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교회주차장에서 한 집사님으로부터 나의 축도사진이라며 액자까지 만들어놓으신 선물을 건네받았다. 내가 보기에도 간만에 잘 나온 사진이라 흡족하여 “어떻게 찍으셨냐” 그랬더니, “축도 사진이 목사님껜 잘 없으실 것 같아서….지난 송구영신예배 때 새해를 시작하는 성도들을 축복해주시는 모습이 너무 귀해 보여서….”라 하셨다. 그 이유가 더 고마워서 목양실에 놓아두니 참 여러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나의 22년 목회사역에 축도 사진은 이제 두 장이 됐다. 하나는 해군항공단 군목시절(2000년 1월)에 군종병이 찍어 준 사진인데, 그때는 일부러 부탁해서 찍었다. 이렇게 설교하는 사진이야 더러 있지만 축도 사진은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축도 시간에 누가 기도도 안하고 용기있게 앞에 나와 대놓고 사진을 찍기란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아무튼 목사가 성도 축복하는 일이 가장 귀해 보인다는 그 집사님의 말씀에 다시 가슴이 뭉클해진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권세가 다시 영광스러워진다. 저들이 저리 생각하는 이상 더 진지하게, 더 간절하게 하늘의 복을 비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이다.축복기도! 어쩌면 이는 설교하는 일보다, 가르치는 일보다, 행정하는 일보다
3. 현현 경배마태복음 서사에 묘사된 신적 현현(divine presence) 경배는 예수의 신적 정체를 지각한 무리들이 그를 경배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크게 6번에 걸쳐 신적 현현한 예수를 경배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1) 동방 박사의 경배(2:2, 11), 2) 배에서 행한 제자들의 경배(14:33), 3) 변화산상의 경배(17:1~8), 4)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린이들의 경배(21:15~16), 5) 부활한 예수를 향한 여자들의 경배(28:9), 6) 갈릴리 산에서 제자들의 경배(28:17)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서사에 드러난 신적 현현을 통해 마태가 드러내고자한 신학적 의도는 무엇인가? 첫째, 여섯 번의 현현 경배 가운데 두 번은 부활한 예수를 경배한 것이다(마 28: 9, 17~20). 부활을 경험한 마태공동체는 이미 예수를 경배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부활의 예수를 경배의 대상으로 따르고 있다는 것은 마태공동체가 유대교와 다른 신앙 노선을 걷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와 유대교는 부활이라는 사건으로 인하여 분리가 진행될 명확한 갈림길에 서 있었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I. 서론최초의 침례교회는 160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동하였다. 약 2년 전에 소수의 영국 분리주의자들(English Separatists)이 핍박을 피해서 영국 땅을 떠나 암스테르담에 정착을 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네덜란드의 아나뱁티스트들이 오직 신자들에게만 뱁티즘(그 당시에는 물을 머리 위에 붓는 관수례Affusion가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을 베푸는 행습을 목격하면서, 교회는 오직 예수 믿는 신자들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어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였는데 후대 사람들은 그들을 침례교회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그들(일반침례교회)은 이미 영국 땅에서 국교회로부터 뛰쳐나와 독립된 교회를 이루었던 분리주의자들인 게인즈보로교회(Gainsborough Church)를 모체로 하여 태동한 교회였다. 1638년에 태동한 특수침례교회 역시 제이엘제이교회(JLJ Church)라고 불리웠던 분리주의자들의 교회를 모체로 하여 시작되었다. 이렇듯 침례교회는 영국의 분리주의자들로부터 연유한 교회였다. 분리주의자들은 영국 청교도주의자들의 좌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영국국교회는 부패한 적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따르고자
시작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 지니라(창2:1) 사탄이 역사를 시작하다(창3:1이하) 첫째 아담은 실패했다(창3:2-7;Cf호6:9) 아담이 하나님을 피하다(창3:10) 땅과 피조물이 저주를 받는다(창3:14-19; Cf롬8:22)14-15, 뱀이 저주 받음16, 여자가 저주 받음17-19, 아담이 저주 받음 인간의 허물을 가리기 위해 양의 피를 흘리다(창3:21) 낙원을 잃어버린다(창3:22-24)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혼인한다(창6:1-2) 세상에는 죄와 고통이 시작된다(창6:5-7) 세상이 물로 파괴된다(창7:1-24) 혼란스러운 방언을 한다(창11:7-9) 죄와 허물을 씻기 위해 매 번 제물을 바쳐 제사 한다(출29:38-39;Cf.민28:1-8) 끝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다(계21:1) 사탄이 역사하지 못한다(계20:1-3;Cf유6) 둘째 아담은 승리한다(계1:7,18)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계21:3) 모든 저주가 풀린다(계22:3)옛 뱀은 무저갱에 감금된다(계20:1-3)아담의 후손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보좌앞에 나아간다(계20:4) 어린양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마태는 헤롯왕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인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여야 하듯이, 그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이방인 수용을 인식하기 원한 것이다. 헤롯왕은 동방 박사들이 고국으로 돌아간 사실을 알고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애굽으로 피한 예수를 찾지 못한다. 결국 헬롯왕은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 있는 두 살 이하 아이들을 살해함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지만 예수를 죽이는 일은 실패하고 만다(마 2:16). 유대인을 대표하는 헤롯왕은 확실히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 것이다. 반면에 동방 박사의 경배 서사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한 것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동방 박사이다. 동방 박사와 베들레헴 지역은 예수 탄생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동방 박사의 경배 서사는 마태의 신학적 관점인 이방인 수용의 당위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방 박사는 예물을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지도자인 헤롯에게 경배하지 않고 메시아 예수를 찾아와서 직접 경배했다. 더욱이, 동방 박사가 예물을 드리는 모습은 이방인들이 금과 유향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여호와를 찬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6월 런던 광장에서 육군 중령 브라운은 시계탑을 보며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브라운은 우연한 기회에 젊은 여성작가 주디스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그녀의 글은 한 줄기 빛처럼 희망과 용기를 줬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작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답장이 2주 후에 왔고, 두 사람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싹튼 브라운은 주디스에게 사진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사진 대신 질책의 편지를 받게 됐습니다. “그토록 제 얼굴이 보고 싶으신가요? 당신이 말해왔듯이 당신이 정말로 저를 사랑한다면 제 얼굴이 아름답던 그렇지 못하던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자신의 요청에 이런 반응을 보인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서 귀국하는 브라운은 주디스와 만날 약속을 했습니다. “런던 전철역 1번 출구에서 제 책을 들고 서 계세요. 저는 가슴에 빨간 장미꽃을 꽂고 나갈 거예요. 하지만 제가 먼저 당신을 아는 척 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이 먼저 저를 알아보고 만약 제가 당신의 연인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모른
1. 롯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서 하란을 떠났으나 풍요로워 보이는 요단 평야에 마음이 끌려서 아브라함을 떠났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창세기13:11). 그 결과로:1) 롯이 소돔과 고모라 지역 연합군과의 싸움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이 롯과 그의 권속들과 빼앗겼던 재물을 다 찾아 줬다(창세기14:16).2) 소돔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됐다(창세기19:26).3) 롯은 술에 취해 두 딸을 범하는 죄악을 범했다. “롯의 두 딸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임신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창세기19:36~38).2. 부자 청년“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태복음19:21~22).3. 가룟 유다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고 유월절 만찬 자리를 떠났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한복음13:30).4. 데마“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디모데후서4:1
사람은 때로 특별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 성경에서 그런 예를 찾아서 인물, 그들이 처한 특별한 위치와 본문을 정리해보았다. 구약성경1.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나무 열매를 먹은 후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기 3:8~10).2.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여” 바로왕의 궁중을 떠나 광야로 갔다(히브리서 11:25).3. 브나야는 용감한 장수로서 눈 오는 날 함정[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를 잡았다(사무엘하23:20).4.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사자 굴에 갇혔으나 두려워하지 않았다(다니엘 6:16).5.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서 다시스로 도망치다가 물고기 뱃속에 갇혔다(요나1:17). 신약성경1.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 위를 걸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마태복음 14:29).2. 바울은 다메섹에서 이레다 왕의 고관이 함정에 빠뜨려 잡으려 했으나 바울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다(고린도후서 32~33).3.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다(누가복음 19:4).4. 빌립은 복
다른 한편으로 마태가 1:1에 아브라함의 이름을 위치 시켰다는 것은 이방인 구원을 염두에 둔 서사적 전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방인으로 출생했고, 구약 성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이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12:3; 18:18). 아브라함의 이름이 예수의 족보에 차용된 것은 그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열국의 아비였음이 반영한 것이다. 마태복음 서사의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문구가 이방인 수용을 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치면서 이 돌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표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마 3:8~9). 히브리어에서 “돌” 와 “자녀”와 비슷한 단어로 돌이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자녀를 의미하는 은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돌은 영적인 자녀로 열방을 향한 선교를 지향하려는 마태공동체의 정체성으로 볼 수도 있다. 마태가 예수의 족보에 아브라함을 위치시킨 것은 예수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신학적 의도가 함축됐으며, 이것은 메시아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구원할 열국의 아비로서 모든 민족을 축복한 아브라함의 사역을 이어받을 상속자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결과
겨울이 오면 고등학교 시절 국어를 가르치시던 선생님 댁에 가서 유성기(留聲機)를 돌리면서 듣던 “겨울 나그네” 생각이 난다. 이 가곡(歌曲)은 독일의 시인 빌헬름 뮐러가 쓴 스물네 편의 연작시를 슈베르트가 작곡한 것이다.안타깝게도 시를 쓴 뮐러는 슈베르트가 그의 시를 작곡한 1827년에 33세의 나이로 죽었고, 슈베르트 역시 바로 그 이듬해인 1828년에 불과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과 작곡가는 죽었으나 그들이 남긴 시와 음악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으니 참으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하겠다. (히포크라테스)“겨울 나그네”는, 춥고 음산한 겨울을 정처 없이 떠도는 한 고독한 방랑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물 네 편의 시 중 다섯 번째 것이 일찍이 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려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보리수”이다. 4절로 구성된 시 중 1절은: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나는 그 그늘 아래 단 꿈을 꾸었네 가지에 희망의 말[들을] 새겨 놓고서기쁘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보리수나무는 석가모니가 그 아래에서 참선(參禪) 중에 도를 깨달았다 하여 유명해진 나무이기도 하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가신 마므레 상수리나무
기록에 의하면 1927년 종로에 ‘카카듀’와 ‘멕시코’ 다방이 문을 연 것이 우리나라 찻집의 효시라고 한다. 당시의 다방은 지식인과 문화 예술인의 집회 장소 역할을 하면서 “커피 끓이는 시대”를 열었다. 1950년, 한국동란에 참전한 미군과 유엔군이 인스턴트커피를 들여오면서 “커피 타는 시대”가 되더니, 1980년을 전후해서 다방이 커피숍과 카페로 탈바꿈 하면서 “커피 내리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다가 1999년에 스타박스 체인점이 서울에 들어오면서부터 “커피”는 모든 차(茶)의 대명사가 됐다.커피를 포함해서 두세 가지의 차가 없는 집이 없을 터인데도 커피숍이 성행하는 것은 사람들이 카페를 찾는 이유가 단순히 차 마시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어떤 글에서 그 이유를 ‘차 30, 분위기 풀러스 알파 70퍼센트’라고 쓴 일이 있다. 필자가 살고 있는 노은동(老隱洞) 집 둘레에만 다섯 곳의 커피숍이 있다. 그 중에는 언제나 주인이 자리를 지키며 고객을 맞이하는 곳이 있는가하면 주인이 없는 때가 더 많은 곳도 있다. 또 같은 커피를 마시는 데도 어떤 날은 머그잔에 주고 어떤 날은 찻잔에 부어주는가 하면 갈 때마다 맛과 향이 다른 경우도
필자는 요한복음에서 빈무덤 사건의 의미를 계속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그 다른 제자를 따라온 베드로의 행동을 묘사한다: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20:6~7).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라는 한글 번역은 저자가 이 문맥에서 중요하게 제시하고 있는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잘 반영하지 못한다. 여기서 ‘따르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요한복음서에서 제자직과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애용되었다. 베드로가 “그를 따라 왔다”는 말은 단순히 그가 그 다른 제자보다 달리기에 뒤져서 늦게 무덤에 도착했다는 것보다는 그 다른 제자에 대한 베드로의 의존성을 가리킬 수 있다.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는 이제 십자가 곁에서 신앙의 중심을 지킨 그 다른 제자를 따라가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존재의 결말에 관한 인식에 있어서 그 다른 제자를 따르고 있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신앙과 그 신앙의 체험에 있어서 베드로는 그 제자를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20:8; 21:7).베드로는 무덤에 도
추수감사절이 지나고 크리스마스 계절이 다가온다. 과거에는 성탄절이 가까워오면 교회와 거리와 상가에는 성탄을 알리는 트리와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루었고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선물과 축하를 주고받으며 잔치 분위기를 이루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탄절이 가까이와도 거리에 트리가 보이지 않고 교회에도 사람의 그림자가 없고 불빛마저 보이지 않는 곳이 많아졌다. 어린이와 학생들을 위한 성탄 전야 행사를 중단하는 교회가 많아지고 신자들도 성탄절을 잊은 것처럼 보인다. 한국보다 교세가 약한 나라들과 때로는 공산주의 국가에서조차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바로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을 내다 걸며 법석을 떠는데 기독교 선진국인 한국 교회가 잠잠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성탄절이 이렇게 잠잠해 진 데는 여러 가지 구실(口實)이 있겠지만 그 중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것 몇 가지가 있으니: 어떤 교파는 성탄절 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기념일을 인본주의의 산물이라면서 거부하고, 목회자들 가운데도 예수의 탄생 일시가 불확실한데 이교의 축제일인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 기념일의 사전적인 의미는 일어났던 일(사건) 자체를 기념하고 그
우리나라는 최근 삼사십 년 동안 경제와 과학기술에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고 선조들의 문화유산도 비교적 잘 지켜내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 같다. 그런데 여전히 미진한 것은 공중도덕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갈 때마다 불쾌하고 어이없는 일을 당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 같다.필자의 느낌으로는 유쾌하고 마음 편한 모임은 교회뿐인 것 같다. 공중도덕 면에서 교회와 사회가 이렇게 엇갈려 나가는 것은 신자들의 높은 도덕의식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공화국에 안주하고 있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멀리 혹은 가까이, 집을 나갈 때마다 느끼는 불편함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본다. 버스나 비행기가 종착역에 도착해서 모두 내릴 때는 앞자리에 앉은 이들부터 내리는 것이 당연한 순서임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우루루 일어나 먼저 앞으로 나간다. 외국인들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안 내리세요”하며 거두어서(?) 내린다.백화점이나 호텔 등 왕래가 빈번한 곳에서 문을 열고 나가려하면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할 것 없이 문 열고 서 있는 사람을 제치고 앞서 나가버린다. 무례하고 몰염치한 행위이지만, 생각해보면
필자는 지난 호부터 요한복음에서 제시된 부활현현의 체험과 그 속에 담긴 부활신학을 살펴보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도 부활현현 사건은 예수의 시신을 놓아두었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빈무덤 사건으로 시작한다. 요한은 공관복음서 저자들과는 달리 여성 제자 막달라 마리아가 홀로 무덤을 방문하고 그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 후에 막달라 마리아는 두 제자에게 달려가서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을 말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20:2). 그녀가 ‘달려갔다’는 말은 직접 표현되지는 않은 그녀의 놀라는 감정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마태는 그 무덤을 방문했던 여자들이 예수의 부활에 관한 천사의 말을 듣고는 두려움과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말하기 위하여 ‘달려갔다’고 말한다(마 28:8). 그러나, 요한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한 상황에서 돌이 치워진 것을 발견한 그녀의 감정은 놀라움과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바로 찾아간 사람들은 시몬 베드로와 예수가 사랑하신 그 제자였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후에 여기서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