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목회자에게 들은 이야기다. 자신이 목사가 된 것을 후회할 때가 있다고 말하면서 다음 세 가지를 거론했다. 첫째, 각종 금융기관에 의해 대출거절을 당할 때라고 했다. 돈 빌려 주겠다고 전화질해대는 영업사원들도 ‘목사’라는 말 한 마디면 일언반구 대꾸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린다.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금융기관에서 저리의 신용대출을 받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둘째, 목회자들을 깔아뭉개면서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불신자 동창들을 만날 때라고 했다. 각종 동창회 모임이나 SNS를 통해서 전도라도 할 낌새가 보이면 고의적으로 싸움을 걸어 모임에서 축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막말을 해도 목사라는 직함 때문에 제대로 방어하지 못할 것이라는 약점을 쥐고 공격해대는 인간들이 한 둘이 아니다. 셋째, 시도 때도 없이 자기 기분대로 버럭질하는 지방회 동료들을 대할 때라고 했다. 대부분 지방회 목사들은 같은 신학교 동문들이라 편하게 말들을 내뱉곤 한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서 평균이상의 교양인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목회자들의 입에서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말들이 쏟아질 때가 있다. 목회자로서의 자부심이 여지없이 무너져 자괴감으로 급변
경기제일교회는 이웃교회와 함께 성장하는 나눔 성장을 하고 있다. 목회자가 할 수 있을 만큼에서 하고, 지역 미자립 교회 목사님들에게 교회 프로그램과 훈련을 나누고 전도와 목회를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목회자 부부의 행복을 들고 있다. 교회가 행복할 때에 사람들이 모여 들고, 그 중심에 목회자의 행복이 있다. 교회는 목사만큼 행복하다. 교회의 ‘가정행복세미나’는 목회자 부부의 행복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으며 목회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목회자 부부가 화목해야 한다. 목회는 마음만 가지고 안 되며,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문제가 있을 때에 영적 능력으로 반드시 돌파하고, 문제해결의 능력이 기도와 말씀에서 온다. 목회의 핵심은 한 시간도 은혜 없는 시간,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는 시간이 되어서 안 된다. 설교를 연구하고, 성도들이 들을 수 있는 설교를 하고, 설교 시간을 기대하고 달려 올 설교를 해야 한다. 너무 중요하다. 그리고 확고한 신학을 정립하고 가르쳐야 한다. 바른 신학이 있어야 사이비 이단을 대처할 수 있고 능력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 3. 대전B교회.대전반석교회는 교회개척을 시작하면서 분명한 목회관과 세부 실행지침을 가지고 사역하고 있다. 목회
교회가 사회를 외면하면 사회도 교회를 외면한다. 작금의 시대양상이 바로 이런 형국이다. 왜 기독교와 교회가 무시를 당하고 욕을 먹고 있는가?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사회공공적인 역할과 책임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공적인 목회(public ministry)에 대한 강조가 요구된다. 공적인 목회란 교회가 자신의 인근 지역사회의 현실에 민감함으로 지역 사회의 특성과 필요를 이해하고 채워주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 실천함을 통해 보다 잘 섬김으로 복음 전도의 기회를 확장하고자 하는 접근을 의미한다. 사회봉사는 예수님의 핵심 사역이었고 초대교회도 계승한 목회방식이었다. 한국교회도 선교 초기부터 사회봉사를 중요시하여 학교, 병원, 구제기관 등을 통해 필요를 가진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섬겼다.물론 교회가 사회 구조 개선이나 인간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일차적이고 우선적인 관심과 목표는 영혼구원과 하나님 나라 구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예수님의 사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에 맞춰져 있었다. 교회는 교회가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어 보여주는
특정 교파나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단대책위원회(한기총이대위)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된 단체(교회) 가운데서 과거 소속 교단이나 한기총에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회개하고 자신들의 신앙과 신학을 검증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랜 기간 살펴본 바, 그런 개인이나 단체는 대게 다음과 같은 유형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그들은 대부분 복음전파에 열정적이어서 교회가 급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신자들의 수평이동 등으로 이웃교회들에게 직간접적 피해를 준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또한, 성경에도 없고 복음전도에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은 주제를 상상력을 동원해서 독자적으로 해석해서 가르치거나 성서계시와 섭리를 혼동 하며, 미완성 신학이론을 성급하게 책으로 펴낸다. 덧붙여서, 그들 중 일부는 소속 교단이 없거나 교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의무를 소홀히 하고 동역자 간의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자신들의 과오가 크다 하겠다. 신학검증신학 검증은, 특정 단체를 이단으로 규정한 교단에서 검증 신청자를 조사 심의해서 한기총에 통고하고 한기총이대위가 이를 확인 검증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이단으로 고발 또는 규정된 후에 소속 교단에 신학 검증을 요청해
어느 누가 ‘세월’이 제일 좋은 ‘약’일 거라 했는가? 가는 ‘세월’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세월’ 앞에는 그 누구도 장사 없을 거라 했던가? 작금의 우리나라는 그 모든 말들이 다 우리의 게으른 생각과 준비의 부족만을 덮으려 함이었을 뿐, 진리는 아니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세월’이 ‘약’이란 말만 해도 그렇다. 아무리 억울하고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세월’만 가면 다 해결될 것이고, 흘러간 그 ‘세월’이 그 고통을 다 잊게 해 줄 거라 했지만 어디 지금 그런가? 그 ‘세월’만 믿고 아무런 준비 없이 그 소중한 생명들을 그냥 보낸 ‘세월’을 생각하면 더 화가 치미는 것을. 그로 인해 일상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음식은커녕 잠조차 청할 수 없는 이들이 아직도 이렇게 많은 것을. 그러니 ‘설마 괜찮겠지’ 하면서 그 소중한 생명들을 무작정 태워 보내기만 한 ‘세월’은 절대로 ‘약’이 아니라 이 나라 전체를 위협하는 ‘독’이었던 것이다. “‘세월’ 앞에선 누구도 장사 없다”는 말 역시 그렇다. 미리미리 점검하지 못한 나태함과 ‘세월’을 책임진 이들의 무책임함이 침몰한 ‘세월’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더 힘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 절대 그 ‘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에서 성숙기에 들어왔고, 다른 말로 표현하면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다.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는 새신자가 늘지 않고 기성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기 때문이다. 교회성장의 정체기에는 교회적인 요인이 교회성장의 중요한 동력이 되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교회자체가 기성교인들이 떠나는 이유를 파악하고 대처해야 한다. 사실상 지금까지 교회를 떠나간 사람은 약 1,000만 명 이상일 것으로 조사되는데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의미의 문제’인데 교회를 계속 다닐 이유를 찾지 못하면 교회를 더나간다. 그래서 강단의 설교 메시지가 특별히 중요하다. 둘째는 ‘소속감의 문제’인데 교회에서 내가 소외되고 있다고 느끼면 교회를 떠나간다. 그러므로 ‘공동체적 돌봄’의 목회가 필요하다. 셋째는 ‘개인적 세속화’인데 세상일과 재미에 빠져들면 교회를 떠나간다. 그래서 적절한 교회의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하는 것이다. 넷째는 ‘제도적 세속화의 문제’인데 이것은 교회제도의 부조리나 부도덕성과 관계가 있다. 이렇게 되면 교회와 지도자를 신뢰하지 않고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게 된다. 신뢰는 개인과 조직의 성공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회복에 중요한 핵심 요소가 된다.한국교회는
21세기는 세속적이며 다원화 된 사회이고 절대 진리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던적인 사고가 팽배하고 있다. 이런 풍조 속에서 교회와 목회자는 어떤 목회를 펼쳐야 할까? 21세기에 유효할 목회적 강조점을 몇 가지 제시하고자 한다. 그 첫째로 성경적인 목회를 꼽는다. 포스트모던 사상의 특장은 다원주의이다. 유일한 진리나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결과 포용적인 사상이 환영을 받는다. 불교와 가톨릭이 서로를 인정하고 용납하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 큰 이유가 아마 이런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유일하다. 진리의 길은 다양한 것이 아니다. 구원의 길은 유일하며, 영생의 길 또한 오직 하나이다. 영원한 진리는 오직 성경에서 발견된다.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다. 기독교의 교리와 행습은 모두 성경에 기초하여 세워진다. 기독교에서 가장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어떤 사안이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이다. 기독교인 개인과 교회가 말하고 행동하는 바가 성경의 교훈과 성경에 제시하는 원리에 입각하여 위배됨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경적인 목회를 펼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목회자는 먼저 성경의 권위와 성경의
누가는 부활현현의 마지막 사건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약속(예언)의 성취와 사도들에게 주는 대위임의 말씀을 전달한다. 누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기로된 것들은 다 반드시 성취돼야 한다는 필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부각시킨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이렇게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것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는 것이며 둘째는 그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제 삼일에 부활하는 것이며 셋째는 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것이다. 누가는 복음 전파가 이렇게 반드시 성취돼야 하는 하나님의 필연적인 구원의 역사로 제시한다.‘전파하다’(khru,ssw)라는 동사는 사도의 임무 곧 보냄을 받는 자가 보낸 자에게서 위임받은 것을 보낸 자의 권위로 선포하는 혹은 전파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 동사는 마가와 마태가 예수의 선포 사역과 관련해 집중적으로 사용했다. 반면에 누가는 이 동사를 “기쁜 소식을 전하다”(euvaggeli,zomai)라는 동사와 함께 병행해 사용했다(눅 4:18~19; 8:1). 마가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을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khru,
구미(歐美), 특히 유럽 신학은, 대부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버린 지 오래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단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유랑생활 과정에서 형성된 종교적 문서에 불과하다. 한국 신학계 일각에서도 한 때, “이제 교의학의 시대는 지나고 행위의 시대가 도래 했다”는, 근본 보다 방편을 중시하는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 신학적 커밍아웃이러한 풍조와 병행해서, 한 때 우리 신학계에는 주일 아침에 교회가 아닌 사찰의 대웅전에 서 예불을 하는 교수가 있었는가 하면 신학자들의 연례 세미나에서 “이제 하나님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하고 공공연히 자신의 “신학적 커밍아웃”을 선포한 교수도 있었다.필자는 그들의 신학이나 행위를 성토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우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응 태도를 짚어보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리한 “이단 감별 기준” 대로라면 그런 신학자들이 제일 먼저 신학을 검증받고 이단 사이비로 고발돼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교회지도자들만이 그들의 신학에 문제를 제기했을 뿐 한국교회와 이단 연구가들은 대부분 이 문제를 외면했다. 뿐만 아니라 복음적인 기독교 교파와 종교 단체에서 조차 다투어 커밍아웃 인사들을
암몬왕 하눈의 객기와 도발의 댓가로 다윗의 응징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측한 암몬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군사력을 보완하기 위해서 용병을 동원했다. 아람군대 이만 명, 마아가왕의 군대 천 명, 돕의 군대 만이천 명 등 총 삼만 삼천 명의 군사들을 동원해 선제공격에 나섰다. 아람이 이스라엘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서 용병을 모집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맹장 요압과 아비새를 파견했다. 요압은 정예 병사들을 엄선해 자신이 직접 지휘할 병사들과 아비새가 지휘할 병사들로 분리한 뒤, 아비새에게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사무엘하10:11)” 하는 동지애와 조국애와 야훼신앙으로 충만한 출사표의 노래였다.첫 번째로, 요압은 동지애를 강조한다. 무슨 싸움이든 독불장군은 승률이 떨어진다. 마음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나 동지가 있을 때 승리의 가능성은 커진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성공을 말할 때 개혁의 동지로서의 프리드리히 3세를
작은 교회 목회자는 강단을 비우지 말아야 한다(딤후 2:15). 목회자가 하나님과 교인과의 약속은 강단을 지키는 일이다. 목사는 강단에서 죽고 살아야 한다. 성도는 영적 양식을 먹는 지도자를 따른다. 작은 교회 목회자는 심방을 수시로 해야 한다(고후 11:29). 예수님이 먼저 찾아 오셨다. 심방시에 목회자는 심방 갈 가정의 모든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여 가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사람은 이름을 기억하는 목회자에게 마음을 연다. 목회자는 수첩을 준비해, 할머니와 손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작은 교회 목회자는 영성생활에서 성령운동과 기도운동을 해야 한다(엡 4:3). 성도들 모두가 성령충만을 사모하고 입을 벌려 외치게 하고, 교회에서 기도할 때에도 합심해 열심히 기도하게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작은 교회에 특징이 있게 해야 한다. 작은 교회는 교육하는데 힘써야 한다. 장기 계획을 가지고 삶이 변화하게 해야 한다. 새신자가 6개월 교회에 다녔으면 말이 변하고 생활이 변하고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교인이 돼야 한다. 명절 교육뿐만 아니라 가정이 행복하도록 꾸준히 제자훈련을 시켜야 한다. 작은 교회는 성경중심의 설교를 해야 한다(딤후 3:10)
기본적으로 목회자는 교회의 사명을 성취하도록 이끌어가는 역할을 한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양떼인 교회를 인도하시는 목자로서 큰 목자, 목자장으로 불리신다. 목자장이신 주 예수님은 목동들을 불러 목자의 역할을 맡기신다. 혹자는 목회자를 목자를 돕는 목견(목장의 개)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좀 지나친 표현이다. 작은 목자인 목회자는 양들이 각자의 본분을 다하도록 챙겨줘야 한다. 교회성장학자인 슐츠(Schultz)는 목회자를 완성자(completer)라고 했다. 완성자란 교회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피면서 부족한 부분이 발견될 때 그 부족함을 채우는 사람이란 뜻이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신앙 상태를 살피고, 주어진 은사를 따라 제대로 사역을 하는지를 살피고, 교회의 여러 사역들이 균형있게 성취되고 있는지 등을 살펴야 한다. 교회는 교회의 예배, 교육과 신앙훈련, 친교 등 고유한 내적 사역과 지역사회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봉사와 섬김의 사역 그리고 전도대상자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사역, 악한 자들과의 영적 전쟁 사역, 세계 선교를 위한 사역 등 다양한 사역을 펼쳐야 한다. 이를 위하여 인적 자원을 개발하고 재정을 확보하는 등 가
1) 역사적으로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사람들(1) 영국 신부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84)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는 죄목으로 그의 사후인 1415년 콘스탄스 종교회의에서 “교회의 적, 이단의 우상” 등의 죄목으로 화형선고를 받았고, 틴들(William Tyndale, 1484?~1536)은 성경을 번역하고 인쇄했다는 죄목으로 1536년 런던에서 화형당했다.(2) 보헤미아의 후스(John Hus, 1373~1415)는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고, 위클리프를 변호하다가 이단으로 처형됐다. 그의 뒤를 이어 루터와 칼빈과 훼브마이어 등의 개혁자들도 이단으로 선고받고 평생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쫓기는 삶을 살았다.(3)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했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됐다. (4) 바울은,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로 고발되어 결국 로마 옥에서 처형됐고, (5)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다는 신성모독 죄로 유대교의 이단자가 됐다. 검토한 바, 로마교회가 만든 이단은 개혁자요, 진리수호의 맹장들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번
한국교회는 통일교와 전도관 운동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고, 구원파와 근래의 신천지 이단 등으로 “이단”이라는 두 글자를 듣기만 해도 몸서리를 치게 됐다. 한번은 필자가 기차를 타고 가면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두 목사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김 아무개가 이단이래.” “왜?”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데.” “그래? 그럼 이단이네.”한국교회에서는 흔히 확인도 검증도 없이 단지 “그렇다고 하더라”는 몇 마디 말로 무고한 사람이 이단으로 낙인찍힌다. 필자는 교단으로부터 교리 교사로 위임받은 사람으로서, “이단”이란 말을 할 때는 최소한 아래와 같은 요건을 생각하며 신중을 기하기를 권면하는 바이다.첫째로, 삼위일체 구원론 등 성경의 핵심 교리를 왜곡 해석하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단체.둘째로, 그릇된 종말론을 내세우면서 자신을 구세주 또는 재림주라고 주장하고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혹세무민(惑世誣民) 하여 개인의 직장. 가정생활, 교우관계를 포함하여 사회생활을 파괴하는 단체.셋째로, 끝까지 자신의 교리적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지신들을 비판하는 이에 대해서는 조직화된 단체의 힘을 빌려 SNS나 언론매체에 공개적으로 비방하고 고소 고발로 위협하며, 맹목적으로 기성교회를 비판하
도대체 뭘까? Eliot의 작품 황무지(Waste Land)에서 표현한 ‘잔인한 4월’ 담긴 진정한 의미는? 정말 이런 저런 좋지 않은 소식들이 그의 경험상 4월에 유독 많아서였을까? 그래서 4월만 되면 그 막연한 불안이 다시 돋아나서였을까? 정말 그렇다면 이 4월은 괜히 주는 거 없이 기분 나쁜 달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잔인한 4월’의 진정한 의미는 그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역설(逆說)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4월의 생명력은 정말 잔인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뜻이다. 누구도 막지 못한다는 뜻이다. 실패도, 절망도, 죽음도…. 그러므로 이는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린 ‘삶속의 죽음’(Death in life)을 벗고, 동토를 뚫는 대지의 생명력을 본받아 다시 일어나고, 다시 기운내고, 다시 희망을 만들어가자”는 희망의 외침이다. 그래서 Eliot은 아마도 이 작품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영국 런던의 시민들이 더 이상의 재기를 꿈꾸지 못하고 마치 죽은 시체처럼 꿈틀거릴 엄두조차 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강력히 도전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 육체적으로 숨을 쉰다 해서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