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예수로부터 세상으로 파송 받은 그리스도의 대사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8:19~20)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의 모든 삶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한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비슷하게 살 때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예수를 볼 수 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5~16) 그리스도인이 착한 행실을 통해 빛을 비출 때 주변의 사람들이 감동받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유창한 말로 성경이야기를 하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것은 결혼은 유지하는 것이다. 어릴 때는 신데렐라가 한번 춤추고 사랑에 빠진 왕자와 결혼하는 데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그저 재미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그 신데렐라가 결혼해서 왕자와의 배경 차이, 문화 차이, 성격차이, 왕비로서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부담 등등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 것인지, 과연 행복할 것인지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결혼을 골인하면서 다 끝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아는 것이다. 로맨틱한 사랑의 황홀한 경험에 이어서 화장실을 청소해야 하고, 아기 기저귀를 갈아야 하고, 매달 날아오는 청구서에 돈을 지불해야 하는 삶의 뒷모습에 맞닥뜨린다. 구원의 기쁨과 은혜에 충만해 사역에 헌신하고 시작할 때는 신난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서 커피를 내리는 일도, 교회 쓰레기통을 치우는 일도 그저 감사하고 은혜롭다. 하지만 그 사역을 계속한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열정으로 시작한 일이 마치 김빠진 콜라 맛처럼 느껴지면서 아무 감정 없이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 거룩하고 멋진 순간 뒤에는 훨씬 많
오늘도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각자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인정 받기위해서 어떤 사람은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성공하기 위해서 제각각 목적을 가지고 일한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우리의 사람을 다시 한 번 생각 해 보게 하는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말씀은 첫째는 생존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돼야 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일 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무엇을 하든지” 라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의미다. 그대가 공부를 하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예술을 하든지 운동을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복음사역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이다. 내가 하는 일을 성공 하느냐? 못하느냐? 이일로 내가 인정받느냐? 못 받느냐? 돈을 많이 버느냐? 못 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안되느냐? 가 더 중요한 것이다. 미
상담소를 찾아와서 털어놓는 고민 중에 하나로, 너무 많은 일에 압도되어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을 나눌 때가 있다. 집에 손님이 온다거나 학기말 고사가 다가올 때, 직장에서 쫓기는 프로젝트가 있을 때, 마감이 다가올 때, 할 일이 겹겹이 쌓이고 밀릴 때, 이 모든 해야 할 일에 깔려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든다. 걱정해야 할 일이 많고, 할 일이 끊이질 않는 듯한 상황을 보면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도록 압도된다. 예를 들어 손님이 집에 온다면 음식을 할 계획을 세워야 하고, 청소를 해야 하고, 계획대로 장을 봐야 한다. 장도 미국에서는 한 군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국소형마켓, 대형마켓, 한국마켓 등 세 군데를 돌아야 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실제로 몇 가지 요리를 해야 하고 손님이 오기 전 부엌을 말끔히 정리해야 한다. 이렇게 손님 맞을 준비를 하면서도 당장 먹을 끼니를 준비해야 하고 평소에 해오던 일들을 해야 한다. 아이들을 씻기고 숙제를 봐줘야 한다든지, 여기저기 레슨에 데리고 다녀야 한다. 이 모든 일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이미 압도되어 온갖 짜증을 다 부리고 집안 분위기는 살얼음판이 된다. 대학생들이 상담을 하러 올 때, 듣는 과목들이 줄줄이 F를 맞
영어에서 “cutting off your nose to spite your face”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자신의 얼굴에 앙심을 품어서, 혹은 괴롭히려고, 자신의 코를 벤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서 앙갚음을 하려고 하는데 결국은 스스로만 괴롭히고 만다는 뜻의 숙어이다. 과연 누가 자신의 얼굴이 맘에 안 들어 코를 베어내려 할까 싶지만 사실 우리가 무심코 수없이 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늘 부부싸움을 하는 부모님이 미워서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세상이 못마땅해서 계속 술로 푼다면 이 또한 자신만 상처 내는 행위이다. 교회에서 누군가에게 화가 난다고 아예 예배를 안 드릴 수도 있다. 결국에는 누군가 때문에 ‘시험 들어서’ 혹은 ‘삐쳐서’ 주님께 마땅히 드릴 찬양을 포기하고 말씀으로 스스로를 새롭게 할 둘도 없이 귀한 기회를 포기한다. 상대 때문에 자신이 손해 보는 짓이다. 우리는 때로 정말 참기 어려운 감정에 휘말린다. 너무 화가 나거나 상처를 받아 잠이 오지 않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살다 보니 열받을 일이 많다. 분명히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온 사
한국에서 상담이 비교적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을 보지만, 아직도 상담소의 문턱은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이민을 왔던 그 당시의 문화를 고스란히 가지고 사는 해외 거주자들에게 상담이란 왠지 수치감과 의구심을 유발하는 단어이다. 의사를 보러 간다는 말은 시장 간다는 말처럼 쉽게 이야기되고 정보를 나누지만, 상담을 받으러 간다는 이야기는 숨기고 싶다. 미국에서 자란 우리의 자녀들이 상담이라도 받고 싶다고 하면 바로 가슴이 철렁하다. 정신력과 영성으로 이겨야지, 뭘 상담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말린다. 그래서 어쩌다가 상담을 요청하는 ‘희귀한’ 한국 분들의 사정은 의외로 심각하다. 자녀와의 갈등이 극에 달해 가정폭력에 노출되고, 아동보호기관에게 아이를 빼앗길 위기에 있기도 하다. 이미 한쪽에서 이혼을 결심한 경우 법적인 수속을 밟을 때쯤 상담소를 찾기도 한다. 중독으로 인해 가족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이미 모든 것을 잃을 때에야 문제를 깨닫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과 치유의 역사들을 보지만, 이미 상처 입고 신뢰를 잃은 가족과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는 돌이키기 쉽지 않다. 기다리다가, 괜찮다고 자위하다가, 호미로 막을 일에 가래가 필요하
현대인들은 직장이나 사회가 짜놓은 스케줄에 의해 무척 바쁘게 살고 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기계의 톱니바퀴 돌아가듯 돌아가는데 나 혼자 빠질 수도 없고 남들은 열심히 달려가는데 나만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에 눈치를 보며 경쟁하며 살다보니 스트레스가 쌓이고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럴 때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늘 하는 일이 아닌 다른 것을 해봄으로 몸도 마음도 충전할 필요가 있다.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것이 취미생활이다. 옛날에는 “취미가 뭐예요”라고 질문 하면 흔히 하는 말이 독서나 음악 감상 이라고 했는데 오늘날은 취미도 다양하다. 취미생활은 스트레스를 해소해준다. 직장인이나 개인 사업자나 학생이나 가정주부나 사람들은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병이 된다고 하니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취미생활이 좋다. 생계와 직접 관련이 없고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재밌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신에게 잘 맞는 취미를 찾으면 신세계를 만난 것처럼 의욕이 생기고 재미에 빠져들게 되며 성취감도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이렇게 좋은 걸 왜 몰랐던가 싶을 정도로 그 것을 하는 동안은
한자 사람인(人)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양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서로 기대며 더불어 살아야지 혼자 살 수 없다. 돈이 많다고 대궐 같은 집을 짓고 그 집에서 혼자 맛난 음식을 먹고 비싼 옷을 입고 산다고 재미가 있겠는가? 돈은 남을 위해 쓸 때가 즐겁고 지식은 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보람이 있다. 맛난 음식이 있어도 같이 먹을 사람이 없고 명품 옷을 입어도 봐주는 사람이 없고 해박한 지식이 있어도 들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삶은 하나도 즐겁지 않다. 인생을 즐겁게 살려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한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편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신 것은 다투고 반목하지 말고 서로 연합하여 더불어 즐겁게 살라는 말씀이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들어라 더불어 살기 위해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들어야한다. 들며 날며 인사정도 하는 이웃이아니라 이웃사촌이 있어야한다. 멀리 있는 친척 보다 이웃사촌이 났다는 말이 있듯이 좋은 이웃은 친척보다 형제 보다 더 좋을 수 있다.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
교회를 옮기는 일은 절대 쉽거나 간단한 일은 아니다. 자신이 속한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데 따르는 상실감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직장이나 다른 일로 그 지역 교회를 멀리 떠날 때는 그나마 아쉬움이 깊다. 그러나 한 지역에 계속 살면서 교회를 옮긴다는 이야기는 그 상실감을 상쇄할 만큼의 실망, 상처, 갈등이 얼룩진 선택이기 마련이다. 상처받아서 떠나고, 또 그만큼 상처를 남기고, 상처를 준 후에 떠난다. 긴 싸움 끝에 마치 이혼을 선택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 일은 가족을 바꾸는 일처럼, 가는 사람, 남는 사람, 모두에게 힘이 든다. 다른 교회에서 오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 교회는 사람들이 차가워요.” “그 목사님은 사랑이 없어요.” “말씀이 은혜가 안돼요.” “심방을 안 해요.” “장로님이 다 맘대로에요.” “신앙에 본이 될만한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새로운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요. 친구가 안돼요.” “찬송가를 안 해요. 찬양이 은혜가 안돼요.” “교인들이 너무 무례해요.” 그런데 바로 똑같은 그 이유 때문에 또 교회를 떠나간다. 믿음의 공동체에 자신은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올 때나 떠날 때나 들을 수
사람들이 삶이 즐겁지 못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내가 입은 옷과 남이 입은 옷을 비교하고, 내 차와 남의 차를 비교하고, 내 집과 남의 집을 비교하고 모든 것을 비교하므로 행복을 잃어버린다. 비교하는 사람은 남보다 낫다고 생각되면 우월감으로 교만하게 되고 남보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열등감으로 위축되고 불행에 빠진다. 불만 없이 잘 살던 아내가 오랜만에 동창회 갖다 와서는 “순자는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했는데, 남편 잘 만나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왔더라.” “영희 남편은 이번에 사장으로 승진했다더라.” “혜선이는 45평으로 이사 간다더라.” 등등 학교 다닐 때 별 볼일 없던 것들이 명품 옷에 명품백 들고 고급 승용차 몰고 왔는데 나는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면서 남편에게 불평을 하며 즐거움을 잃어버린다. 자녀들에게도 “누구네 아들은 전교 일등 했다는데, 누구 딸은 명문대 간다는데, 니들은 뭐하냐” 며 자녀들을 남들과 비교하여 기분 나쁘게 만든다. 자기 남편과 친구 남편을 비교하고 자기 아내와 친구 아내를 비교하며 불평하다가 부부 싸움을 하고 며칠씩 말도 안하고 지옥으로 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페이스북에 올라온 한 목사의 글에서 목회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가 목회(木灰), 즉 나무가 다 타서 생긴 재라는 뜻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에 유달리 큰 울림이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한마디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무언가를 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참된 교회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패기 어린 주장을 펼치는 열정 어린 신학생들에서부터, 한국 사람이라고는 몇 가정이 채 되지 않는 시골교회에서 은퇴의 나이가 지나도록 섬기시는 선배 목사님들까지 목회자와 사모님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이상하게도 목회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논제 앞에 할 말을 잃어간다. 대형교회라는 축복과 짐을 동시에 지고 부러움과 질타의 대상이 되는 유수한 기독교계의 리더들도, 일주일에 10번이 넘는 설교에 교회 청소까지 맡아하면서 따로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않으면 생활이 안 되는 작은 지역교회 목회자들도, 뜻하지 않은 일로 교회의 분열이나 급작스런 사임의 아픔을 경험하는 목사님들도 하나같이 목회라는 여정에서 두렵고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경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 응답으로 순간순간 신나고 벅차기도 하지만, 타들어가는 나무처럼 그 심장이 까매져 갈
사모님들의 옷은 그 교회에서 사모님들이 맡은 역할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갓난아기들을 주로 본다면 정장은 보통 거추장스러운 차림이 아니다. 아이들이 우유 먹고 어깨 위로 토하고, 때로는 기는 아이와 함께 바닥에 철퍼덕 앉아야 하기 때문이다. 부엌에 많이 들어가야 하는 사모님도 소매를 걷고 집에 가서 물빨래할 수 있는 옷차림이어야 한다. 안내를 하거나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이 많은 교회이거나 할 때는 아무래도 얌전한 정장 차림이 분위기에 어울린다.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을 돕는 사모는 청바지 차림이 사역에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친근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성도가 그때그때 다른 상황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옷을 입어도 그 옷의 의미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편안한 차림이 어떤 성도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섬기는 사모의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 이 똑같은 편안한 차림이 어떤 사람에게는 시험 거리가 된다. 사모가 예배를 경시하는 처사로 비치기 때문이다. 정장 차림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고 점잖게 여겨진다. 그런데 맵시라도 있어서 옷이 조금만 비싼 듯 보이게 되면 사치스럽고 쓸데없이 화려한 철없는 사모가 된다. 무
단순하게 살아라. 인생을 즐겁게 살려면 삶을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나뭇가지에 연 걸리듯이 여기 저기 연결된 곳이 많고 이것저것 벌려놓은 일이 많고 복잡하면 쉴 틈이 없고 여유가 없어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일에 끌려 다니는 처지가 되고 피곤한 인생을 살게 된다. 필자도 복잡한 것을 싫어하지만 살다보면 자꾸만 복잡하게 되는 것을 본다. 사회적으로도 여기 저기 직함이 하나씩 늘어나고 직함 때문에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경우들이 많아진다. 책상 위를 정리 해놓고 나도 며칠만 지나면 책장에서 꺼내놓은 책과 매일 배달되는 우편물들이 책상위에 수북이 쌓여 복잡해진다. 결국은 버리면서도 혹시나 필요 할까 혹시나 보게 될까 해서 두다보니 자꾸 복잡해진다. 그래서 한 번씩 버릴 것은 버리고 정리를 하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아 버리지 못하고 두다보면 정리하는 것도 일이다. 오랫동안 이사하지 않고 한집에서 오래 산 집은 집안이 복잡하고 살림살이가 많은데 몇 년마다 이사를 한집은 집안이 정리 돼있고 살림도 단촐하다. 이사할 때 마다 불필요한 물건들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집안에는 쓰지도 않으면서 버리자니 아까워서 쌓아두고 있는 물건들이 많아 복잡하고 집이 비좁아서 더 넓은
교회에서 사역하는 많은 일들을 볼 때 여성들의 헌신이 너무도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왜 이처럼 여성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사용하시는지 생각을 해보았다. 여성(女性)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존재이다. 흙으로 빚어서 구운 그릇을 토기(옹기)라고 한다. 제법 큰 독이라도 그 값은 별로 비싸지 않다. 그러나 흙에다 물소 뼈를 섞어서 구운 그릇을 본차이나(bone china, 骨灰)라 하는데 그 크기가 작아도 그 값이 토기와 비교할 수 없이 비싸고 뼈의 배합율이 높을수록 값은 한층 더 고급이며, 비싸진다. 그러므로 흙으로 빚어 만든 남자와 갈비뼈로 만들어진 여자와는 그 값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는 100% 본차이나이기 때문이다. 어떤 물건이든 하찮은 것이라 생각되면 함부로 취급하게 되지만 비싼 것인 줄 알면 더 소중히 다루게 된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보다 약하지만 비싸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기도 하다. 본차이나인 여성들을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 남자들은 뚝배기 그릇인데 값이 한참 떨어진다. 인명재처(人命在妻) 사람의 운명은 아내에게 있다. 처화만사성(妻和萬事成) 아내와 화목하면 만사가 순조롭다. 순처자(
다 같은 시간인데 어릴 때는 한 주도 길고 일 년도 길고 세월이 더디 가는 것 만 같더니 중년이 지나고 나니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세월이 너무 빨리 가서 어지러울 지경이다. 40대는 40km로 달리고 60대는 60km로 달리고 80대는 80km로 달린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은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 질병과 사고가 많은 세상이라 여차하면 평균 수명도 못 살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먼저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2014년 만물이 소생하는 춘삼월에 승객 239명을 태운 말레이시아 항공기가 베이징으로 가던 도중 실종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호주인 봅 로튼(57)씨는 시각장애인인 부인 캐시(53)의 시력이 더 나빠지기 전에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을 거처 홍콩과 베트남까지 여행을 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고 기회는 언제나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며 짧은 인생 후회하지 않도록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한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