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곧 인간의 사명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빛, 물, 궁창(대기권), 땅, 식물, 주야, 물속 동물, 새, 땅의 짐승 등을 순서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보시면서 좋아하셨다.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도 아니고 식물과 동물들이 진화에 의해서 발전되어 온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게 지음 받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을 만드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셨고, 그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할 일”을 알려주셨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존재로 살아갈 때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범죄하고 말았다. 사탄의 유혹을 받은 하와와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따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한 것이다. 범죄의 결과는 무서운 것이었다. (1)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깨뜨려버린다. 죄를 범한
필자는 지난 호부터 누가복음에서 제시되는 부활현현 사건들과 그 사건들을 통해 제시되는 누가의 부활신학을 살펴보고 있다. 누가 역시 부활현현 사건들에 앞서 빈무덤 사건을 전달한다. 그는 마가와 마태와는 또 다른 국면에서 빈무덤 사건을 전달하며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것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를 제시한다. 누가가 빈무덤 사건에서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무덤 속에 들어간 여인들에게 나타난 두 사람의 전언에 있다. 그 두 사람의 전언은 “그(예수 그리스도)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24:6a)라는 부활선포에 있다. 그들은 이 선포를 중심으로 앞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지 못하고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 대한 책망(24:5b)과 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예수 자신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것(24:6b~7)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전언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시키는 한편,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자의 수난과 부활에 관하여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전달되는 구절(24:7)은 주로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 동안에 인자의 수난과 부활에
며칠 전, 오산문화예술회관에서 KBS교향악단의 연주로 이 음악을 들었다. 지나가는 음악으로야 가끔 흘려들은 적은 있어도 직접 눈앞의 바이올린 소리로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물론 그날 연주의 하이라이트는 한 시간 분량의 리스트의 ‘파우스트’였다. 그 역시 곡도 연주도 너무나 장엄하고 멋졌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 오히려 내겐 그 짧은 차이코프스키의 ‘우울한 세레나데’, 10분도 안되는 그 연주가 더 진하게 남아 있다. 왜일까? 물론 그것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빗 김(David Kim)의 연주여서이기도 하다. 동양인 최초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악장자리를 15년째 꿰차고 있는 자랑스런 우리 재미교포. 더구나 그 자리는 지난 100년간 유태인들만 차지했단다. 그러니 그가 아무리 세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켜고, 각종 콩쿨을 다 휩쓴 실력자라 해도 그 기득권을 무너뜨리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현재 미국의 유수한 연주자들을 다 모아놓은 ‘All-Star Orchestra’의 악장까지 겸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그래서인가? 문외한인 내가 들어도 그의 연주는 뭔가 달랐다. 현란함을 능가하는 충실한 기본기부터 느껴졌다. 멜로디는 정확
(2) 바울과 인권 성서에 나타난 인권사상이 바울을 통해서는 어떻게 실천되었을까?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인간 죄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2). 결국 인간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부여하신존엄성을 상실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의 권리를 완전히 상실하고 만 것인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권리는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될 수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또한 바울은 모든 인간의 평등성과 통일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바울은 이 선언을 통해 모든 인간관계의 속박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 존재로 승화시켰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기독교 목회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무엇을 언제 왜 어떻게 하시는가 하는 것에서 기독교 목회의 원리가 발견된다. 하나님은 천하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 모두를 친히 창조하셨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을 따라 섭리 가운데 운행하시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 가신다(엡 1장). 하나님은 만물의 중심에 사람을 지으셨다. 사람을 지으실 때 자기 형상대로 지으시어 영광을 받기 원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지으신 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더불어 교제하시고자 함이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복된 삶을 살았다. 창조 이야기를 통해 발견하는 목회의 몇 가지 원리를 살펴보자. 1)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위해 태어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특별한 계획을 가지셨다. 즉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다스리게 하자”(창 1:26) 하셨다. 즉 사람을 만들기 전에 사람을 만드시어 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먼
필자는 사복음서에서 제시된 부활현현의 체험과 부활신앙에 관하여 살펴보고 있다. 지난 호에는 마태가 전하는 부활현현 사건의 마지막 국면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누가복음에서 제시되는 부활현현 사건들과 그 사건들을 통해 제시되는 누가의 부활신학에 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누가는 공관복음서 저자들 중에서 부활현현의 중요성과 그것의 신학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저자이다. 누가만이 엠마오 사건을 통해 사도들의 체험 외에 다른 두 제자가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는가를 상세하게 전달한다(눅 24:13-35). 누가는 이 사건을 통해 부활의 복음이 전파된 지 두 세대가 지난 그의 세대의 신자들을 향해 어떻게 그들이 살아계신 분으로 믿고 있는 부활의 예수를 알아볼 수 있는가에 관한 교훈을 길게 전달한다. 누가 역시 부활현현 사건들에 앞서 먼저 빈무덤 사건을 전달한다. 그는 마가와 마태와는 또 다른 국면에서 빈무덤 사건을 전달하며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간접적으로 증언한다.누가복음에서 모든 부활현현 사건들은 예루살렘과 연관되어 있다. 누가복음 24장의 사건들은 부활절 당일에 일어난 것으로 제시되는데, 부활하신 예수의 마지
잘 가셨지요? 아버지? 사랑하는 예수님도, 먼저 가신 할머니 권사님도 잘 만나셨지요? 혹 처자식두고 먼저 가신 아쉬움보다 아버지의 어머니 만나신 기쁨이 더 크신 건 아니신가요? 벌써 그러시면 좀 섭섭합니다. 당신 큰 손주 목회 잘하고 있다고 안부는 전하셨지요? 살아생전 할머니의 기도를 지금도 이 손자가 그리워하더라는 말도 꼭 전해주시기 바랍니다.아버지를 위한 천국환영식은 어떠셨나요? 좋으셨나요? 예수님이 잘 준비해 주셨던가요? 이 세상 높은 자리에 올라 자주 상 받으시고, 박수 받으실 때보다 얼마나 더 영광스러우셨나요? 천사들의 특별찬양의 하모니 역시 과연 수준이 대단했겠지요? 아버지를 위해 마련된 천국집은 어떠신가요? 아버지 힘으로 결혼 35년만에 28평 아파트 장만하시고서 그렇게 흡족해하셨던 기분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더 좋으신가요? 궁금하니 꿈에라도 살짝 보여주십시오. 분명 멋지고, 우아하고, 화려하고, 크고, 편안하고, 비교할 수 없을만큼 격조 있으리라 믿습니다. 어떠세요? 말로만 듣고, 꿈만 꾸던 하늘나라를 직접 가보시니…. 생각한만큼 좋으신가요? 아니면 생각 이상으로 좋으신가요? 정말 우리가 충분히 동경하고, 그리며, 소망해도 부족함이 없나요?
십계명은 인권 사상의 구조와는 다르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는 하나로 정리할 수 있다.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출20:8~11)은 유엔세계인권선언의 신앙의 자유를 향유할 권리(제18조)와 휴식과 여가의 권리(제24조)로, 부모공경의 계명(출20:12)은 노후보장에 대한 권리(제25조)로, 살인금지 계명(출20:13)은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제3조)로, 간음금지 계명(출20:14)은 결혼의 자유권(제16조)으로, 도적질 금지 계명(출20:15)은 노예금지(제4조)와 재산의 소유권(제17조)으로, 위증금지 계명(출20:16)은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제8조)와 공정한 재판권(제10조)으로, 이웃에 대한 탐심금지의 계명(출20:17)은 사생활의 보호권(제12조)과 사회적 안전보장권(제22조)으로 비교 가능하다.(3) 희년과 인권 레위기 25장은 희년에 관한 규례를 담고 있다. 희년의 규례는 고대 어떤 사회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매우 독특한 사상이다. 이는 경제 분배의 정의를 통한 사회정의 실현의 원형을 보여 주는 제도이다. 동시에 오직 하나님만이 이 땅의 주인이시며 여호와만이 이 땅의 주권이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제도이다. 희년의 법은 함께 구속 얻은 형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누구신가?”이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예수님께 대한 나의 개인적인 대답이 중요하다. 자유주의신학은 기독교의 핵심을 하나님과 인간 영혼의 가치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굳이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상만을 받아들이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을 진지하게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러한 주장이 진정한 기독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기독교와 기독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경배하지 않는 기독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위에 세워졌다. 기독교 진리는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기독교의 모든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 속에서 세워진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관한 다음의 진리들을 고백해야 한다. (1) 예수님의 선재: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실 때 비로소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기 전부터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창조에도
기드온은 하나님의 전쟁을 감당하는 도중에 두 번이나 동족들과의 갈등이 있었다. 하나는 에브라임지파와의 갈등이었고, 다른 하나는 갓지파와의 갈등이었다. 에브라임지파는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기선을 제압하고 대승을 거둘 시기에 늦게 참여해서 왜 자신들을 처음부터 전쟁에 합류시키지 않았느냐며 시비를 걸었다.기드온이 나팔까지 불며 자원병을 모집했는데도 전쟁을 몰랐다는 에브라임지파의 주장은 억지에 가깝다. 하지만 기드온은 그들과 싸우지 않았다. 승리 이후에 주어질 전공에 집착하는 그들에게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므낫세)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않느냐” 하는 말까지 하며 자신을 낮추었다. 자칫 내분으로 확대될 수도 있었던 민감한 사안을 화합의 포도로 잘 마무리한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의 동족간의 갈등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갓지파의 후손들인 숙곳-브누엘사람들이 음식제공을 거부하고 군대를 조롱한 사건에 대해 엄중한 대응을 선포하고 차후 약속한 말 그대로 냉정하게 처리한 사건이다. 겨우 300명의 군대로 이미 120,000명의 적을 섬멸시켰고, 여전히 기드온군대의 50배에 달하는 15,000명의 미디안연합군과 접전을 벌이는 상황 속에서, 기드온과
3) 인권의 가치인권이 가지는 가치는 다음의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권의 가치는 생명의 가치를 포함한다. 이 생명의 가치는 인권과 관련된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이다. 생명권은 누구도 타인의 생명을 헤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적극적으로 생명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생명권은 모든 기본권의 전제가 되는 원초적인 기본권이다. 만약 생명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다른 기본권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둘째, 인권의 가치는 자유권을 포함한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의 역사라 할 정도로 인간의 자유는 인간생활의 기본적인 욕망이었다.근대적 인권으로서 가장 근원적인 기본권인 자유권은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요청하는 방어적인 권리이다. 셋째, 인권의 가치는 평등권을 포함한다. 인간 역사에서 평등은 기본적인 생활 속의 명제이며, 평등의 실현은 국가와 사회의 과제이다. 물론 이 평등은 절대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평등을 의미한다. 넷째, 인권의 가치는 연대책임을 포함한다. 연대책임은 인간의 아픔을 이해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아픔의 원인을 분석하여 확인하고 분명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이
기독교의 모습은 교회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며 교회의 모습은 교회 목회를 통해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침례교적 목회를 논하려면 먼저 교회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란 무엇인가? 사실 교회가 건물이나 제도 혹은 프로그램이 아니고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회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이다. 간명하게 말하자면 구원얻고, 침례받고 교회 공동체에 가입한 사람들이다. 교회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 기둥 중 하나이다. 교회는 모든 신앙과 실천의 포괄적 결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이해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실천에 프레임을 제공한다. 기독교 신앙은 교회에 의해 시작되고, 전파되며, 성숙되고, 재생산된다. 우리 중 대부분이 교회에 나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만났으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에서 신앙의 성장을 경험했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의 실천을 성취하고 있다.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고 직접 가정을 꾸려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가정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가정생활을 오히려 등한히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목회자와 성도들도 교회를 소홀히 여기고 교회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신앙생활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
세상에 이런 교회가 있을까? 성가대는 없는데 찬양이 살아있는 교회, 새벽기도회는 없는데 기도가 살아있는 교회, 구역은 없는데 교제가 살아있는 교회, 부교역자 하나 없지만 주일학교가 살아있고, 청소하는 사람 따로 두지 않아도 언제나 깨끗한 교회. 진짜로 이런 교회가 우리나라에 있을까? 있다. 전라도 고흥에 있다. 게다가 그 교회는 30명 고아들까지 받아 함께 살며 어엿한 사회인으로 키웠다. 교회의 든든한 일꾼으로 세웠다. 얼마 전엔 담임목사님이 폐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뒤에도 새로운 목회자 청빙 없이 사모님을 그냥 담임목회자로 세웠다. 성도들 대부분은 토요일부터 교회에 온다. 그렇게 아예 1박을 하며 교회를 섬긴다. 그러면서도 행복이 넘친다. 그 교회에 매년 3000만원 이상을 헌금한다는 장로님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분이 그 교회에서 제일 겸손하단다. “헌금을 많이 할수록 말은 더 없어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철학. 참으로 은혜로운 장로님이다.그런가하면 전라도 순천의 한 교회. 그 교회 목사님은 벌써 그 교회가 네 번째 목회지이시다. 알고 보니 이분은 쓰러져가는 교회에 부임하여 교회를 일으키시는 게 사명인 분. 교회가 성장하여 안정되면 그 교회를 후배에게
우리는 침례교 가족이다. 침례교회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교회상을 각각의 교회가 자리 잡고 있는 시대적 지역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구현하고자 노력한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을 통한 계시에 근거하여 제시되는 신약성경적인 교회상을 신약교회(New Testament Church)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땅에 실존하는 교회는 아니며 이상적인 교회(ideal church)의 원형이다. 침례교회의 중심 특징이 성경적임을 생각할 때 신약교회의 이상적 교회상에 대한 연구와 그에 근거한 실천적 제안은 건전한 침례교의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과제라고 본다. 우리가 침례교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침례교회가 어떤 사람이나 사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원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필자는 실천신학자로서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기 위한 과업으로서의 목회를 강조한다. 침례교 목회자들의 과업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를 침례교적으로 세우는 것이다. 신약성경에는 약 20여개의 교회들이 수록되어 있다. 예루살렘교회, 안디옥교회, 고린도교회, 로마교회,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등등이다. 그 교회들을 초대교회(early churches)라고 부른다. 초대교회는 잘 알다시피 바람직한 교회도 있었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을 배경으로 썼던 ‘존 스타인벡’의 세계적인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는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단점인 ‘부익부 빈익빈’의 아픔을 잘 그린 수작이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일자리는 적고 일할 사람은 넘쳤던 그 당시의 경제적인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은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게 되고 폭발직전의 화산과 같은 정치, 경제, 사회체제에 대한 뜨거운 분노가 하층계급으로부터 차곡차곡 쌓여져 가는 모습을 소설로 잘 표현했다.중학교 때 이 작품을 접하면서 ‘왜 맛있는 포도가 분노일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포도를 먹는 사람들은 행복하겠지만 그 행복한 사람들의 입 안에서 치아에 씹히고 분쇄되는 포도들은 착취당하는 자들의 붉게 타오르는 분노와 고난의 붉은 피와 같은 붉은 즙을 남기며 산산이 부서진다는 상상에서 그 답을 찾았다. 스타인벡 자신도 “사람들의 눈에는 좌절의 빛이 떠오르고,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가 자라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분노가 충만하고, 분노에 충만한 그 포도송이들은 포도 수확기를 위하여 알알이 더욱 무겁게 영글어 가는 것이다” 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