영적 생활의 비밀을 말하고 있다. 주기도문, 십계명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등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다. 기도의 형식적인 신학이 아니라 종교개혁자의 매일의 기도 습관을 즐겁게 만나보자.
휴 홀터는 ‘성육신-평판-대화-직면-변화’라는 큰 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드러내는 성육신적 삶, 성육신적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길을 성경적 원리와 유쾌한 예화들을 통해 선명하게 제시한다. 예수의 성육신을 이해하면 놀라운 가능성이 보인다. 우선 예수께서 여러분의 삶을 살고, 그 다음 여러분이 예수의 삶을 살 수 있다. 흠이 없이 완벽하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 땅에 왜 존재하는지 더 큰 비전을 보게 된다. 저자는 신학의 행간을 읽어 내면서 옆집에 사는 진짜 인간, 진짜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돕는다.
목회로 인해 생긴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좌절과 탈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제공한 놀라운 능력과 소망을 빼앗는다. 이 책은 목회를 시작한 지 3~4년 전후로 목회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목회자가 목회 사역에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믿음의 부족, 자만, 자기연민, 자멸적 반응 등 온갖 종류의 감정들이 목회자가 경험하는 일상적인 스트레스임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회복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시고, 그 분의 은혜는 목회자들이 오랜 여정 속에서도 신실한 종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힘을 줄 것”이라고 맺고 있다.
‘이재철 목사 메시지’ 시리즈 1권. 그간 이재철 목사가 전한 설교들 가운데 특별히 내면의 울림을 주고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설교를 따로 모아 엮은 것이다. 기존 출간된 그의 저서에서 발췌하기도 하고, 그가 외부 집회에서 전한 설교들 가운데서도 녹취해 담아낸다. 휴대하기 편하게 손에 잡히는 판형으로, 언제 어디서나 가까이 두고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은 2015년 5월 22일 밴쿠버 교회협의회가 주최한 밴쿠버 연합집회에서 시편 39편 5~6절을 본문으로 삼아 전한 설교 내용을 담았다. 그리스도인은 하루, 한 시간, 1초를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 순간 속에서 주님의 영원한 섭리를 이해하고 참된 자유를 누리며 한걸음씩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이 책은 독자들을 인도한다.
교회에서 가끔 오해되는 부분이 직분과 믿음의 깊이다. 직분을 받은 사람은 믿음도 그만큼일 것이라고 모두가 착각한다. 저자는 한국교회가 외형적으로 커졌지만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이유 중에 하나를 제자훈련을 단순히 성경공부와 동일시하는 점을 들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사는 가장 평범한 이유가 우선시 돼야 함을 강조한다. 성경을 공부하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삶, 교회는 다니되 제자가 되지 못한 삶, 헌신과 열성이 없는 삶의 결과를 지적하며 생활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강조한다.
큰 죄에 빠진 날 위해(새282/통339) 작사: 샬롯 엘리엇(Charlotte Elliot, 1789~1871) 작곡: 윌리엄 브래드버리(William Batchelder Bradbury, 1816~1868) 프랑스의 시인이자 목회자인 헨리 말란(Henri Malan)은 영국 브라이튼에 있는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절친한 사이인 성공회 신부 헨리 엘리엇의 몸이 불편한 여동생을 위로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친구의 동생 샬롯 엘리엇(Charlotte Elliot)이 어렸을 때는 밝은 성격과 믿음을 가진 예쁜 소녀였다. 그러나 30세 쯤 됐을 때 병에 걸려 전신을 움직일 수 없는 불구자가 됐다. 그녀는 날이 갈수록 불평이 늘고 세상을 비관하기 시작했다. 성격은 날카로워졌고 신앙을 내동댕이치기에 이르렀다. 집 밖에는 나오지도 않고 방안에서 혼자 지냈으며, 식구들과 대화조차 끊어진지도 오래였다. 그야말로 엘리엇은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엘리엇에게 멀리서 온 말란 목사의 말이 한마디도 들릴 리 없었다. 모든 말들이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그렇지만 말란 목사가 시를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녀의 닫힌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영문학자이면서 비평가인 루이스! 아동문학가로서의 루이스! 기독교 작가로서의 루이스!” 오언 바필드(Owen Barfield)는 친구 루이스를 이같이 세 가지 타이틀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기독교 관련 행사장에서나 목사님들의 설교에서 최소 한 번쯤은 C.S. 루이스(C.S.Lewis)라는 이름과 그의 어록내지는 행적에 대해 들어 봤을 것이다. 루이스는 기독교의 안팎으로 꽤나 유명한 인물이다. 특히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핵심요소를 집중적으로 다루며 명료한 논증으로 많은 청중들을 회심시켰다. 이어 신앙에 대한 깊은 성찰로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서 자리를 굳게 매김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 10인의 반열에 그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루이스는 처음부터 크리스천이었던 것은 아니며 어린 시절에 회심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부모 밑에서 자라났고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으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실한 신자”는 아니었다. 더욱 놀랄만한 것은 그는 오랜 세월 무신론자와 회의주의자로 살면서 기독교 신앙과 진리에 대한 깊은 의심과 정교한 반론
“모든 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질병도 환경도 사람도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답을 먼저 쓰고 거꾸로 문제를 풀어보라 얽히고 설킨 것도 답은 있는 법 어떻게 산을 바다에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으리라 시인은 한국 문인협회 회원, 푸른숲 작은도서관 관장이며 엘림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철제 빔 빈칸에 끼어 앉은 다정한 비둘기 한 쌍 정다운 시선으로 지는 해를 마주하고 있었다 세상에 우리처럼 다정한 부부 있다면 나와 보라는 듯이 사실 옆집 수많은 칸 칸마다 빈집이거나 외톨이로 한없이 누구를 기다리고 있거나 토라져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감격과 경이로 가득한 귀 기울여주는 마음씨 세심한 한 여자와 백일홍 다발처럼 열정이 넘치는 남자가 말할 수 없이 그리운 세계 한가운데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바보처럼 행복에 젖어 콕, 콕 서로의 기분 좋은 발등을 쪼아주고 어지럽게 흩어진 살림살이 단칸방에 이 빠진 화분을 가꾸는 건강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처럼 도락을 즐기는 호사가들이 있었다 / 시인은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새들은 난간에 기대산다”외 다수를 발표했다. 현재 도서출판 굿글로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대전침례교목사 독서학교는 필자를 중심으로 2008년 1월에 시작해 잠시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대부분 40대 이상 현직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들이다. 다시 책을 통해 다시 모인 이유는 목회는 예측 할 수 없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책 읽을 마음과 시간이 나지 않는다. 독서학교를 통하여 강제적으로도 책을 읽어 복음의 빚진 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함이었다. 리더로 섬기는 필자 역시 25년간 4번의 개척과 교회를 담임하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시대의 변화를 읽고 성서를 해석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는 메시지였다. 요즘처럼 다양한 기술방식의 선교매체가 발달된 적은 없었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지난 20년 안에 이뤄졌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이런 변화의 추세에 따라갈 수가 없다고 한다. 성도들은 하루하루 디지털시대를 살고 있는데 아직도 목회는 아날로그 방식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목사(교회)는 과거시대를 붙잡고 있는 수구세력처럼 비쳐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변화가 얼마나 빠른지 한국사회가 지난 20년 전세계 최고의 지식정보화사회를 구축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아도 5년이 지나면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손글씨와 그림이 어우러진 한 컷 묵상. 자신의 상황에 맞는 그림과 글에 위로를 얻었다거나 그림을 보고 자신의 삶과 신앙을 반성한다. 삶이 고단하고 앞길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 성도는 어디에서 위안을 얻어야 할까? 눈에 보이는 상황 앞에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기도하지만 인생의 풍파가 닥쳐올 때마다 당연한 듯 다른 도피처를 찾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다소 다형질의 방황하는 크리스천 미루와 그의 속 깊은 동역자 나무를 통해 성도들이 겪는 신앙생활에서의 혼란과 그에 대한 따뜻한 위로를 담았던 1편에 비해 2편에서는 보다 성숙한 미루의 모습과 세상 풍파 속에서 빈번히 찾아오는 신앙의 갈등과 고민을 깊이 있게 다뤘다.
우리 사회에서 윌빙이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듯, 잘 살고, 잘 죽는 즉, ‘행복한 삶’에 대한 열망이 높다. 이처럼 행복은 시대와 인종, 문화와 지역을 넘어 인류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제1의 가치이다. 우리는 항상 ‘무엇을 위해 사는지’ 스스로에게 반문하지만, 행복은 무엇이며 정작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알지 못한다. 이 책은 바로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질문의 응답이자, 이를 위한 행복 학자들의 오랜 연구 결과를 담았다. 행복한 삶을 설계하는 방법에 대해 과거 자신의 삶을 짓누르던 불안, 자괴감, 방황의 세훨에 관한 진솔한 고백과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실질적 방법을 공개한다.
설교자는 자신의 책상에서 고민한 내용들을 어떻게 강단에서 의미있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해 늘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풀어가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이 책은 설교의 구술행위로서의 우월성에 대한 학문적인 설명과 성서정과(교회력에 따라 배치한 성경읽기표)의 균형잡힌 적용을 위한 적절한 비판, 대안 제시 등 다양한 관점에서의 설교자와 설교 준비를 위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저자는 내러티브 설교 이론을 주창하고 확립한 학자로 설교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을 제시한다. 그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설교를 분석하고 어떻게 설교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것인가를 설명한다. 또한 설교 원고와 소리로 전달되는 설교의 행위를 비교 분석하면서 설교가 공간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진행되는 소리의 행위임을 전한다.
이 책은 복음을 통해 세상에서 지친 이들의 회복을 돕고 다음세대를 키우는 당진동일교회의 이야기이다. 교회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꿈을 함께 꾸며 이뤄나가는 교회를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교회에서 젊은 세대가 사라지는 시대에 젊은이가 그것도 부부가 당진동일교회를 찾는다. 교회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늦둥이를 꿈꾼다.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니기 시작한 아내가 변해도 너무 변해 남편이 교회 나오기 시작한다. 주말, 아빠는 아이들과 함께 성경을 공부하러 교회를 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교회는 삶으로도 삶에 지친 사람들, 방황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회복을 돕는 교회가 될 것이다. 또한 정직하고 바른 신앙관을 가진 차세대, 무엇을 맡겨도 안심이 되는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