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특히 미국 침례교회는 설교 뒤에 영적초청을 한다. “오늘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겠다는 사람은 손을 들어 표해 주세요.” 이에 손을 든 사람은 담대하다. 결단성이 강하다. 그러나 손을 못든 사람은 “어떡하지?”하며 망설이다가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다. 이런 경험을 수차례 하게 되면 영영 예수영접의 결단신앙이 사라진다. 불행하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하는 후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사랑하면 “사랑해요”라고 말하라. 예수 자기 땅에 오셨을 때 영접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로 갈라져 있다고 하였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에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이 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0~12) 짐을 지고 무거워 괴로움 당한 자를 초청하고 있지 않는가? 초청에 그냥 응할걸 그랬지하고 후회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지금이 바로 때는 때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고후 6:2) 우리는 부
이해인 시인은 ‘봄의 연가’라는 시에서 “우리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겨울에도 봄/ 여름에도 봄/ 가을에도 봄, 어디에나 봄이 있네, 몸과 마음이 많이 아플수록/ 봄이 그리워서 봄이 좋아서, 나는 너를 봄이라고 불렀고/ 너는 내게 와서 봄이 되었다, 우리 서로/ 사랑하면/ 살아서도/ 죽어서도, 언제라도 봄”이라고 봄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했다. 다윗도 드디어 그리워하던 봄을 맞았다. 인생의 봄이자 영혼의 봄이랄까? 그래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장래에도 인도하실 것”이라고 “에벤에셀 하나님”을 노래한다. 에벤에셀! 원래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돌 하나를 세우고 불렀던 이름이다. 원어 그대로는 ‘도움의 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이다. 전쟁에서 패하고 법궤까지 빼앗겼지만(삼상4:1, 5:1) 결국 패배는 승리로 바뀌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물론 이 승리는 그저 한 번의 승리가 아니다. 그래서 불렀던 에벤에셀 하나님, 우리 모두의 노래가 되면 좋겠다. 회개하며 부를 이름 ‘회개’는 사무엘 사역의 첫 선포였다. 마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외친 예수님이나 침례 요한의 첫 선
천국행 길에 가장 심하게 고통을 안겨다 주는 것이 율법적 안식일과 십일조다. 예수 피 공로로 사죄받아 칭의얻고 성화과정을 거치며 재림의 구주님을 기다리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의 고속도로에 안식일과 십일조라는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 장애물은 구원사역의 시초에서 사라진 것이었는데 누가 다시 갖다 놓았던가? 단적으로 이단들의 소행이다. 그 이단이란 누구를 가리키냐? 안식일을 고수하고, 또 십일조를 법으로 강요하는 사람들이다. 언필칭 십일 조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실행하라고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한다. 십일조를 지킨다는 것은 어렵다. 나의 불신친구는 끝내 십일조 헌금 문제로 아직까지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죽음을 맞고 있다. 고정수입에 십일조가 첨가되어도 빠듯한 살림인데 거기서 1/10을 빼간다는 것은 경제 논리상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긴 그가 경제학 정공학도이지만. 엄격한 안식일만 하더라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24시간을 무위무동(無爲無動)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안식교 의사는 아예 토요 안식일에 대어 놓고 의료행위를 한다. 그리고 마음으로 안식일 준수 못한 죄책감으로 안식교인으로
전쟁에서 연속 이기고 언약궤까지 빼앗은 기쁨은 잠깐, 블레셋은 언약궤를 조롱거리로 삼으려는 뻘짓 때문에 다곤 신은 박살나고, 언약궤를 갖다 놓은 지역마다 독종 재앙으로 비상이 걸렸다. 환난을 면해보려고 이리저리 언약궤를 옮겨보기도 했지만 지역마다 쑥대밭이 됐다. 옮길수록 환난은 더 커지고, 사망 자가 속출하기까지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하나님을 포로로 잡았다고까지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기들이 포로가 된것 같다. 그야말로 언약궤를 빼앗아 온이후 일곱 달은 공포의 7개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급기야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언약궤를 돌려보내기로 결정한다. 언약궤를 반환하는 블레셋 언약궤 반환을 결의한 블레셋 지도자 들은 자신들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자문을 구한다.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삼상6:2).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릴 것을 제안했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제안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만들어 신을 달래려 한다. 유사한 것을 바침으로 재앙을 피하려는 주술적 행위인 동종요법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금 쥐는 독종이 쥐를 통해서 전파된 것이라 생
노인의 되면서 갖게 되는 한 가지 특징은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행위다. 나도 여러 번 안경을 잃어버렸다. 아내가 이제는 값싼 안경을 맞춰주는데 이유는 또 잃을 것이 뻔하지 않겠냐는 것이 다. 안경을 잃고 귀가하는 날, 안경 없는 맨 얼굴을 보고 아내가 묻는다. “또 그 안경을 어디서 언제 잃어버렸소?” 정말 코믹한 아내의 질문이다. 세상에 자기 물건을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짐짓 일부로 잃어버리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물건을 잃었을 때는 그 물건과 함께 시간과 장소도 잃게 마련이다. 이것을 잃음의 삼중주(三重奏)라 할까. 더 나아가서 잃은 것은 자기 자신이다. 물건을 잃을 땐 자기도 깜빡하는 순간의 자기상실이 따른다. 이때는 잃음의 4중주(四重奏)라할 것이다. 혹시나 하고 내가 머문 곳을 다시 가보아도 역시나 안경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잃는 장소와 시간을 확실히 알 턱도 없지만 희미하게라도 떠오르면 그곳을 찾지만 역시나 역시이다. 물건상실보다 더 괴롭고 비참한 것은 자아상실(自我喪失)이다. 뭐니 뭐니 해도 자기를 잃은 것만큼 슬픈 것은 없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 잃어버린 자아(lost ego)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영원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학 출신자가 된 사람에겐 개인의 명예나 지위 그리고 높은 경제 대우를 받는다. 동물의 세계에서 힘센 놈이 암컷을 차지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성공한 사람이 미인을 아내로 맞고 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상 아닌가. 운동을 잘해서 유명한 금메달을 딴 사람은 명예나 부가 보상으로 따른다. 한국에서는 모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들은 군면제라는 특혜보상도 주어왔는데 지금 그 제도를 고려할 것이라 했다. 세상에는 보통 보상(補償) 때문에 돌아가는 시스템 같다. 교통사고로 죽은 자도 보상을 받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당한 부상과 죽음에도 보상이 따른다. 사람의 액션에는 거의 보상이 따른다. 식당종업원이 숟가락 놓아주고 호텔 사람이 손님의 가방 끈 하나 만져주었다고 꼭 팁이란 것이 있는데 그게 다 보상 개념에 속한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말한 이론에는 “사람들은 작은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장거리 여행에 항상 바쁘지만 영생 보상을 위해서는 한 발자국 뛰기도 힘들어 한다”고 했다. 보상 없이는 온 세상이 목석처럼 꼼짝 안하는 것 같다. 길들인 동물들이 어쩌면 저렇게 재주를 잘 부리나 했더니 그들에게도 보상이 따라 주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사람 관계와는 다르게 고
말씀이 희귀하던 시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나타나셨고, 사무엘은 그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 전파했다. 성경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라고 했고 (3:20), 본문 1절에서는 “사무엘의 말이 온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라고 했다. 단은 이스라엘의 최북단 도시이고, 브엘세바는 최남단 도시이다. 마치 한반도 전체를 의미하는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것과 같은 표현인데 지금 같은 미디어 시대도 아니고, 인터넷이 설치된 것도 아닌데 이스라엘 전체가 다 알았다는 것은 좀 과장된 표현 아닐까?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 영향을 미칠 선지자가 되었다는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말씀은 갑자기 블레셋과의 전쟁 이야기로 바뀐다. 그것도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은 전쟁이 두 번이나 벌어진다. 너무 명암(明暗) 대비가 뚜렷한 전개라서 좀 당황스러울 정도다. 다만 전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과 엘리 시대에서 사무엘 시대로 바뀌는 과도기(過渡期)였기에 엘리 시대의 결말을 정리한 것으로 본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한 엘리 가문의 영적 타락, 그 결말이 너무 참담하다. 은혜 상실이 얼마나 비참하고
한국교회가 심하게 침체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사실이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그 침체가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물론 개인적으로 한국교회의 침체는 전혀 코로나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 전부터 침체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코로나로 인해 가속화됐을 뿐이다. 2020년 연말 미국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가 세계 선진국 중심 14개국을 대상으로 1만4000명을 설문 조사했다. 코로나19가 그들의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중 미국 같은 경우는 코로나19로 신앙생활이 오히려 크게 더욱 활력을 얻었다고 답했다. 나머지 조사국들은 예전과 비슷하거나 약간 활력을 얻었다고 답했다. 반면 조사국 중 유일하게 코로나19로 인해 신앙이, 그것도 심각하게 침체되었다고 답한 나라는 한국이었다. 특히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는 더욱 심각하다. 한국교회의 50% 이상이 교회 안에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학청년부가 따로 없는 교회는 더욱 많다. 믿을만한 통계들에 의하면 현재 대학 생들의 경우에는 3% 남짓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간다고 한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교회에 대
인정(人情)은 사람이 지닌 정이다. 그것은 사람만이 가지는 사랑의 감정이다. 인정의 대상은 오직 사람뿐이다. 세상에 견정(犬情)이란 말은 없다. 돈정(豚情)이란 말도 물론 없다. 사람만이 정을 가지고 있고 사람만이 인정을 지니고 있다. 세상에서 이렇게 주고받을 정(情)을 소유한 피조물은 사람 외에 다른 피조물은 없다. 문제는 사람만이 갖도록 부여된 이 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걱정이다. 지금 인정의 향방이 문제다. 우선 향방 자체가 없는 인정도 있다. 자기만이 소유하고 끝나버리는 메마른 인정이다. 이래서 정을 줄줄 모른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런 모양도 여간 딱하다. 어떤 인정은 주기는 주되 그러니까 향방은 있는데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는 인정이다. 그런 인정은 흐르긴 하지만 흐름의 대상은 물(物)이다. 돈에게 인정을 붓고 탐욕물에 인정을 쏟고 하는 등이다. 요사이 가장 쉬운 예는 반려견을 인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 하겠다. 오죽하면 그 대상이 사람(人)이어야 하겠건만 동물(動物)이랴. 그 이유는 인정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다. 정을 줘도 받지를 않는다? 정 받을 사람이 너무 없다. 예수 하늘에서 인정을 주려 왔건만 사람들은 마다하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Abraham)은 축복의 통로였다. 은혜로 평화의 사도인 이삭(Isaac)을 얻었다. 이삭도 축복의 통로였다. 그 역시 은혜로 축복의 조상 야곱(Jacob)을 얻었다. 야곱도 대를 이은 축복의 통로였다. 그 또한 은혜로 예수의 형상인 요셉 (Joseph)을 얻었다. 축복의 물줄기가 대를 이어 흐르는 은혜로 인해 그 가문이 축복의 통로가 됐던 것이다. 어느 학자는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와 막스 죽스(Max Jukes)라는 18세기의 두 가문을 비교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뭔지를 보여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막스 죽스는 머리는 좋았지만 불신자였고 부도덕한 사람, 비슷한 처지의 여자와 결혼했지만 부부 사이가 극도로 나빴고 집안에는 알코올 중독과 도박이 끊이지 않았던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드는 예수 잘 믿는 은혜의 사람, 미국 초창기의 유명한 철학자요 신학자이자 목회자이며 미국 대각성운동의 선구 자였으며, 그 부인 역시 은혜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200년간 그 두 가정에서 나온 후손들을 보면 너무 달랐다. 막스 죽스의 506명 자손 중 310명이 거지였고, 150명은 범죄자, 그중 70명은 살인자였다. 사형당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