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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보다 100년 앞선 선구자 … 체코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

‘시끌벅적’ 잔치로 끝난 종교개혁가 얀 후스 순교 600주년 행사 뒷이야기

복음의 진리 안에서 나는 오늘 기꺼이 죽을 것이오.”

보헤미아(체코)의 위대한 종교개혁가인 얀 후스(Jan Hus, 1372?-1415)가 화형 당하기 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마지막 권유를 거절하며 한 말이라고 한다.

후스는 체코말로 거위란 뜻이다. 그가 화형당할 적에 너희가 지금 거위를 불태워 죽이지만 100년 뒤 나타난 백조는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그 백조는 다름 아닌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 위클리프에서 얀 후스, 그리고 다시 마르틴 루터로 이어지는 믿음의 트로이카는 프로테스탄트 태동을 알렸다.


특별히 올해 2015년은 얀 후스를 기리는 순교 600주년 기념행사가 지난 75~6일 프라하를 비롯해 체코 땅 곳곳에서 열렸다. 그렇다고 후스 축제행사가 고리타분하고 엄숙하게만 진행됐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순교 600주년 후스 축제와 관련, 프라하 구·신시가지에서는 체코 필하모니 콘서트, 연극 퍼레이드, 음악회 공연 등이 시끌벅적하게 열렸고, 행사 참가자들의 열기도, 날씨도 종교개혁을 기리는 열기만큼이나 무척 뜨거웠다.

체코는 75일을 치릴과 마토데이(메토데예) 선교기념일, 이어 6일은 얀 후스 순교 기념일로 지키고 있는데 두 날 모두 공휴일이다. 휴가철과 겹치고 황금 공휴일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후스 축제 2015’600주년 기념행사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지난 199912월 로마 가톨릭교회와 체코교회가 584년 만에 화해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91218일 얀 후스가 1415년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데 대해 깊은 유감을 드러냈다.

교황은 2000년 대희년 경축행사의 하나로 마련된 얀 후스 재조명 국제세미나에서 후스의 잔인한 처형과 그로 인한 기독교인들의 분열과 갈등으로 보헤미아(체코)인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말했다.


후스 축제 2015’와 관련, 체코·슬로바키아 후스교회 토마시 부타 총주교는 초청 글에서 “‘축제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비극적인 사건이었던 그의 죽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있는 후스를 축하하는 것이라며 우리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믿음의 길, 양심의 싸움, 약자들과의 사회적 연대 그리고 인간들과 민족들 간의 우애에 대한 영감을 주는 얀 후스를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후스축제의 주요 프로그램으로는 프라하 1 구시가지 광장에서 열린 개막제 및 퍼레이드 프라하 1 오보츠니 트르흐에서 열린 어린이와 부모들을 위한 마리오네트(인형극), 사극 등 종일 프로그램 진행 얀 후스 설교교회로 유명한 베들레헴 채플에서 마스터 얀 후스 기념 감사 예배개최 성 미쿨라세 교회에서 얀 후스 역사적 연구와 의미에 대해 발표 살바토르 교회에서 에큐메니컬후스 조명 벽속의 마르틴 교회에서는 오늘날의 후스조명 등이 다채롭게 선보였다.


또한 축제 기간 동안 이라크 난민촌 사진 상영 및 시리아 전쟁 난민을 돕기 위한 모금이 행사장 곳곳에서 진행돼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앞서 설명한 대로 이번 축제의 의미와 내용을 모른다면 거의 대부분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얀 후스 순교 기념 축제인제 공연 이벤트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 만큼 이 순간을 즐겨라는 슬로건아래 자유를 만끽한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이밖에도 76일 얀 후스 순교 기념일 축제를 전후로 한 달 남짓 프라하 신?구시가지 광장에 나온 복음 전도자들의 노방전도가 눈에 띄었다. 한국과 달리 이런 복음 전도 광경은 정말 보기 쉽지 않은 일이라서 개인적인 자료보관을 위해 사진으로 담기에 정신이 없었다.


사실 체코교회의 전도는 한국교회의 노방전도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체코교회는 평소에는 거의 전도하지 않는다. 올해는 드물지만 조용하게 피켓을 들거나 주 예수 그리스도’ ‘얀 후스등만을 새긴 플래카드와 록밴드인지 재즈 음악인지 알 수 없는 찬양 등을 부르다가 시간이 되면 그냥 돌아가는 일을 가끔 목격했다. 피켓 전도자들은 구시가지 광장 내 한 자리에 서서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들을 지옥으로부터 지켜주고(보호하고) 계십니다라는 내용을 들고 있었다.

체코형제복음교회 총회장 요엘 루믈 총회장은 올해 후스 축제 준비위원들은 특별히 그의 사상과 원칙과 입장의 형성에 대해 집중하기를 원했다면서 “600년 된 옛날 사건만을 기억하는 것은 불필요한 보수주의의 되새김이며 힘과 자원의 무의미한 소비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후스의 입장과 원칙은 지금 이 시대에도 꼭 필요하다후스의 정신과 유산들을 만난다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인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후스 축제 2015년 대미의 장식은 76일 오후 10시 넘어 행사 참가자들이 어둠 속에 촛불을 들고 블타바강이 흐르고 있는 카를 다리로 향하면서 마무리 됐다고 한다.

얀 후스는 한국교회와 교회사() 전문가들이 아니라면 딱히 다가오지 않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기복 신앙이 만연한 한국교회에 체코 프라하에 다시 오고자 하는 이유에 얀 후스가 추가됐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얀 후스가 영국의 위클리프가 주장했던 성경의 권위를 회복해야 함을 역설했다.


이제 능력의 말씀을 체험한 얀 후스가 주장했던 오직 성경의 권위를 다시 회복하는 일에 이 글을 읽는 모든 침례교 독자들이 대신해 주기를 간절하게 소망해 본다.

 

[1.]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

독일 콘스탄츠에서 열린 중세 그리스도교회 최대의 공의회(16). 피사의 종교 회의(1409)가 교황권의 분열을 해결하려다가 실패하고 뒤를 이어, 황제 지기스문트의 제창으로 교황 요하네스 23세가 소집했다. 3명의 교황이 난립하여 혼란해진 로마 가톨릭 교회를 통합하고 교회 안의 이단을 일소하는 한편 교회개혁을 위해 열린 것. 요한 23세와 베네딕트 13세는 폐위하고, 그레고리우스 12세는 자진해서 물러나게 해 결국 새로운 교황 마르티누스 5세가 즉위, 로마 가톨릭교회의 분열을 종식했다. 이 공의회를 통해 위클리프와 후스의 교설을 이단으로 결정했고, 이후 14157월 얀 후스를 화형에 처했다.

 

[2.] 얀 후스는 누구인가?

보헤미아 후시네츠(Husinec)에서 1372(?)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체코의 종교 개혁자로서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고 고위 성직자들의 성적문란과 세속화를 강력히 비판했다.

또한 체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 저항했다. 1348년 동유럽에 최초로 설립된 프라하대학(카를대학)에서 1393년 학위(학사), 1396년 인문학 마스터 학위를 받은 뒤, 1400년에 교수 및 가톨릭 사제가 됐다.

프라하 대주교 즈비녜크의 후원을 얻어 프라하대학교 내에서의 체코인의 권리를 신장시켰으며, 1406년 체코어의 정자법(正字法)을 확립(1406), 성경과 위클리프의 저작을 체코어로 번역했다. 1409년 대학총장이 되면서 교황과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과 부패에 맞서 저항하며 개혁을 외치다 1411년 요한 23세에 의해 교회에서 파문당했다. 얀 후스는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보다 1세기 더 앞선 종교 개혁자였지만 이단자로 몰려 141576일 콘스탄츠 공의회에 의해서 화형 당했다. 가톨릭의 젊은 사제로서 부패한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후스가 화형당한 뒤 체코의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열됐다. 이어 그를 따랐던 추종자들이 후스파를 결성했지만 그들 역시 가톨릭 세력에 의해 처형됐다.

최치영 목사/ 체코프라하교회/침례신문 유럽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