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독일 30년 전쟁이 끝을 맺었다. 총소리와 대포소리는 멈추었지만 전쟁이 남기고 간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도시는 폐허가 되어있었다. 사람들에겐 당장 살아갈 곳조차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전쟁이 남긴 가장 큰 상처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친구들과 가족들의 죽음이었다. 1,600만 명이던 인구는 절반 이상이 사망하고 600만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흑사병으로 고통을 당하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려 죽어갔다. 아버지의 목회를 돕다가 루터교 목사가 된 베냐민 슈몰크(Benjamin Schmolck)는 전쟁 이후의 사역으로 가장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슈몰크 목사 부부는 눈을 뜨자마자 성도들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들의 상한 몸과 마음을 달래는 것이 시급했다. 32세 된 젊은 슈몰크 목사는 아내와 함께 그날따라 조금 먼 곳으로 심방을 나갔다. 그들의 방문은 상처 입은 교인들에게 큰 위로가 됐다. 여러 곳을 들르고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저기 멀리 집이 보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연기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설마하며 재빨리 집으로 뛰어가 봤다. 사택은 이미 홀랑 타
칼 보버그(Carl Boberg)는 배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소개로 여러 해 동안 선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중 19세에 주님을 영접하고 갑자기 사역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신학공부를 마친 그는 고향에서 문서전도 활동을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주간지 ‘진리의 증인’(Witness of the Truth)의 편집자로 글을 썼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수년간 스웨덴의회 상원의원으로도 일했다. 보버그는 많은 찬송을 썼고 후에 ‘스웨덴 복음전도 언약교회’의 찬송집을 편집하기도 했다. 보버그 목사가 26세에 스웨덴 남동부 해안의 시골을 방문했을 때였다. 갑작스런 천둥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 내렸다. 그리고 비가 갠 뒤의 풍경은 헤아릴 수 없이 아름다웠다. 숲속의 새들이 크고 작게 지저귀는 노래가 천상의 피리 소리처럼 메아리쳐 울렸다. 발 앞에 놓인 옥색 강물이 바람 따라 퍼지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듯 했다. 우주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듯 보버그 목사는 소리쳤다. 이렇게 경이롭고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터져 나온 탄성이 바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이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
기억을 추억으로 고이 접어 마음 깊이 넣어두며 다시 한 번 시간과의 이별을 하는 시기가 왔다. 2017년의 마지막 달력을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경험은 이맘때쯤이면 누구나 한번 쯤 하게 되는 연중행사 같은 것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정말 다사다난했던 한해였다. 한반도는 그 어느 때보다 격동의 시기를 지나왔고 급기야 땅마저 요동치며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일도 겪으며 그 상처가 치유되기도 전에 시간은 야속하게 우리를 떠나려고 한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그리 큰 지진이 아니라고 하는 강도에도 유리가 깨어지고 땅이 갈라지는 모습에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연약함을 다시 깨달으며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무엇이 중요한가?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안지를 마련하는 것이 송년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우리들의 과제인 듯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데 온 정신과 관심을 쏟아온 것 같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되어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으로 동의하지 않고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자신의 목적과 이익
주 예수 이름 높이어(새36/통36) 작사: 에드워드 페로넷 (Edward Perronet, 1726~1792) 편집: 존 립폰(John Rippon, 1751~1836) 작곡: 올리버 홀든 (Oliver Holden, 1765?1844) 아마추어 작곡가 올리버 홀든(Oliver Holden)은 목수였다. 그는 일을 하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가 떠오르면 잠시 톱을 내려놓고 악보에 적어 놓았다. 홀든은 전문적인 음악수업을 받지 않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멜로디를 만들었다. 하루는 홀든이 공장에 나타나질 않았다. 궁금히 여긴 친구들이 홀든을 찾아갔을 때, 그는 집안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날 홀든은 출근도 하지 않고 마음에 가지고 있던 노래를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오선지에 적고 있었던 것이다. 28세가 되던 해 홀든은 목수 일을 그만두고 부동산 중개업에 뛰어들었다. 입법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나중엔 악기 상점을 차렸다. 손을 대는 사업마다 번창했지만 홀든은 어려서부터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아메리칸 하모니̓(1793)를 비롯해 여러 권의 찬송가책을 출판
사계절이 비교적 뚜렷한 기후를 가진 것은 우리가 누리는 축복 중 하나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변화하는 자연을 보며 그에 맞는 일들을 하며 살 수 있는 것은 분명 삶 속에서 또 다른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임에 틀림없는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도 당연히 여기고 감사를 잊고 살아간다. 특히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기도 해서 햅쌀이며 과일이며 풍성한 먹을거리가 있고 높고 파란 하늘 아래 갖가지 빛깔로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은 나무들을 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그뿐이랴? 그렇게 예뻤던 단풍이 낙엽이 되어 떨어져있는 거리조차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계절이 가을이다. 이런 다양한 축복을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고스란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은혜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절 또한 가을이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더 많은 생각을 더 깊게 하게 되는 것 같다. 올 가을도 어김없이 우리에게 찾아왔고 또 넘치는 혜택을 남기고 떠나가고 있다. 고마운 가을을 보내 주는데는 쇼팽의 음악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19세기 혼란한 폴란드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오로지 피아노를 위한 음악만을 작곡한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 18
샘물과 같은 보혈은(새258/통190) 작사: 윌리엄 쿠퍼 (William Cowper, 1731-1800) 원곡: 미국 전통 민요 편곡: 로웰 메이슨 (Lowell Mason, 1792-1872) 윌리엄 쿠퍼(William Cowper)는 영국의 그레이트 버크햄스테드(Great Berkhamstead)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직자였고 어머니는 왕족 출신이었다. 쿠퍼는 허약한 몸과 소심한 성격 탓에 사회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법률을 공부했지만 심한 우울증과 무대 공포증이 있어서 법정에는 한 번도 서보질 못했다. 6살 때 엄마가 돌아가신 것이 그에게 큰 상처로 남아있었다. 약한 체질로 인해 육체의 고통이 심했고 우울증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괴로웠다. 그의 삶은 바람 잘날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영적으로 연약해진 쿠퍼는 이렇게 못난 자신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넘겨짚었다. 공포에 빠진 그는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끝내는 네 번이나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하지만 이같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가 성경을 놓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어느 날 성경을 뒤적이고 있을 때 사도 바울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사람이 죄를
너무도 괴로워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짓눌려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요? 도대체 어찌해야 하냐고요!” 그녀는 심방을 온 목사님을 향해 계속 울부짖었다. “당신의 모든 시험과 무거운 짐을 우리 주 예수님께 아뢰세요.” 그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엘리샤 호프만(Elisha Hoffman) 목사는 설교를 준비하고 있지 않을 때는 가난한 자를 섬기며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했다. 정이 많은 그는 설교를 유창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섬김에 뛰어난 훌륭한 사역자였다. 호프만 목사가 펜실베이니아 레바논 지방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그의 고향 마을인 오윅스버그(Orwigsburg)에 사는 한 성도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슬픔이 극에 달한 여인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는 말씀으로 위로했다. 하지만 그 여인의 울부짖음은 그칠 줄 몰랐다. 여인은 호프만 목사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어찌해야 하나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하며 소리쳤다. 그 때 호프만 목사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말했다. “성도
올해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연초부터 각종 세미나를 비롯한 많은 기념행사들이 계속되어왔고 10월에는 더 많은 행사들이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황의 면죄부 판매 등 기존 가톨릭교회에 대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며 교황을 비판했는데 당시 교회의 절대 권력이었던 교황과 그 교황이 행하는 교회의 전통을 비판하는 것은 목숨을 내건 도전이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루터에게는 교황보다 더 큰 권위의 하나님의 말씀이 더 절대적인 권위였고 이것에 대한 확신이 그에게 용기 있는 도전을 감행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어마어마한 위대한 일이 확신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그 믿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절대적 신앙이 루터를 죽음조차 두렵지 않는 투사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변함없다. 그런 믿음의 사람만이 세상을 바꾸고 개혁할 수 있다. 진정한 개혁은 진실된 신앙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개혁을 외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던진다고 말한다
티모시 드와이트(Timothy Dwight)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있었다. 우연하게 둘은 모두 미국인 목사였고 둘 다 예일대학의 총장을 지냈다. 그 중 한 드와이트는 1795년부터 1817년까지 총장을 맡았고, 다른 드와이트는 1886년부터 1898년까지 총장을 맡아 예일대학을 단과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 성장시켰다. 먼저 총장을 지낸 드와이트 총장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강단에 오를 때마다 한 손에 성경을 들고 갔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영적부흥을 위해 정기적으로 대학부흥회를 열어 학생들의 영성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드와이트는 어려서 천연두를 앓은 데다 이른 새벽마다 촛불을 켜놓고 무리하게 공부한 나머지 시력이 악화되어 30분도 계속해서 책을 읽을 수 없게 됐다. 심각한 시력 장애가 있었지만 그의 다재다능한 활동을 멈추게 할 순 없었다. 드와이트는 이렇게 바쁜 중에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찬송가책을 발행했다. 예일대학 총장이 되자마자 찬송작업을 시작해 1797년에는 와츠의 ‘시와 찬송’을 재편집해 미국교회가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믿음이 돈독했던 드와이트 총장은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예수님의 피값으로 사신 교
만세 반석 열리니(새494/통188) 작사 : 어거스터스 톱레이디 (Augustus M. Toplady, 1740-1778) 작곡 : 토마스 헤이스팅스 (Thomas Hastings, 1784-1872) 지금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싸움에 큰 관심을 갖지 않지만 예전에는 그 논쟁이 무척 심했다. 칼빈주의를 주장한 톱레이디(Augustus Toplady)와 알미니안주의를 주장한 존 웨슬리(John Wesley)의 논쟁은 격렬했다. 그들은 설교나 저술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폈고 각자의 입장을 강하게 반영하는 찬송을 썼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주셔서 사람은 의지에 의해 구원을 선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고 믿었다. 톱레이디는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구원을 선택하지 못할 만큼 타락했으며, 구원의 대상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런던 소재 프랑스인 교회를 맡고 있던 톱레이디 목사는 ‘가스펠 매거진’(The Gospel Magazine)의 편집인이었다. 톱레이디 목사는 1776년 3월호에 영적 개선과 국가 부채에 대한 기사를 썼다. 엄격한 칼빈주의자인 톱레이디는 웨슬리가
사람의 몸에서 열이 나면 건강 상태가 안 좋다는 첫 번째 신호라는 것은 보편적인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몸에서 일어나는 생존을 위한 씨름으로 인한 열감이라는 의미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지구가 뜨거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지구가 병들어 가고 있다는 뜻이고 이에 대한 환경연구가들의 경고는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6월이면 늘 장마로 많은 비가 내렸던 한반도에 언제부터인가 마른장마라는 말이 생기더니 올해는 아예 극심한 가뭄으로 급수를 제한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과학이 발전하고 인공지능으로 많은 것들이 자동화되면서 이제 제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비한방울도 마음대로 오게 할 수 없음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를 제대로 깨닫게 해 주는 여름이다. 피조물의 한계와 약함을 가진 존재들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루는 공동체마다 아집과 사욕으로 가득함을 바라볼 때마다 그 모습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오죽하시겠나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로 포장하지만 속내는 철저히 진영논리에 의한 이분법적인 사고에 젖어 있다. 진실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편법과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조선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침범함으로써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삽시간에 온 나라가 혼란에 빠져버렸다.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 시작했다. 피난민들은 한반도의 최남단인 부산에 가장 많이 모여들었다. 고향에서 겨우 몸만 빠져나온 피난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전쟁의 상처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불구덩이 속에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것 같았다. 이제 그들은 삶을 포기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성도들조차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심지어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그런 고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를 구하며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신앙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새벽마다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매달렸다. 피폐해진 환경과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믿는 자들이 잠시뿐인 고통으로 인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다가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1952년 울산중학교 국어교사였던 26세의 젊은 석진영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가지고 펜을 들었다. 그녀의 글은 절망가운데 빠져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
1858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부흥운동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많은 시민들이 이 부흥운동에 동참했다. 예배당뿐만 아니라 호텔에서 또 극장에서까지 밤낮으로 집회가 열렸다. 곧이어 다른 지역의 사역자들과 평신도들도 모여들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급기야 북미대륙을 반세기동안 뒤흔든 부흥운동의 불씨가 됐다. 이 운동의 중심엔 29세의 젊은 설교자 더들리 팅(Dudley Tyng) 목사가 있었다. 그보다 더 뜨겁게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그가 필라델피아의 “제인 홀”(Jayne’s Hall)에서 YMCA 기도회를 인도할 때, 50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석했다. 그리고 그의 설교가 끝나고 적어도 1000명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헌신을 다짐했다. 며칠 후, 팅 목사는 말씀을 읽다가 바람을 쐬려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가까운 농장을 걷다가 곳간에서 옥수수 껍질을 벗기는 기계를 돌리고 있는 노새를 보게 됐다. 그 광경에 흥미를 느낀 그는 가까이 다가가 노새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 순간, 코트 소매가 톱니바퀴 사이로 끌려들어갔다. 그는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한쪽 팔이 잘려나간 그는 이미 너무 많
문명의 발달은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질병을 극복하게 하며 일상의 많은 부분의 속도를 빠르게 만들었다. 편안함과 안락함, 육체와 정신의 풍요로움은 문명사회가 주는 큰 혜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과연 편리함과 풍족함이 삶의 질까지 높여주었을까? 혹은 풍요로움은 곧 행복이며 정신적인 평안까지 책임지고 있는 것인가? 현대에 일어나는 많은 현상들을 보며 꼭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가정은 붕괴되고 개인의 내면은 피폐되어 자살율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공동체마다 불신이 깊어 갈등은 계속되는 현상들을 볼 때 우리는 가장 풍요로운 문명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가장 삭막하고 팍팍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 불편해도 마음을 합하여 극복하고 조금 가난해도 정으로 이겨내었던 아날로그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도 바로 이런 사회적 현상을 보는 안타까움에서 생겨난 듯하다. 삶의 편리성은 높아져도 삶의 질은 오히려 낮아지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이 시대에 진정한 스승의 부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말은 우리 시대에 올바른 스승이 없어서라는 의미라기보다 스승을 스승으로 대하지 못하는 굳어진 마음들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시온성과 같은 교회(새210/통245) 작사 :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 작곡 : 프란츠 조셉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 장군은 37세였다. 키는 180센티미터가 넘었고 체격은 우람했다. 길게 기른 수염과 밤색 머리카락은 언제나 빗질이 되어있지 않았다. 군화는 낡았고 챙이 처진 모자에 빛바랜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전쟁터에선 겁이 없었지만 대표 기도를 할 땐 무대 공포증에 찌든 사람처럼 기어들어가는 가냘픈 소리로 기도했다. 하지만 늘 혼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본 그의 부하들은 “장군님은 전투 중이 아니면 기도 중이시죠”라고 할 만큼 장군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감사기도를 하지 않고서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을 정도로 그의 신앙생활은 철저했다. 주일에는 편지 한 통을 읽지도 쓰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가 자연과학, 군사전술학을 가르친 미국 버지니아 렉싱턴에 있는 “버지니아 군사학교”의 강의실에서 그는 신자들과 함께 기도회를 열었다. 또한 흑인 어린이들도 주일학교를 마음대로 갈 수 있도록 “흑인침례주일학교”를 세우고 지속적으로 운영비를 지불했다. 장군은 전투에 나가 있거나 기도를 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