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장들은 믿음의 조상들이다. 공동체의 좋은 전통은 공동체를 강하고 힘 있게 만들어준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유전들은 공동체의 활력을 저해하고 과거지향적으로 만들어 앞으로 나가는 것을 멈칫거리게 한다. 그러나 본질에 충실한 행습은 계승되고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유산이다. 그런 면에서 족장들의 믿음은 모든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목회 지도자들에게 좋은 규범이 된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적이 무조건 바람직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좋은 면은 발견하여 되살린다면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창세기 12-50장에 걸쳐 기록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라고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들 중에서 이 번호에서는 우선 아브라함에 대해 살펴보자. 아브라함의 생애는 하나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과 순종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는 항상 “제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 하는 자세로 살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복의 자세를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순종했다. 그의 진정한 생애는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서부터이다.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여호와의 말씀의 좇아 고향을 떠난 것은 나그네가 아니
필자가 신학대학원 강의를 맡고 있을 때 졸업을 앞둔 한 제자가 교회를 개척했다면서 한 번 방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어느 주일 날 나는 예고 없이 그 교회를 방문했다. 그런데 예배 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교회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전도사 부부가 주보나 전도지를 가지고 길에 나간 것으로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 후에 강대상 뒤쪽 방문이 열리더니 전도사가 눈을 비비며 나오는 것이 아닌가. 말인즉, “아직 신자가 없어서요.”그 무렵부터, 나는 목회학이나 개척론이 학문적으로 지적하지 않는 것 중에서 개척하는 목회자에게 필요한 마음가짐 또는 요건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왔다. 오늘 매우 상식적인 수칙 몇 가지를 제시하는 바이다:1) 개척하면 바로 자기소개가 포함된 인사말을 인쇄해서 교회 인근 주민들에게 배부해야 한다. 직접 전달이 여의치 못할 경우 우편함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2) 후속적으로, 교회 약도와 예배 안내가 포함된 전도지를 제작해서 꾸준히 배포하면서 전도해야한다. 가만히 앉아서 신자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통발목회”로 사역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낚싯대든 그물이든 고기 잡을 도구를 챙겨서 “갈 가와 산울 가로” 나가
2. 공동체를 통한 치유의 과정치유공동체는 구성원 각자의 고통과 상처의 의미를 재정의하며 동시에 기존 공동체 구성원과의 동일시를 통하여 공동체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즉 치유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통하여 각자는 이제까지 부정적으로 간주되었던 자신의 삶의 경험들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여 재해석할 수 있다. 또한 치유공동체는 개인들로 하여금 고착된 부정적(병적인) 자기 역할을 벗어나 자신이 진정 원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렇게 될 때, 상처 입은 구성원은 치유자로서의 역할까지도 담당할 수 있게 된다. 치유공동체는 이전에는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던 개인의 행동이나 태도를 공동체 내에의 규범과 신앙체계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낙인찍혔던 행동이나 태도의 의미를 긍정적이고도 새롭게 인식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공동체 내에서의 치유의 과정을 단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입 또는 참가의 단계이다. 문제를 지닌 개인은 치유공동체에 구성원이 되어 공동체 내에서의 규범을 받아들이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에 적응한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힘은 그 개인은 더 이상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자신이 치유의 주체로서 책임이 있음을 깨닫
제사장은 중간에 서 있는 자인데, 특히 하나님과 사람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의 사이에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시어, 모든 나라 족속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오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적 책임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제사장적 책임을 소홀히 하였다. 자신들만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우월감이 빠져 교만함 속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순결함과 존엄성을 잃어버렸고 또 반대로 이방인들이 섬기던 우상에게로 기울어져 영적 타락과 그로 말미암아 기인된 윤리적 타락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패망을 초래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존재가 되어 증인 공동체와는 거리가 먼 나라가 되어버렸다.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 역할은 다른 모든 나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이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도 증인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증인이 되기 위한 모임이다. 교회는 흩어져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모인다. 예수님은 교회에게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하셨고(행1:8), “모든 족속으로 제
이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네 종류의 나’로 살아간다. 첫째, ‘타고난 나’이다. 엄마 아빠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아 모습, 기질, 재주까지 모두 부모와 닮은꼴로 형성된 ‘나’이다. 이는 선천적 자아로서 그 힘은 매우 견고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런 ‘나’의 모습을 쉽게 벗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느냐’가 중요하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내 모습에 꼭 그런 ‘나’만 있는 건 아니다. 소위 ‘학습된 나’도 있다. 이는 어릴 적 나의 ‘의미있는 타자’(significant others)로부터 보고 들으며 후천적으로 형성된 ‘나’이다. 어떤 말을 많이 들었느냐, 어떤 장면을 많이 보았느냐, 어떤 것을 많이 경험했느냐, 어떤 습관을 가졌었느냐에 따라 형성된 인격과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느냐’도 중요하다. 하지만 내 안엔 또 다른 ‘나’도 있다. 그것은 ‘의식하는 나’이다. 이는 무언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시작할 때부터 배워서 형성된 ‘나’이다. 이에는 학교에서 배운 여러 지식들을 비롯, 사회생활을 통해 얻은 도덕, 윤리, 법질서에 관한 의식도 포함된다. 또 독서나 영상매체 그리고 개인의 경험을 통해 느끼
III. 치유공동체로써의 신앙공동체의 목회상담적 적용앞에서 살펴 본 목회상담적 신앙공동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적 목회상담의 적용에는 다음의 몇 가지 기본 전제가 바탕이 된다. 첫째, 건강한 개별화가 아닌 건강한 참여 정도가 공동체적 목회상담의 목표이다. 기존의 일반 상담이 자기 이해를 통한 건강한 개별화가 문제의 해결책이라면, 공동체적 목회상담은 개인의 안녕이 소속 신앙공동체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는 관점에 기초해 있다. 둘째, 개인의 문제를 심리내적 요인, 즉 개인적 요인이나 과거의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문제의 원인을 신앙공동체의 구조나 문화 등에서 찾는다. 즉 개인의 문제의 원인이 개인적 요소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요인이 있음을 파악하고 신앙공동체가 이러한 개인의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떠한 공동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를 모색한다. 이러한 두 가지 기본 전제를 바탕으로 치유공동체로서의 신앙공동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치유공동체로써의 신앙공동체 치유적 접근으로서 공동체에 대한 개념이 등장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부터이다. 이러한 치유공동체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신앙공동체의 형태를 비롯한 여러 형태
침례교회가 굳게 붙잡고 있는 교리 중 하나는 “전신자 제사장론”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표현이 “제사장 나라”라고 생각한다(출 19:5-6). 제사장 나라는 제사장 역할을 하는 공동체를 의미하는데, 지난번에는 예배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번에는 서로 돌보는 사랑 공동체로서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한다. 제사장이란 말의 의미는 “서 있는 자”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서 중보자적 사명을 성취하는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람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짐을 대신 지는 사역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성경은 모든 신자가 서로에 대하여 제사장직분을 실천해야 한다고 선언한다(벧전 2:9~10 참조). 목회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제사장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동시에 주위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격려하고 무장시켜서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적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침례교 목회는 제사장적 역할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제사장적 역할을 하도록 하는 사역을 중시한다. “중간에 서는 자”로서의 역할은 교회에서 서로를 향해 제사장적 사명감을 느끼면서 서로 짐을 나눠지고 담당해주는 아름다운 교제권의 형성을 의
아주 오래 전에 강원도의 한 오지 교회를 방문했더니 날씨가 영하 15도나 되었는데 전도사 사택에는 냉기가 돌았고 방은 얼음장 같이 차가왔다. 전도사가 내게 와서 교회가 어려워서 겨울에도 군불을 지피고 자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나 자신도 하루에 연탄 두 장으로 밥을 짓고 불기운을 유지하며 단 칸 전세방에서 어렵게 살 때였지만 전도사의 처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안 되었다.그런데, 세우 잠을 잔 후에 아침에 마당에 나가서 사방을 둘러보니 마을이 산에 둘러싸여 있고 뒤뜰이나 다름없는 뒷산에는 삭정이, 솔방울, 죽은 나무 등걸 등 조금만 수고하면 모을 수 있는 땔감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손님인 내가, 나무를 해서 불을 지피고 살아라, 어쩌라 할 처지가 아니어서 내 일만 보고 왔지만 일에 대한 전도사의 태도가 걱정 되었다. 그의 마음에는 목회자와 사모는 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각인된 것 같았다. 일하는 사모근래 한국교회는 성장기를 지나 안정기에 접어들어서 새로 선 교회들이 자립교회로 성장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교회는 성장하지 못해도 자녀들은 커가며 씀씀이도 달라진다. 목사의 사례비로는 가계를 꾸려나갈 수 없다. 목사는 심방하고 가르치고 기도하는데 전무(專
(3) 상황성(맥락성, contextuality), 상이점, 그리고 다양성‘상황성’ 또는 ‘맥락성’이란 목회상담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내담자의 문제 서술은 그 내담자의 경험이 해석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며, 그 해석은 그 내담자가 처해있는 상황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올바른 문제 진단과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하여 스스로 인간의 상황 안으로 들어오신 것처럼, 목회상담자는 내담자의 입장과 문제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 그 내담자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경청은 한 개인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를 구체적이고도 명백한 상황에 직면하도록 하는 목적도 있다.후기근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는 모든 인간이 같은 발달과정을 겪는다고 주장하는 인간발달이론과 같은 보편적 이론 또는 진리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인격형성에 관한 포스트모던적 이론들은 인간 개개인의 인격형성이나 발달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기에 각자가 속한 사회적 상황이나 여건/조건들은 인간이해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의 측면의 예는 성별이나 인종,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은혜와 심판을 믿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사람들을 말한다. 구약에서는 주로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을 중심으로 하고 약간의 개종한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여호와 공동체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목회를 하나님의 백성을 동역자로 삼으시어 성취하셨다. 이스라엘의 근본 책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증거 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주권적인 선택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발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맺으신 언약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는 말씀에 잘 들어 있다. 그 후 약속의 자녀인 이삭과 야곱 그리고 열두 아들을 통해 확장된 이스라엘 자손들은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모양을 형성하게 됐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이
누가는 빈무덤 사건 후에 부활현현 사건들을 길게 또한 자세하게 제시한다. 공관복음서 저자 중 누가만이 부활현현 사건들을 자세하게 제시함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존재성에 관해서는 물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담긴 결정적인 의미가 부활현현이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나타남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누가가 제시하는 부활현현 사건은 네 개의 단락으로 구성된다: 엠마오 현현(24:13~35); 제자들 앞에서의 현현(24:36~43); 마지막 명령(24:44~49);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24:50~53). 네 사건들이 모두 다른 복음서들에 나오는 부활현현 사건들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엠마오 사건을 암시하는 요약적인 진술이 마가복음의 후기 전승(막 16:12~13)에 제시됐다.누가가 제시하는 부활현현 사건들 중에서 가장 길며 자세한 사건인 엠마오 현현 사건에는 사도가 아닌 두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비록 엠마오 현현 사건에는 사도가 아닌 부차적인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누가는 그 이야기를 통해 제자들의 이해의 차원을 설명하며 또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
학생들 중간고사를 지난 주 치뤘다. 늘 그렇지만 ‘시험’은 여전히 부담인 듯하다. 할 수만 있으면 피하려 한다. 아무리 범위가 정해져 있다 해도 어려운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하기야 대체 무슨 문제가 어디서 나올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모조리 다 공부하자니 너무 양이 많고, 그래서 나름의 예상문제까지 만들어 공부해보지만 지금까지의 경험만 해도 헛다리짚은 게 어디 한두 번이라야지. 그러니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클까? 그것도 한두 과목이라면 모를까? 과목이 여럿 겹치는 기간에는 잠도 줄여야 한다. 데이트도 끊어야 한다. 모든 일상을 다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시험은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가장 지치게 만든다. 공부를 많이 하면 몸이 지친다. 적게 하면 마음이 지친다. 이래저래 시험을 앞둔 이들의 피곤함은 그 어디에도 비할 바가 없다. 그래서인가? 시험장에 들어오는 학생들 낯빛이 보통 수업 때와는 다르다. 밤이라도 샌 걸까? 얼굴엔 피곤이 역력하다. 불쌍하고 측은하다. 괜한 것 시킨 것 같은 죄책감마저 든다. 자리에 앉은 그들이 또 책을 펼친다. 한 글자라도 더 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하지만 시간이 모자라니 어쩌면 좋을까?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만 더 일찍
둘째, 관계적 존재로서의 하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항상 인간의 삶에 반응하시면서 자신을 계시해 오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 역시 그 발달 과정이 일방적인 심리내적인 요소의 과정이라기보다 사회적 상황 속에서 그 개인을 둘러싼 여러 관계와 상호작용의 진행과정으로 말미암았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진행과정에서 신앙공동체는 구성원의 사회화, 공동체의 연속성과 안정성, 정체성 형성 및 사회적 변화의 자원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즉 공동체는 개인 내면의 의미와 목적과 외부 환경의 구조와 압력 사이를 매개한다. 따라서 개인의 삶과 신앙은 신앙공동체 안에서 그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상황의 가치와 규범과 압력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형성된다. 공동체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순수하게 개인에 의해서만 구성된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 내에서 개인은 공동체 내의 ‘중요한 타자들’(significant others)로부터 신앙의 언어를 학습하면서, 그리고 신앙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의 삶을 모방하고 동일시함으로 신앙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배운다. 그렇다고 하여도 신앙공동체가 직접 구원을 개인에게 줄 수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
목회란 “일을 하는 것”이다. 교회의 목회는 교회가 하는 일이고, 목사의 목회는 목사가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목회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사람의 일과 교회의 일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따라서 이뤄져야 한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고 하셨다. 교회와 구원의 진리를 잘 설명한 에베소서는 구원의 복음을 설명한 후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자”(엡 2:10)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를 먼저 알고자 해야 한다. 우리의 아이디어를 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려주실 때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하나님의 뜻에 조율해야 한다.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1) 창조와 새 창조. 하나님의 사역은 창조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창조의 목적은
회의법에 대한 몇 가지 개인적인 견해를 공론화하는 바이다. 의장(사회자)의 역할회의법을 파악하는 것은 의장의 자격 요건이다. 바꾸어 말하면 회의법을 모르는 이가 의장 자리에 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1)의장은 회의를 신속하게 진행하고 2)의견이 엇갈리는 안건의 어느 한 편에 서서는 안 되며 3)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적 주장과 간섭, 또는 압력에 굴하지 말고 법과 상식에 따라 단호하게 진행해야 한다. 의장은 어떤 경우에나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와 주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보고사항과 의결사항기관 이사회의나 연차 총회에서는 보고사항과 의결사항을 구별하지 못하는 예가 많다. 보고는 단순히 보고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그 수용여부를 의결하는 것이 아니다. 보고사항을 의결해서 받는다면 의결사항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보고에서는 질의응답을 하고 신 사건에서 검토할 사항만을 채택한다. 이사회의와 단체장정상적인 기관이나 단체의 이사회의는 소속 단체장이 이사장에게 안건을 제시하고 회의 소집을 요청할 때 이사장이 소집하는 것이지, 이사회나 단체장이 피차 상의 없이 임의로 회의를 소집하거나 안건을 채택하지 않는다. 그런 회의는 법적 효력을 주장할 수 없다. 회의록 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