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네 살, 처음 예수를 믿고 뜨거운 마음에 “제자를 삼으라(마태복음 28:19~20)”는 주(主)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대학 캠퍼스에 뛰어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목회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왜 사람이 변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가 세워지지 않는지를 고민하면서 그 흔한 여행 한 번 못하고 20여 년 동안 오직 한 우물만 팠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밤이 새도록 고민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답을 찾지 못해 혼자서 시내를 무작정 걷기도 했다. 아무리 찾고 찾아도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사도행전을 수없이 읽고 또 읽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래서 결국 얻은 고민의 해답이 바로 ‘부활의 복음’이었다. 왜 ‘부활의 복음’이어야 하는가?첫째,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이 헛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7~1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나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
5개월전 일이다. 지인 몇 부부와의 모임 중에 무릎을 치며 깨달았던 것이 있어 소개한다. 너무 못난 얘기라 부끄럽지만, 혹 나 같은 이 땅의 남자들이 또 있을까봐 용기 내어 말한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결혼관에 관한 얘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지난 20년간 한 아내의 좋은 남편이 되지 못했다. 물론 남자로서 세상 돌아다니며 나 즐기고 싶은 걸 즐긴 건 아니다. 자식들 밥을 굶긴 것도 아니다. 적어도 남자는 그 책임은 져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결정적인 부족함이 있었다. 바로 아내의 편이 되어 주지 못한 일이다. 남편으로서 경제적인 것 책임져주고 엉뚱한 짓 안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여겼을 뿐 아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편 되어주는 일’은 정말 부족했다. 이런 생각이 순간 스친다.예를 들어 어려서부터 한 고향에서 자란 둘도 없는 정말 친한 친구가 어느 날 새벽 2시에 연락도 없이 집을 찾아왔다 하자. 그러면서 하는 말이 “친구야. 내가 정말 이 밤에 너 밖에 생각이 안 나서 왔어. 나 며칠만 네 집에 좀 머물 수 있겠냐? 이유는 묻지 말고….”그러면 그 부탁을 웬만해선 거절 못한다. ‘얼마나 급한 사정이면, 이 밤에 나밖에
우리 교회에는 참으로 특별한 삶을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교회는 춘천에 있지만 전국 각지에서 유별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목회 현장에서 만나보기 어려운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다 몰려온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왜 우리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몰려오는지 참으로 의아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것은 ‘세계 선교’라는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한 전조(前兆)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게임중독자, 마약중독자, 알콜 중독자, 도박 중독자, 조직 폭력배, 우울증 환자, 안티 기독교, 심지어 자살 중독자까지…. 이들은 이 세상의 문제라는 문제는 다 들고 교회로 온 것 같았다. 이들을 통해 이 세상 임금 마귀가 던져 주는 생각 중 하나만 받아먹어도 그 생각에 이끌려 평생을 허비하게 되는 것을 봤다. 게임, 도박, 자살, 우울, 쾌락, 이성(異性) 등 각 사람의 환경에 맞는 가장 타당한 생각이 들어오고 그 생각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 오는 특별한 그 사람들을 통해 바울이 이 세상을 배설물이라고 한 이유를 정확히 보게 됐다. 이 세상의 어떤 프로그램이나 교육으로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을 놓고 씨름하는 동안 초대교회를 세운
기독교 복음은 20세기에 한국에서 꽃을 피웠다. 20세기 전반부에 일제에 의한 식민지 치하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혹독한 탄압과 해방 후 6.25전쟁의 참혹한 상황 속에서 많은 순교자들과 헌신되고 충실한 복음의 일군들을 통해 유일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유일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앙이 확립됐다.20세기 후반부에 산업화와 민주화의 국가적인 발전과 함께 기독교 복음의 활발한 전파와 교회의 부흥이 이뤄졌다.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전무후무하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힘차게 전파됐고 교회의 숫자도 폭발적으로 증가된 가운데 오늘에 이르게 됐다.기독교 선교 2세기를 맞이한 지금 한국교회는 교회 내외적으로 많은 문제와 도전에 직면해있다. 교회 내적으로는 부흥의 활력과 전도의 열매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물론, 목회자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교회 외적으로는 많은 이단들이 출현하여 기독교 복음을 혼란하게 만들고 있으며 종교다원주의 파도가 밀려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진리의 유일성을 무너뜨리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의 산물로 나타난 종교다원주의 사상과 주장은 부활과 성령과 계시라는 초
유도에 패자부활전 규정이 있다. 8강 진출자들은 우선 A1, A2, B1, B2 그룹으로 나뉘고, 각 그룹 승자가 4강에 진출한다. 8강전에서 진 4명의 선수들은 A, B 그룹에서 패자부활전을 펼친다. 이후 4강전에서 결승에 오르지 못한 2명이 내려오면, 패자부활전에서 이긴 2명과 엇갈려 싸우는데, 여기서 나오는 2명의 승자에게 동메달을 준다. 4강에 올랐어도 동메달을 따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8강에서 지더라도 동메달을 딸 수 있는 것이 유도패자부활전의 묘미이다. 태권도에도 패자부활전이 있다. 유도처럼 동메달리스트도 2명이다. 그러나 경기 방식은 조금 다르다. 결승에 진출한 두 선수에게 패한 선수들은 4강에서 패한 선수들과 맞붙어 동메달을 노릴 수 있다. 첫 경기에서 패했어도 자신을 이긴 선수가 결승까지 진출한다면 동메달을 획득할 기회는 얼마든지 남아 있는 것이다. 강한 선수에게 한번 패했다고 끝이 아니라 또 한 번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가 이 제도에 들어 있다.여호수아 7장에 보면 아이성 전투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손도 안 대고 큰 성 여리고를 무너뜨렸던 히브리 백성들은 교만해져서 여리고보다 훨씬 작은 아이성과의 전투를 아주 쉽게 생각했다.
나는 예수님을 믿은 후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1986년, 무조건 대학 캠퍼스에 들어갔다. 그리고 강원대학교 여대생 6명을 만나 시작된 제자 양육은 2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내가 제자 양육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제자를 삼는 것만이 복음으로 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며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시 나는 춘천이 아닌 외지(外地)에서 온 6명의 여대생에게 나의 인생 전부를 드렸다. 주변에서는 그런 나를 보면서 너무 무모한 일이라며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 복음화를 위해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길러내는데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은 사람이 보기에는 미련하고 더뎌 보여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가장 지혜롭고 빠른 길이다. 나의 목회 철학은 오직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어떻게 제자 훈련을 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교회 안에는 사람을 키우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많이 있다. 일대일 양육을 비롯해 소그룹 성경 공부 모임, 소수의 제자 훈련반, 가정 교회 등 다양한 양육 방법들을 사용한다. 이러한
지난 주 집안에 외사촌 동생 결혼식이 있어 다녀왔다. 덕분에 외삼촌들과 이모님들도 오랜만에 만났다. 자연스럽게 식사자리에서는 옛이야기도 오갔다. 주로 내가 여덟, 아홉 살 때 외가에 함께 살면서 그 외삼촌, 이모들과 경험한 얘기들이다. 지금도 생각난다. 가정예배 때 대표기도하던 이야기, 산에 나무하러 가던 이야기, 개울에서 멱 감던 이야기, 쇠죽 끓이던 이야기, 논에서 일하다가 거머리 붙은 이야기, 새참 먹던 이야기, 두부 만들던 이야기, 약 팔던 이야기, 누에 기르던 이야기, 똥 퍼 나르던 이야기, 등목하던 이야기, 자전거 배운 이야기, 리어카 타고 가다가 이빨 부러진 이야기, 장닭한테 쪼인 이야기, 소뿔에 받친 이야기, 친구들과 농협 창고 앞에서 자치기하던 이야기, 반장자리 뺏겼다며 날 무지 괴롭혔던 친구 이야기 등…. 새겨진 진한 추억만큼이나 할 얘기도 많았다. 그 중 따뜻한 온돌방 이야기는 단연 빠지지 않았다. 한 겨울 밤 군불 제대로 땐 아랫목에다 제각각 발들을 모아놓고는 뭐가 그리도 재밌었는지 밤새 재잘거리다가 한둘씩 곯아떨어지던 추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따뜻한 온돌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몸과 마음은 얼마나 거뜬했는지 모른다. 그러면 우
춘천 한마음교회가 추구하는 세 가지 핵심 가치는 ‘복음! → 교회 공동체! → 세계선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이다. ‘복음’으로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고,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의 지상 사명인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 것이다. 만약 이 순서를 거꾸로 하여 ‘세계 선교’가 사명인 사람들끼리 모여 교회 공동체를 만든다면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 공동체는 세워지지 않는다. 오직 교회 공동체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태동이 되고, 이러한 교회 공동체가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 16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교회 공동체는 ‘복음’이라는 반석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반석 위에 세워지지 않는 교회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마7:26~27).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2:36)”고 강력히 선포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십자가 사
계시록 5장, 14장에 등장하는 ‘새 노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새 노래’가 낯선 음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평생 하나의 찬송가만 부른다 할지라도 부를 때마다 감동이 일어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으로 뜨거워진다면 이 찬송가도 새 노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현상은 보편화하기 어려운 극히 드문 사례이다. 이것도 혼자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지, 전체 회중이 함께 하는 회중찬양시간에는 개인의 특수성을 보장해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30분에서 한 시간까지 이어지는 회중찬양시간 내내 똑같은 찬송가만 부를 수 없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찬양시간은 기쁨의 시간이 아니라 엄청난 고문의 시간이 될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익숙한 노래만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찬양의 열정이 부족하다. 오랫동안 불러온 것이니 악보를 보지 않고도 노래가 술술 나온다. 레코드 틀어놓은 것처럼 자동으로 찬송가가 흘러나오니 편하다. 몸도 편하고 머리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다. 주님 생각 없이도 노래할 수 있다. 감동도 없고 눈물도 없지만 잘 부를 수 있다. 딴 생각하면서도 박자 하나 틀리지
나는 왜 사람이 변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지 않는지를 고민하는 가운데 이 시대가 ‘사도행전을 건너뛴 시대’임을 알게 됐다. 나는 이것을 통해 이 시대의 영적인 실상과 초대교회를 세운 원형의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됐다. 그 이후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나 자신의 명예와 우리 교회의 성장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초대교회를 세운 부활의 복음으로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복음이면 다 된다!’ 는 큰 확신을 갖게 됐다. 오직 복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많은 프로그램이나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면 사람이 변화되기에 충분하다. 20여년의 목회를 하면서 나는 다른 많은 목회자들처럼 왜 사람이 변하지 않는지, 왜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지 않는지 그 이유를 찾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봤다. 강한 훈련도 시켜 봤고, 성령의 능력 측면도 강조해 봤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변하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장 큰 고민은 생명이 생명을 낳는 ‘복음의 생명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길고 머나 먼 항해 끝에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기쁨은 얼마나 컸을까? 사과나무에서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의 기쁨은 또 얼마나 컸을까? 밤잠을 설치며 고생한 노고를 다 잊게 만드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그 발견들은 발견자 자신과 그 발견의 가치를 나눈 온 인류의 기쁨이 됐다.요즘 나도 그러하다. 성경을 그렇게 오랫동안 읽고 배웠고, 오랫동안 가르치기도 한 전문가이지만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지고의 가치를 발견한 나는 요즘 너무나 기쁘다. 그것은 바로 성경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 인류에게 무엇을 그토록 주고 싶어 하셨는지를 발견한 기쁨이다. 어찌 이를 인디아나 존스가 십계명 든 잃어버린 성궤를 타니스 성에서 발견한 것에 비하랴. 신비의 돌을 중국 미궁의 사원에서 발견하고, 거룩한 성배를 요르단 페트라에서 발견하고, 크리스털 해골을 페루 마야문명 본산지에서 발견한 기쁨에 비하랴. 이 발견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인간이 알 수도 없는 하늘의 비밀에 관한 것이기에 비교도 할 수 없는 발견인 것이다. 그 첫째는 ‘행복’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작품 ‘에덴’은 행복동산이었다
처음 예수를 믿고 뜨거운 마음에 기도원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기도원 원장은 사도행전 8장 14~17절 말씀을 증거하면서 안수를 받아야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방언이 성령님이 임하신 증거라고 하며 방언을 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성령론에 대해 올바로 정립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을 때 받는 성령님을 특별한 안수나 기도를 통해 받으려고 하거나 자신들 안에 이미 내주(來住)하시는 성령님을 인지하지 못하고 성령을 받기 위해 다른 노력들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주인으로 믿을 때’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을 믿을 때 즉시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나온다. 이런 경우들로 인해서 성령을 받는 방법들에 대해 많은 오해들이 생기며 한국교회 가운데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왜 성령을 즉시로 받지 못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다,첫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임하신 성령님의
신참들이 먼저 품삯을 받다니? 뭔가 조짐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1시간 일한 자에게도, 12시간이상 일한 자들에게도 품삯은 동일했다. 아침 일찍 들어와서 더 고생한 고참들은 더 많은 품삯을 기대했으나 저들의 꿈과 기대는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분노가 치민 고참들은 주인에게 대들었고, 주인도 한 발 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주인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는 역설적인 단호한 말로 결말을 지어 버렸다. 일찍 들어온 일꾼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에 대한 열심이 감소하게 되어 건성으로 일을 마치게 된 것과는 달리, 늦게 들어온 일꾼들은 미안한 마음에 정말 열심히 일했을 것이며, 일에 대한 열정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상태에서 일을 마치게 되었을 것이다.아마도 주인은 작업량보다는 일꾼들의 뜨거운 마음을 더 원했던 것 같다. 설교는 반복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기도도 중언부언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회중찬송가의 무한 반복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어떤 교인은 평생 똑같은 찬송가만 부르고, 회중 전체가 찬양할 때도 그 찬송가만을 부르기를 원한다. 어떤 목회자도 자신이 익숙한 찬송가만 주보에 올린다
내가 교회를 다니게 된지 2년 정도 지났을 때, 영적 세계에 대해서 눈이 열리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마귀’가 실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늘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살아온 나에게 보이지 않는 ‘마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리고는 성경에서 ‘귀신’이라는 단어에 모두 동그라미를 치며 성경을 자세히 읽었다. 나는 마귀가 실제 존재하고 있음을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하게 여겼었던 것이다.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마귀’가 실제로 존재하고 우리들의 실제 삶에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모든 사람들이 다 마귀에게 속고 사는구나!’였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요8:44)로 ‘돈만 있으면, 명예만 있으면, 뭔가 소유하면 행복할거야!’하는 생각을 사람들 마음속에 넣어 준다. 사람들은 마귀가 주는 이 생각에 속아 일생을 마귀의 종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마귀에게 속아 평생을 종노릇 하다가 지옥에 갈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껴 교실마다 다니며
1. 성도들을 향한 고마운 마음이 날마다 일어 기쁘다난 군목을 오래 했었다. 그래서 몸에 밴 익숙한 문화 중 하나는 예배당 자리를 간편히 채우는 것이다. 주일이든, 특별행사든 지휘관에게 미리 전화를 걸어 내가 원하는 숫자를 얘기하면 어김없이 그 숫자만큼 병사들을 보낸다. 그래서 내게 예배당 자리 채우는 일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다 민간목회 8년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내가 전화한다고 동원 가능한 교인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말하나마나 불가능하다. 결국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은혜와 감동이 있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 더구나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그 무엇도 안된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요즘 난 너무 기쁘다. 주일마다 어디서 그렇게 사람들이 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전화한 것도 없다. 부탁한 것도 없다. 그냥 오신다. 나도 일일이 물어보고 싶다. “어떻게 오늘 이렇게 예배에 오시게 되었느냐?”고…. 성령께서 다 해주시는 것 같다.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 2. 성도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갖게 되어 기쁘다지난 주일 저녁, 식사를 같이 한 집사님. 올해 일흔 되신 대한민국 최고령 택배기사이다. 주일을 제외한 매일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