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면서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니는 낭인 신세가 된 다윗은 광야의 아둘람 굴로 은신합니다. 그 소문이 퍼지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모였는데 환난당한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 등 약 400명 가량 됐습니다. 사실 다윗 자신도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을 때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를 의지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가 아둘람이 돼야 합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니까 어떤 사람도 예외없이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지만 특히 교회는 병들고 약하고 고통가운데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 들이 와야 하는 곳인데 오늘날 교회가 그렇지 못함을 봅니다. 기득권층의 편에 서있거나 힘있는 자들의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에돔사람 도엑이 다윗을 보았다고 사울에게 밀고를 했습니다. 도엑은 간신이었는데 사울의 목자장이었습니다. 사울에게 입속의 혀처럼 굴던 도엑이 놉 땅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주고 음식도 주고 골리앗의 칼도 주는 것을 봤다고 한 것입니다. 사울은 도엑의 말을 듣고 신하를 시켜 제사장들을 불러놓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아히멜렉은 “왕의 신하 중에 다
성경에는 천사, 마귀, 악령, 귀신 등 하나님 외의 영적 존재에 대한 기록이 많다. 또한 성경은 세상을 선과 악을 상징하는 빛과 어둠의 대결장소이며 예수께서는 어둠의 권세, 즉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해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예속되기 때문이다(요한1서3:8). 악령(귀신)은 마귀의 하수인들로서 자기들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베드로전서5:8). 악령은 세상의 신이요(고린도후서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며(에베소서2:2), 아담과 하와와 사울 왕과 유다를 유혹했고,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고(마태복음8:28~34), 세상에서 악을 증진시킨다(마태복음13:39). 성경은, 악령은 사람의 극단적인 감정의 기복을 노린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악령은 사울 왕이 시기심으로 심한 불안에 빠져 평상심을 잃었을 때 그를 유혹했고(사무엘상16:14), 바벨론과 두로 왕의 교만이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을 거역 하도록 부추겼고(이사야14:12~14; 에스겔28:12~17), 가룟 유다가 돈을 탐했을 때 그를 사로잡았다(요한복음12:2). 친구와 가족을 배반하고 부당한 방
서신서의 저자인 바울과 야고보, 베드로, 유다 등 저들 이름 앞에는 수식어로 즐겨 썼던 공통된 단어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단어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라고 강조함에 있어서는 저들만의 신앙 철학이 삶의 배경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상시에 성경책을 읽지 않을 때에는 제 책상 위에 달아둔 바구니 속에 늘 올려놓습니다. 이렇게 하게 된 동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데에서 발단이 됐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천장에 구멍을 뚫고 끈에 바구니를 달아둔 후 하나님 말씀을 늘 그 속에 보관하며 지냅니다. 제가 이러한 삶을 살아가면서 한 가지 깨달아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어찌 신앙생활을 태만히 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수식어를 자신의 이름 앞에 늘 붙이고 사는 사도들의 삶을 볼 때 “하나님의 종”이라는 본질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저렇게 강조하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들의 이름 앞에 “하나님의 종”이라는 수식어를 늘 붙이고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참된 종의 삶을 살지 않았겠는가라는 생각도 하게
지난 하반기부터 우리나라는 극심한 갈등과 반목으로 국민들의 마음은 갈라지고 어느 편에 서야할지 조마조마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이념이나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 사회, 개인의 모든 상황을 건지시며 회복시키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십니다. 시편 107편은 우리 인류가 처한 모든 고난과 어려운 상황을 요약해서 묘사해 주고 있는데 인간은 누구나 이 네 가지 상황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네 가지 상황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 기록된 네 가지 상황을 살펴보면 첫째, 인간은 광야 사막을 여행하다 길을 잃은 존재입니다. 둘째, 인간은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쇠사슬에 매인 존재입니다. 셋째, 인간은 미련과 어리석음 때문에 고통당하는 존재입니다. 넷째, 인생은 바다에서 광풍을 만나 상황을 스스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 네 가지 상황은 우리 인류가 겪는 보편적 고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의 상황 앞에서 무기력하고 좌절과 고난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해 줍니다. 하나님은 이런 처지에 있는 국가, 사회, 개인을 그 가운데서 건져 주시고 회복시키시는
본 기고글은 침례신학대학교에서 2016학년도 학위수여식에서 목회신학박사를 수여받은 김종이 목사의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본 갈라디아서의 구원론” 논문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 연구목적 본 논문의 목적은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을 연구하려는 데 있다. 전통적으로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요약본으로 이해된다. 갈라디아서의 주된 근거는 갈라디아서 1~2장에서 강조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 때문이다. 즉,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갈라디아서의 핵심내용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에 근거해 마땅히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의의 은혜를 주셨고,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시는 하나님의 법정 행위를 보여주셨다는 이신칭의의 구원론에 있다. 이신칭의는 역사의 중요한 흐름에서 구원론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로 작용해 왔다. 이 이신칭의의 교리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종교개혁의 주요 주제들 중 가장 중요하게 취급됐던 이신칭의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갖는 함의가 기독교의 주된 교리들인 칭의, 은혜, 예정을 이해하는 근간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 죄 있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설교를 준비하다 지난 한 원고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있었던 곳이 미국 중부 미주리 주(Missouri)였다. 그래서 그곳의 이야기라 더욱 감동으로 읽었던 내용이었다. 오래 전 미주리 주에 있는 50여명이 출석하는 시골의 작은 마을 교회의 이야기다. 그 동내 미용실에 찾아온 손님들이 모두 삭발을 원해서 물으니 그 교회 성도들이었다. 처음엔 이상한 광신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연을 듣고 감동한 미용사가 방송국에 알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단다. 사연은 그 교회에 사랑을 받던 한 소녀가 암 투병 중이었고, 항암치료를 하며 교회에 나오지 않는 소녀를 방문한 목사와 성도는 밀어버린 머리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목사와 모든 교인들이 머리를 깎기로 결정한 것이다. 방송국의 중계를 준비하며 여중생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에 주일날 아침에 소녀의 엄마는 소녀를 간곡히 설득해 모자를 쓰고 교회에 데리고 나왔다. 모자를 쓰고 교회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녀는 교회에 앉아 있는 모든 교인들의 빡빡머리를 보고 몸 둘 바를 몰라 하다 결심을 한 듯 모자를 벗었다. 그 광경을 중계
웬만한 교회에는 모두 찬양대가 있어서 주일예배를 위해 정성을 다해 준비한다. 국가적으로 음악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찬양대도 고전적 합창곡이나 찬송가보다는 새롭게 편집, 편곡된 것을 즐겨 부른다. 이번 주간에는 찬송가와 합창곡의 선택에 대해 상고하고자 한다. 찬송가 선택 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결혼식 축가로 <바우고개>를 부른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지난날의 임을 그리는 내용이므로 결혼식에서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찬송가 선택에도 이와 같은 경우가 흔히 있다. 목회자는 신년예배나 새학기 개강예배에서 “내 본향 가는 길 보이도다. 인생의 갈 길을 다 달리고 땅위의 수고를 그치라 하시니”(607장)를 부른다든가 어린이의 생일 축하예배에,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 귀중한 보배 하늘나라 두시려고 거두시겠네”(564장) 같은 찬송가를 선택하지 않도록 살펴야 하겠다. “내 본향 가는 길”은 땅위의 수고를 그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므로 새롭게 출발하는 마당에 부르기에는 부적절하며,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 귀하신 보배”는 죽은 어린이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거두신다는 위로의 찬송이므로 생일날과는 맞지 않는다. 오래 전에 필자
보통 드라마나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시청자들이나 관객들은 마음에 큰 위로를 받는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극복한 주인공들이 마침내 큰 행복으로 보상받는 것을 마치 시청자들이나 관객들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행복으로 투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은 그것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 잠자는 백설공주를 깨워 결혼한 왕자가 왕이 되어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게 됐다면, 백설공주에 관한한 해피엔딩이 아닐 수 있다. 알렉산더대왕이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날 때에는 해피엔딩으로 보일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30대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는 알렉산더의 죽음과 그의 죽음 이후 제국이 세 조각으로 찢어지는 역사적 비극까지 영화가 계속된다면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자신의 아들과 딸을 포함한 약 90명에 달하는 왕족들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해피엔딩을 이뤘지만, 무려 3,000명에 달하는 남창들과 놀아나다가 측근들의 돌아섬으로 인하여 15년 만에 본의 아니게 황제의 자리를 내려놓아야 했던 역사는 본인에게 있어서는 해피엔딩이 아닐 것이다. 핵무기를 개발하고, 그것을 경량화하고, 사거리를 확대하고, 추적이 어려운 이
6. 본문의 어조 분석(Text’s Tone Analysis)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성과 의지와 감정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 성경 저자는 이성뿐만 아니라 감성을 가지고 본문을 기록했다. 서든 침례신학교 설교학 교수인 헤셀 요크(Hershael W. York)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오히려 성경 저자의 감정적 무드와 상의하지 않는 파토스는 위험할 정도로 조작적이며 기만적이다. 성경의 영감된 로고스를 함부로 고쳐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성경의 파토스를 변경할 자유가 없다.” 성경의 내용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영감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전달과 그 열정”도 영감받았다. 따라서 성경을 주해할 때 성경 저자가 그 본문의 메시지와 함께 담고 있는 “본문의 무드(textual mood)”를 파악하고 설교를 작성하고 전달할 때도 이러한 감성적인 어조를 반영해야 한다. 성경본문은 여러 어조를 담고 있고 다양하게 전달이 되고 있다. 한 본문을 하나의 어조로 단정 짓기는 힘들지만 본문에 주도적으로 흐르고 있는 대표적인 감정을 정하는 것은 설교의 중심 생각을 정하는 것과 같이 중요하다. 더욱 세분화하여 분류할 수 있지만 대표적인 어조는 다음과 같다. “비평적,
우리는 지구촌이라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좋은 시대에 태어나 예전의 세대가 누리지 못한 혜택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지구가 하나의 마을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요즘, 어디를 가나 한국인을 볼 수가 있고 또 어디서나 만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나라와 민족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모든 게 하나로 뒤섞이는 시대가 되어 음식도 문화도 융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존재하는 나라와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특정지역이나 나라에 가면 그곳의 문화와 매너를 알고 행동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고 하나가 되어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고 어울릴 수가 있게 됩니다. 문화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고 오랜 시간을 걸쳐 형성된 것이므로 그 배경을 알고 그들의 전통을 준중해주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는 게 중요합니다. 대체로 아르헨티나는 유럽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세운 나라이기에 유럽의 문화적인 전통과 유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우리나라보다 경제력은 조금 낮을지라도 문화적인 수준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모르던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것입니다. 가끔은 스스로 대견스럽게 느껴지게 하기도 하고, 자신감을 갖게 해주기도 합니다. 사실은 신앙생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은혜로 복음과 성경의 진리 말씀이 믿어지는 바람에 구원에 이르고 감격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전적 은혜의 기간이 지나고 나면 공짜로(?) 믿음이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말씀도 좀 규칙적으로 읽고, 기도도 정한 시간 드리고, 믿음의 지체들과 적절한 교제의 대가를 치러야 은혜의 삶이 마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말씀의 참된 의미도 하나씩 깨달아 가고, 무턱대고 믿어 넘기던(?) 진리의 말씀이 이해되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때, ‘이런 게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큰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확실한 진리의 말씀이지만, 지식은 그 구원받은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강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강사는 강의를 시작하면서 대뜸 “감기에는 어떤 약을 먹어야 하나요?”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청중들은 나름 먹어본 감기약 이름들을 앞다투어 불러댔습니다.
본문은 좀 이상한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원망하니”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성장과 원망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장, 열정, 낙관 이런 말은 같은 의미지만 불평, 원망은 반대 의미입니다. 하지만 교회사 가운데 가장 모범적으로 성장했던 교회에 원망과 불평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는지 그 원인을 찾아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아낸 예루살렘교회를 우리도 모범삼아야 하겠습니다. 성장하는 교회에도 갈등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은 교회역사에서 “밀월의 시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5:1~11에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그리고 6장에서 예루살렘교회는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이제 헬라파 유대인들까지 교회 안에 상당히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도들 외에도 일곱 명의 새로운 지도자들을 세우게 되는 데 유대교회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미망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미망인들을 돌보는 것은 유대 땅에 살고 있는 친인척들의 의무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사회는 이런 미망인들을 돌보는 공
2. 문학적 배경 분석 (Literary Context Analysis) 성경은 문학적 문맥을 가지고 있다. 본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성경저자가 본문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최대한 안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문맥 연구이다. 설교할 본문을 중심으로 문장과 문단과 장과 책 전체로 확장되는 동심원을 그릴 수 있다. 이와 같이 동심원의 확장을 통하여 본문의 문학적 문맥을 분석할 수 있다. 이때 두 가지 문맥을 고려하여야 한다. 거시적 문맥(larger context)과 지엽적 문맥(smaller context)이다. 거시적 문맥은 넒은 관점을 요구한다.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책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본문의 의미와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책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 빠른 속도로 전체적인 문맥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때 전체 성경본문을 충실하게 정리한 아웃라인을 참조할 수 있다. 지엽적 문맥은 본문 가까운 곳의 세밀한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다. 선택된 본문의 앞뒤로 나누어진 문단을 확인하고 각 문단이 어떠한 관계로 나누어지고 연결되는가를 파악한다. 본문에 문맥을 파악하므로 본문의 의미를 점검하는 분석방법이다. 3. 본문의 핵심 단어 분석 (T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지혜와 계시의 성령 4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것으로서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알아보고 있다. 그 중에서 하나님 자신을 알게 하시는 지혜와 계시의 성령에 관해 지난 3회에 걸쳐 게재했다. 지난 호에는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하시는 것을 중심으로 다뤘다. 이번 호에는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심으로 알게 되는 것으로서 두 번째 내용인 “성도 안에서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가”(엡 1:18하)에 관해 다루고자 한다. 이 둘째 내용에서 핵심적인 용어는 ‘기업’으로 번역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원래 “상속(유업·유산)으로 받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기업’이란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상속, 유업, 혹은 유산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그래서 ‘기업’이란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상속(유산·유업)으로 받은 것”을 의미한다. 그 동사에서 파생한 단어는 ‘기업’ 외에 ‘상속자’라는 단어도 있다. ‘상속자’는 “유산·유업·기업을 상속으로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 동사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도 음행, 술취함, 방탕
흔히들 말하기를 종이 울려야 종이고 노래는 불러야 노래하듯 사랑은 표현해야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유교적인 영향으로 속으로 정이 있으되 밖으론 표현하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가르쳤고 우리는 그렇게 배우고 자랐습니다. 그게 옳은 것인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자연스럽거나 익숙하지 못하고 쑥스러워합니다. 마치 입으로 표현하면 경박하거나 진실되지 못한 사람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과거에 매여 살 수만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표현할 줄 모른다면 과연 사랑하는게 맞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물론 표현에 정답은 없습니다. 사랑은 수학이 아닙니다. 더욱이 복잡한 연립방정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참된 사랑은 무척이나 단순합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인데 무슨 법칙을 대입해야만 할 필요가 있습니까?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만큼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조건이나 무엇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 조건이 사라지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