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교는 15세기 인도의 펀자브 지역에서 힌두교의 개혁파와 같은 성격으로 나타났다. 1885년에는 란지트 씽(Ranjit Singh)이 영국의 식민 지배를 거부하고 칼리스탄(시크왕국)을 건설할 목적으로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했고, 1984년에는 시크 교도들이 인도의 북부 도시 암(릿)사르의 황금사원을 점거하자 인디라 간디 수상이 ‘불루스타’라는 작전명으로 사원을 습격해서 시크 교도를 전멸한 사건이 있었다. 후에 간디 총리는 시크교도인 경호원에게 암살당했다. 1. 창시자와 교세 창시자 나나크(Guru Nanak,1469~1539)는 하급 카스트 출신의 힌두교 구루(스승)로서 카스트제도와 여성 차별, 명예살인 금지 등 사회개혁을 주창하고 나섰다.?그러나 1606년 무굴제국의 우호적인 왕 ‘악바르’가 죽고 ‘샤 자한’이 왕위를 계승한 후부터 심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샤 자한’은 죽은 왕후를 기념하기 위해 22년(1631~53)에 걸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웅장한 타지마할(Mumtaz Mahal) 궁전을 건축한 왕이기도 하다. 교세는 인도 국내에서는 인구의 2%인 2,500만 명 정도가 신도이며, 국외에는 영국, 캐나다, 미국 등지에 약간의 신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과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고난과 그로 인한 고통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난도 있지만 더러 어떤 것은 우리의 좁은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둔한 입술로는 설명이 어려운 고통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고난과 시련이나 아픔을 우리 편에서 손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탈무드의 말처럼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서 10리를 가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고난과 시련은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어떤 이는 믿음이 흔들리고 신앙이 식기도합니다. 그리고 “왜 나에게(why me)”라고 묻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그런 우리를 향하여 비아냥대기도 하고 대놓고 빈정거리면서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네 하나님이 왜 도와주지 않느냐”고 공격해 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난감하기도 하고 고통스러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고난과 고통의 문제를 바로 이해하고 대처해야겠습니다. 첫째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과 아픔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가 나의 죄로 인한 대가와 결
-교리와 삶- 1) 소에 대한 경외심 : 원래는 암소, 하얀 소, 다리가 다섯 개인 오족우(五足牛)를 신성시 했으나 현재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모든 소를 신성시 한다. 2) 청결과 기도 : 청결을 중시해서 기도할 때마다 몸을 씻는다. 음식을 손으로 먹는 습관이 생긴 것은 수저 등이 불결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3) 신도의 권리와 의무 (1) 권리로는, 덕행을 쌓을 권리, 재물을 소유할 권리, 삶을 즐길 권리, 삶을 초월해서 영적 승리를 얻을 권리 있고; (2)의무로는, 학생으로 배우고, 결혼해서 처자를 둔 가장이 되고, 가정과 일터를 떠나 구도자가 되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방랑자가 되는 것이다. 출가(出家) 주의 종교의 전형이다. 4) 화신(化身) 사상 베다의 주석 베단타(Vedanta)는 최고의 신 브라흐마와 풍요의 신 비슈누가 여러 번에 걸쳐 거북, 소 등 동물의 형태로, 또는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 구원의 도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당나라 불교 천태종의 본산 국청사(國淸寺)에 아미타불, 보현보살, 문수보살이 풍간(豊干), 습득(拾得), 한산(寒山)으로 화신하여 은거했다는 ‘국청삼은(國淸三隱) 전설’을 연 하게 한다. 5)
-유래와 특징- 1. 유래 기원전 2,000년경 코카서스 일대에서 유일신 창조주 ‘브라흐마’(Brahma)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유목생활을 하던 아리안(Aryan) 족이 기도서 베다(Veda)를 가지고 동진해서 인더스 강 유역에서 자연 발생적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던 힌두교도들을 만났다. 아리안 족은 유일신을 섬기면서도 힌두교의 모든 신들을 수용하고 인도의 종교와 문화에 스스로 동화하였다. 일견, 브라만교가 힌두교에 흡수된 것 같지만 브라흐마는 힌두교의 모든 신들 위에 최고의 신이 되었다. 힌두교의 교세는 2,010년 기준으로 세계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10억 3,300만 명이며, 수백 년에 걸쳐 세계 3대 종교인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세력권 아래에서도 교세가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불교를 밀어내고 민족종교가 되었으며, 네팔에서는 국교가 되었고, 방글라데시, 발리, 말레이반도에서도 교세를 자랑한다. ‘힌두’라는 명칭은, ‘인더스’의 ‘산스크리트’어(梵語) ‘신두’(Sindhu)가 ‘힌두’(Hindu)로 발음되었다는 이론이 유력해 보인다. 2. 특징 1) 다신(多神) 사상 인도는 종교공화국이라 할 만큼 여러 종교의 발상지이며 신들이 많다. 그리스
일생을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막다른 길목에 서 있는 느낌을 받아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고 탄식하며 주저앉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 주변에 그 누구의 도움의 손길도 없는 것 같은 혈혈단신의 고독함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경험은 해보지 않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시편 142편은 다윗 왕이 이스라엘 왕이 되기 전에 이스라엘 초대왕인 사울 왕의 납득할 수 없는 부당한 살해 위협으로 도망자의 생활을 하는 중 이상 피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의 답답한 처지를 토로한 시입니다. 다윗은 이 억울하고 절박한 순간을 진실하게 표현함으로서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값진 진리와 가치를 배우게 해줍니다. 본 시는 막다른 길목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자원이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막다른 길목 바로 그곳은 진심으로 기도해야 할 곳입니다. 최근 우리 주변에서 기도는 소리 내어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은 소리 내어 기도해야 들으시는가? 라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갑
4. 이야기 설교 방식 경우에 따라 이야기 설교는 지나치게 신학적으로 자유스럽다거나 아니면 비성서적인 설교 방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은 이야기 설교에 대한 이해 부족의 결과이다. 성서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진리를 전하고 있듯이 이야기 형식으로 설교를 한다는 것 또한 마땅히 하나의 설교 방식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구약의 족장들의 이야기이나, 예수님의 비유,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 관한 본문은 이야기설교를 위한 자연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야기 본문만이 이야기 설교를 위한 절대 조건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해되어 왔던 이야기 설교방식을 1980년대 들어서면서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시킨 학자는 유진 로우리(Eugene Lowry) 이다. 그가 주장하는 내러티브 플랏 설교는 수사적으로 귀납적 형식을 띄면서 하나의 성경적 스토리를 문학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성경에 소개되어 있는 일반적인 이야기들을 문학적 플랏 형식을 취함으로써 청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목적을 가진다. 로우리의 내러티브 플랏 설교 방식은 네 단계를 거치면서 진행되는데, 처음에는 청중에게 모순점을 제시하여
마니교는 ‘빛의 사도’를 자칭한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Mani, 210?-276?)가 창시한 이원론적 종교이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에서 파생된 종파였으나 비교적 분명한 교리와 체계화된 조직으로 고유한 종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창시자와 교세 마니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중간 즉,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에서 태어나서 24세 때 신의 계시를 받고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아브라함과 붓다와 예수와 조로아스터로 이어진 예언자 중 마지막 예언자라고 주장했다. 마니는 말년에 페르시아 황제로부터 “빛의 사도의 고통”이라고 불린 26일 간의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마니의 사후에도 교세가 확장되어 북아프리카를 거쳐 4세기에는 로마와 스페인에 까지 교회가 세워졌고 기원 7세기에는 중국 황실에 선교단이 들어가 포교 활동을 허가 받았으며, 8세기에는 위구르의 국교로 채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9세기에는 중국에서 마교(魔敎)로 몰려서 종교 활동이 금지되었고, 10세기에는 사라센제국(Saracens) 아바스 왕조(Abbs, 750-1258)의 박해를 받아 교세가 크게 축소되었고 14세기 이후에는 지상에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사라센’은 시나이
예수그리스도와 성령 지난 호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기능론적 측면에서 “생명의 영”과 “살려주는 영”이라는 어구를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바울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고대교회사에서 발전한 삼위일체론적으로 제시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을 동일시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영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인들 안에 내주하시며 행동하시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 안에 내주하시며 행동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오셔서 내주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실행자를 가리키는 점에서 동일시되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구원의 실행자인 성령의 역할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역할을 하는 성령을 “생명의 영” 혹은 “살려주는 영”으로 제시했다. 바울이 제시하는 성령의 역할 중에서 그가 또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계시의 역할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과
위대한 일들은 힘이 아니라 인내로 성취됩니다. 하루 세 시간을 걸으면 7년이 지나면 지구를 한 바퀴 돈 것과 같은 거리를 걷게 됩니다. 사무엘 존슨의 말입니다. 하루 세 시간씩 7 년을 걸으면 지구 한 바퀴를 걸을 수 있다니 놀랍기마 합니다. “승리는 가장 많이 인내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나폴레옹이 말했으니 한 번 믿어볼만 합니다. 지금은 여러 면에서 인내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날씨 및 주변의 상황이 무엇보다 인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 현실적인 여건은 인내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인내에 관한 교훈의 말씀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21:19),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우리가 비록 능력도 있고 머리도 비상하고 갖가지 재주가 있다고 해도 끝까지 인내하는 마음과 자세가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디모데에게 권면했습니다(딤전6:11). 주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도 “인
본문은 바울 사도께서 로마에서 2차 투옥을 당하셨을 때 기록한 서신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로마 감옥에 1차 투옥 되셨을 때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가운데서 2년 동안 임대한 집에서 친구들을 초대해서 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셨으며 때로는 병사들에게도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조건과 상황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바울 사도의 주변은 극한의 상황 뿐 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낳은 아들 디모데에게 유언장과 같은 서신으로 급히 올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드로아에서 로마로 올 때에 무슨 이유 때문인지 서둘러 오느라 드로아에 세 가지 필요한 것들을 맡겨두고 왔습니다. 그것을 디모데가 올 때 가져다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King James Version에서 “네가 올 때 내가 드로아에서 가보의 집에 맡겨 놓은 겉옷을 가져오고 또 책들을 가져오되 특별히 양피지들을 가져오라”(13)고 했습니다. 옥중에 있는 바울 사도에게 유익하며 필요로 하는 것들이 겉옷(CLOAK)과 책들(BOOKS) 그리고 양피지(PARCHMENTS)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세 가지가 그리스도인이나 모든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것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 가지
대체 ‘목회’란 뭘까? 쉬운 걸까? 어려운 걸까? 사소한 걸까? 위대한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목회는 어렵지만 위대하다. 얼마 전, 결혼생활에 대한 주제로 주일 말씀을 나누며 묵상해 본 것인데, 생각해보니 결혼도 목회도 서로 통하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별히 결혼생활에 대한 두 가지 오해를 생각해 보자. 첫째, 사람들은 결혼을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것과 같다”고만 여기는 경향이 많다. 물론 맞는 말이다. 인생에 이보다 더 가슴 뛸 일이 어디 있나? 죽도록 사랑하는 이와 죽기까지 함께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벅차다. 게다가 더 넓은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까지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답고 행복하랴. 하지만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것에는 꼭 낭만만 있는 건 아니다. 거기 살려면 각오할 것도 많다. 예컨대, 초원이다 보니 비가 오면 질퍽거리는 길을 다녀야 하고, 새로 산 신발도 더러워질 수 있으며, 시도 때도 없이 돋아나는 마당의 잡초 역시 수시로 뽑아주어야 한다. 온갖 벌레와의 전쟁도 치러야 하고, 소똥 냄새에도 적응해야 하며, 외로움도 달래야하는 수고가 동반된다. 그것을 해낼 각오 없
연구자는 설교의 다양한 방식들 가운데 네 가지 방식을 중심으로 논하면서 어느 장르에는 어느 방식만이 유일하다고 하기 보다는 가능한 방식들을 복수로 제시하였다. 1. 키워드 방식(Keyword Method) 키워드 방식은 일반적인 설교 작성 방식 가운데 가장 보편적이다. 도날드 해밀턴(Donald L. Hamilton)은, 키워드 방식을, 먼저 본문을 기계적(혹은 구문론적으로)으로 펼쳐서 중요 아이디어나 개념들을 파악하고 그것들이 본문의 주제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파악함으로써 하나의 주제를 위하여 주요 개념들이 설교 개요를 형성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키워드 방식을 위한 전개 과정을 12단계로 구분하면서 본문의 중심사상으로부터 주제, 명제, 키워드 확정, 개요, 나아가 설교의 제목에 이르는 설교작성 단계를 밝히고 있다. 특이한 것은 명제에서 키워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질문형식으로 명제를 제시하고 그에 대하여 키워드를 통하여 답변을 내림으로써 설교 작성은 키워드와 긴밀한 연관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키워드 방식에서 본문의 중심 사상은, 본문이 무엇에 관한 것이냐를 말한다면, 주제는 그 아이디어에 대하여 본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라암셋에서 출발해서 숙곳을 거쳐 에담을 지나고 바알스본앞 비하히롯 사이 믹돌에 진을 쳤을 때 애굽왕 바로가 군대를 몰고 뒤쫓아 왔습니다(민33:5~7절, 출14:2~6). 그 모습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로 반응을 했는데 심히 두려워 하나님께 부르짖었고(출14:10절), 모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11~12). 그들의 부르짖음은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불신앙적 염려와 고통스러움으로 외친 비명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질적인 만성질환이 있었는데 원망과 불평입니다. 출애굽기 15:22~24에 보면 홍해가 갈라져서 쫓기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극적으로 살아나고 이어서 뒤쫓아 온 애굽 군대가 홍해바다 속에 수장이 되는 놀라운 기적을 보고서도 수르광야에서 3일 동안 물을 못 마셨다고(물이 써서 마라라고 함) 모세를 향해 원망을 합니다. 이게 인간의 간사함입니다. 믿을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이어지는 16:1~3에도 엘림에서 떠나 신(zin)광야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또 모세를 향해 원망을 합니다. 출애굽한 후 불과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 이유는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고기가마 곁에서 떡을 먹던 때를 그리
자유교회(Free Church)는 국가교회(혹은 시교회)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교회가 국가교회가 된 시발점은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313년에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신교의 자유를 허락하면서부터였다. 이는 한편에서는 기독교회나 복음이 로마제국을 정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기독교회가 세속권력과 결탁하여 타락(Fall of the Church)의 첫걸음을 내디딘 사건이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가 국가권력과 바람이 난 것이다. 군사적 정치적 통일을 이룬 콘스탄틴 황제는 아직도 로마제국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당시 급성장하고 있던 기독교 세력에게 손을 뻗쳐 자신의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교회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를 “콘스탄틴의 공생”(共生, Constantine Symbiosis)라고 부른다. 국가가 교회와 공생을 하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어떤 이들은 “국가와 교회의 결혼”(結婚, Marriage)라고도 하고 “국가와 교회의 합금”(合金, Amalgamation)이라고도
최근 한국신약학회에서 “신약성서와 하나님”이란 주제로 발표한 침례신학대학교 장동수 교수(신약학, 사진)는 한국 신학계에서 신약과 구약의 통합연구와 함께 하나님 중심(나라)의 연구가 이뤄져야 함을 강조했다. 장동수 교수는 해외 신학자들의 견해를 근거로 들면서 하나님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거나 무시되는 경향을 지적했다. 또한 이러한 이유를 △뚜렷한 그리스도 중심성 △신약의 하나님 언급의 간접성과 연결지어 설명했다. 장 교수는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 및 저자들의 동시대 유대교의 하나님 개념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신약에는 하나님의 주제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없고 오히려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 여타의 신학적인 주제들을 다르면서 하나님을 언급할 뿐”이라고 밝혔다. 신약의 27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책이라는 타이틀로 시작되고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라는 타이틀로 시작된다. 4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며, 사도행전은 그가 열방에 증거되며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이고 나머지 책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들에게 보내진 서신들이다. 이렇듯 신약은 하나님보다 기독론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