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운동을 해서 웬만한 일에 대해서는 대범하게 넘어가는 성격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만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쉽게 넘어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나의 인생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밤새도록 고민했고,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말씀은 몇 년을 고민했다. 이렇게 고민하던 중에 말씀이 풀어졌을 때의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정말로 춤을 췄다.삼위일체에 대한 나의 고민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시작됐다. 나는 막연히 하나님은 숫자적으로 한 분이신 줄 알았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절을 읽는데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 또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두 분이 나오는 것이다. 내가 처음에 교회를 다닐 때는 하나님은 숫자적으로 한 분인데 구약에서는 성부의 모양, 신약에서는 성자의 모양, 현 교회 시대에는 성령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리고 한 사람이 집에서는 아버지. 직장에서는 교사, 교회에서는 집사인 것처럼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세 가지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배웠다. 삼위일체를 이렇게 배웠던 나에게 요한복음 1장
블레셋으로부터 법궤를 돌려받은 벧세메스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자신들의 마을로 들어온 것을 복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저들의 영적 무지로 인해서 그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사실 기회를 날린 정도가 아니다. 법궤를 구경하다가 무려 50,070명이 죽임을 당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레위인이 함께 있었지만 그 역시 영적 무지로 인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정확한 제사법조차 몰랐으므로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자신들의 경내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치워버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히브리사람들 중에서 법궤를 모실 수 있는 다른 레위인을 찾았을 것이고, 그중에서도 벧세메스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레위인의 집을 찾았을 것이다. 그곳이 바로 벧세메스로부터 14.5km 떨어진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이었다. 그러나 법궤로 인한 비극은 계속 되었다.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70년이나 머물렀지만, 그 역시 그의 아들 웃사가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 웃사가 다윗성으로 법궤를 이송하는 도중 급사한 이유를 대부분이 레위인이 꿸
교회성장연구소(본부장 이장석 목사)에서 발행하는 월간 교회성장 11월호에 ‘간증 사역을 통해 교인들과 소통하는 창의적 목회’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는 춘천한마음교회를 소개했다. 아직까지 우리 교회에 ‘교회 성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 성장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교회를 컨설턴트 하는 연구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마음교회 성장의 비결을 함께 나눔으로 신약성서적인 교회를 추구하는 우리 침례교단 가운데 조금이나마 유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기록한다. 최근 시공간을 초월해 소통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빅 데이터(Big Data)’가 새로운 트렌드(Trend)로 급부상하고 있다. 빅 데이터란 말 그대로 엄청나게 큰 데이터를 말한다. 이 빅 데이터는 가까운 미래 예측을 비롯하여 많은 영역에서 활용이 되고 있다. 그 중 스포츠 분야에서 빅 데이터를 활용한 사람이 바로 전 SK 와이번즈 감독이었던 김성근 감독이다. 그는 오직 어떤 타자가 어떤 투수에게 강한가 하는 데이터를 분석하여 각 상황에 맞는 선수를 기용했다. 교회성장연구소 이장석 목사는 김성근 감독이 데이터 분석 야구의 선구자라면 춘천 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
1. 어떻게 하면 주일예배자 모두가 적어도 예배 시작 15분 전에 입장 완료할 수 있을까? - 우리가 청와대에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면 15분이 아닌 1시간 전부터 그 앞에 가서 기다릴 텐데. 우리 성도들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대한민국 대통령보다 가볍게 생각하진 말아야 할 텐데. 하나님으로 하여금 너무 많이 기다리시지 않도록 성도들을 어떻게 잘 가르칠까가 고민이다.2. 어떻게 하면 예배가 끝나고도 성도들이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예배드린 시간만큼 정도는 교회에 머무르게 할 수 있을까? - 초대교회는 그랬는데 현대교회는 왜 안될까? 그때보다 삶이 많이 바빠져서 일까? 하기야 얼마나 바쁘셨으면 예배가 끝나기도 무섭게 목사와 인사 나누는 자리에서조차 휴대폰을 귀에 대고 나오시는 분들도 계실까? 우리 교회가 영화관이 아닌 이상 끝나기가 무섭게 인사도, 교제도 없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만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국수로, 커피로 붙드는 것도 한계가 있어 보인다. 3. 어떻게 하면 예배, 기도, 말씀, 교제, 목장, 가정이 늘 주님의 생명력으로 살아있게 할 수 있을까? -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 모든 것도 다 살아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예배만이 사람을 회복시
나는 서른 한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처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에 말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그 때 제일 많이 고민했던 문제 중 하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과연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직접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였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고민을 해 봤을 것이다. 요한복음 6장 62절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하려느냐” 이 말씀을 보고 ‘어떻게 사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직접 뛰어 본 적도 있었다.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항상 기뻐하라” 이 말씀을 보면서는 어떻게 인간이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민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성경의 말씀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어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과 인간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말씀 또한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깨달은 이후 나는 이 세상에서 배운 가치관으로 성경 말씀을 접근하려고 했던 나의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내려놓게 됐다.‘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과연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직접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라
아비나답은 기럇여아림에 있는 자신의 자택에서 몇 년 동안이나 법궤를 모셨을까? 설교하는 목회자들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크게 ‘20년설’과 ‘70년설’로 나뉜다. 20년설은 사무엘상7:2에 기록된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로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에 근거한다. 성경에 20년이라고 명문화되어 있어서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이 사무엘상7:2이 기록될 당시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20년설이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20년설이 명기된 사무엘상7:2이 기록될 당시에 사무엘이 주도했던 미스바대성회가 있었다. 사울왕도 등장하기 전이다. 그러므로 사무엘상7:2에 기록된 20년이라는 기간은 벧세메스로부터 이송되어 온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렀던 기간을 미스바대성회를 기점으로 계산한 것이다.미스바대성회 이후에도 50년 이상 법궤는 계속해서 아비나답의 집에 머무른다. 사울왕의 집권기간 중에도 역시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사울왕이 죽고 다윗이 왕위에 올랐을 때 비로소 아비나답의 집으로부터 법궤가 다윗성으로 이송된다. 따라서 70년설이 더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아비나답과 관련해서 또 하나의 의문점이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예수님 안에 어떤 보화가 있는지 몰랐을 때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내게 은혜의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스러운 말씀이었다. 뭔가 나의 것을 빼앗기고 손해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예수님 안에 어떤 보화가 있는지를 알게 되니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이다. 왜냐하면 내 생명, 내 자식, 내 물질, 내 인생 등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된 사람만이 세상에서 참으로 자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요 8:32).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뿐 아니라 ‘풍성한 삶’을 주셨기 때문이다(요 10:10). 그렇다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 자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축복은 어떤 것이 있는가?첫째, 예수를 주인으로 믿는 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오뚝이 같이 일어난다(고후4:8~10). 예수를 주인으로 믿는 자들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핍박을 받아도,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고 벌떡 일어난다. 사도바울이 말한 이 4가지 상황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의미한다. 예수를 주인으로
이번엔 대한민국 국민의 1/4을 관객으로 끌어 모은 영화 ‘광해’ 이야기다. 이 영화는 조선의 15대왕 광해군 8년, 임진왜란 이후 나라를 다시 세워보려는 그의 의지에 대해 대신들의 왕권 견제가 극심하던 때를 배경으로 한다. 심지어 반대파들은 중전의 오빠도 역적으로 몰고, 왕의 목숨까지도 노린다. 이에 극도의 위기를 느낀 왕은 어느 날 야밤 도주를 결심하고 자기가 없는 동안 잠깐이라도 자신을 대신해 줄 똑 닮은 한 사람을 수배하여 자기 자리에 앉힌다. 그로부터 이 영화의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는 전개된다. 이에 광해는 그날 밤 자신이 좋아하는 기생을 찾아 급히 몸을 숨기지만 그만 암살자에 의한 독극물 중독으로 사경을 헤맨다. 그래서 졸지에 그 가짜 왕의 왕 노릇은 잠깐이 아닌 15일 동안이나 계속된다. 이에 광해의 최측근인 도승지 허균과 조 내관은 그 가짜 왕이 가짜임이 들통 나지 않도록 왕실 교육을 철저히 시키며 하루하루의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해 나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벌어진다. 가짜 왕으로 앉은 이 ‘하선’이라는 기방의 광대가 처음엔 얼굴과 목소리만 흉내 내는 차원이었지만, 점점 나라 돌아가는 것을 눈에 넣게 되면서 정치, 경제, 외교
목회(牧會)를 하면서 고민이 되는 문제들 중 하나는 주(主)를 위해 뜨겁게 헌신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뜨거운 감격이 사라지고 헌신 또한 식어지는 것이다. 그 사람은 분명히 자기가 주인 된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비췸 받아 그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인(Lord)으로 믿었고, 큰 구원(히 2:3)과 큰 사랑(엡 2:4)에 감격하여 주를 위해 헌신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뜨거움과 헌신이 사라지는가?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고민하며 의뢰하던 중,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나 훈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지키는 데서 실패하였기 때문’임을 알려주셨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깨닫고 감격했을지라도 마음을 지키는 데서 실패하면 감격이 사라지고 마음이 굳어지는 것이다. 구원을 받고 많은 말씀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 즉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다시금 마귀에게 종노릇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마음을 지키는 데서 실패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풍성한 삶을 잃게 되는 것이다.우리는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추상적으로 생각하거나 소홀히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개역개정 성경에서 사무엘하6:5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로 기록하고 있고, 역대상 13:8은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로 기록했다.KJV성경에서 사무엘하 6:5은 “하프와 쏠터리와 탬버린과 뿔나팔과 심벌즈”로 기록하고 있고, 역대상 13:8은 “노래와, 하프와 쏠터리와 탬버린과 심벌즈와 나팔”로 기록하였다. NIV성경에서 사무엘하 6:5은 “하프, 리라, 탬버린, 딸랑이, 심벌즈”로 기록하고 있고, 역대상 13:8은 “하프와 리라와 탬버린과 심벌즈와 트럼펫”으로 기록하고 있다. NASB성경에서 사무엘하6:5은 “리라와 하프와 탬버린과 캐스트넷츠와 심벌즈”로 기록하고 있고, 역대상 13:8은 “리라와 하프와 탬버린과 심벌즈와 트럼펫”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법궤를 이송할 때에 다윗은 화려한 무용을 동반한 음악연주로 분위기를 돋우었다. 그 악기편성은 사무엘하기자와 역대상 기자가 다르게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번역본 마다 다 다르다. 일반적으로 번역된 성경들은 번역본마다 번역이 다르고, 또한 잘못 번역되어서 바로 잡아야 할 부분들
나는 늦은 나이에 신앙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신앙생활 초기에는 성경을 읽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아 고민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 중 특히 오랜 시간을 고민했던 부분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것이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을 보면 어떤 때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어떤 때는 사람이라고 하니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신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믿는 믿음의 대상이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가 선명하지 않으니, 당연히 신앙생활도 선명할 수가 없었다.6년이 넘게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했다. 그런데 나중에 교회사를 보니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문제로 이미 300~400년간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 인격체 안에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理性)이나 이 세상에서 배운 가치관으로 풀려고 하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오직 성령께서 가르쳐 주셔야만 한다. 성령께서는 히브리서 10장 20절과 이사야 9장 6절 말씀을 통해서 이 문제의 해답을 정확히 가르쳐 주셨다. 그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
신학교 예과를 다니던 시절에 한 교수님으로부터 지도자는 공평한 간칭(杆秤)으로 여러 분야의 일을 공평하게 가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해외선교를 강조하는 교회는 국내선교를 등한이 해서는 안 되며 사회봉사를 강조하는 목사는 교리 공부의 중요성도 내다보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종합적 시각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종합적 시각은 현실적, 사회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종적, 시간적으로 자신의 목회를 내다보고 설계하는 데도 반드시 필요한 시각일 것입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은 한(恨)이 많아 단명하게 되며 현재만 보면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고 미래만 내다보고 달리다가는 허공에 던져지기 쉬울 것입니다.장거리 주자(走者)가 달려갈 거리를 가름하며 힘을 조절하듯이 목회도 어떤 방향으로 얼마동안 달릴 것이지 계획을 세우고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목회서신은 그동안 발표했던 112편을 묶어 대학출판부 『하기서원』에서 책으로 출판해서 이미 시중에 나와 있습니다. 지난 3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목회서신의 수취인이 되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하며 목회와 삶에 대해 느낀 단상 몇 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싸움에서 지는 사람이 패배자가 아니라 진실을 굽히는 자가 패배자이다.-
물의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들 중에는 폭포와 분수가 있다. 폭포는 하류로 흐르던 시내가 절벽을 만나게 되면 그 물들이 한꺼번에 그 아래로 쏟아짐을 통하여 장관을 이루는 것을 의미하고, 분수는 고여 있는 물에 인공적인 힘을 가하여 위로 솟구치게 함으로 장관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둘 다 아름다운 물의 예술이다. 시원하고도 아름답다. 수많은 사람들을 유쾌케 하고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이 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폭포는 자연적이지만, 분수는 인위적이다. 폭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지만, 분수는 인간이 만든 작품이다. 폭포는 흐르는 힘을 그대로 이용했기에 따로 힘 들어갈 것이 없지만, 분수는 솟구치게 해야 하기에 힘을 많이 필요로 한다. 폭포는 왠만해선 중단되는 일이 없지만, 분수는 모터만 꺼지면 바로 중단된다. 폭포는 그 낙차를 이용해 또 다른 에너지도 만들어내지만, 분수는 에너지를 소모시키기만 한다. 폭포는 돈이 들지 않지만 분수는 설치부터 운영까지 많은 돈이 든다. 폭포는 고장 나는 일도 없지만 분수는 자주 고장도 난다.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보면 늘 그런 생각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을 영적으로 솟아오르게 할
큰 기대와 환영의 박수를 받으며 부임하는 목사 뒤에는 쓸쓸하게 교회를 떠나는 이임목사가 있다. 이임 목사 중에는 명예롭게 정년퇴임 하는 이도 있고 원하던 교회에 부임하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떠나는 이도 있지만, 갈 곳 없이 떠나는 이도 적지 않다. 전에 잠시 언급한 바 있는 옛 사람들의 손님맞이와 보내기(작별)에 대한 형식(形式)의 일부를 되짚어 보며 교훈을 얻고자 한다(57회). 과거 우리나라에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는 찾아오는 과객(過客)에게 거처와 음식을 제공하는 풍습이 있었다. 과객은 대게 한 끼니 식사를 하거나 또는 하룻밤 신세를 지고 이튼 날 아침에 떠나지만 게 중에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몇날 며칠을 머무는 이도 있었다. 그런 길손은 흔히 오래 머무를 구실을 찾기 때문에 주인은 핑계꺼리를 없애야 했다.그래서 혹 식객들 끼리 투전을 해서 길손이 노자를 잃어버릴 경우 그것을 기화로 더 눌러앉게 되지나 않을까 해서 행랑채에서는 투전을 금했으며, 비가 온다 날이 저물었다 하며 출발을 미루거나 떠나갔다가도 되돌아오지나 않을까 해서 장기 투숙 식객이 떠난다고 하는 날은 서둘러 음식을 공궤하고 해가 있을 때 재 넘어 주막집까지 배웅해 주기까지 했
요즘 사회적으로 목회자의 사례비에 대한 세금 문제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영향력 있는 일부 교회의 분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면서 마치 많은 교회들이 재정 사용에 문제 있는 것처럼 호도되는 측면도 있으며, 세금 부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재정 사용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단초인 것처럼 여론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 12:17)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달리 하나님의 것마저도 가이사에게 주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고,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1:3~4)는 교훈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짚어보기 위해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전문가와 토론하며 그 의견을 구해 보았습니다(이 난의 제‘75’번 항목 참조 바람). 납세의무조세는 나라 살림의 근간을 이루는 재정의 원천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비전은 석유나 광물과 같은 부존자원이 미약한 상태에서 결국에는 조세 수입을 통한 재정 조달을 통해 실현될 수 있습니다. 국민의 납세의무는 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