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교회(국명호 목사)는 교회 창립 52주년을 맞아 여의도교회 청년 1, 2부 지체들을 중심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함께 국내 미자립교회와 해외 아웃리치 사역을 전개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위축된 선교의 사명을 교회가 다시 일으키기 위해 교회 여러 단체와 교구들이 기도와 후원으로 섬겼다. 이번에 직접 아웃리치에 참석한 이들의 간증으로 다시 한 번 교회가 선교적 비전을 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일본 오사카 아웃리치(2024년 7월 10~17일) 팀원 : 강서윤, 고혜림, 김채희, 문지희, 박민균, 박주원, 서준하, 심소영, 안우연, 이치훈, 장서윤, 최수진, 최현제 인솔 사역자 : 김민수 목사 올해 4월, ‘응답하라 2024’라는 주제의 스프링캠프를 통해 처음 선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일본과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각 나라 복음화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스프링캠프 이전의 나는 다른 나라를 위한 기도나 우리나라의 복음을 모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와 전도, 그 다음 단계라는 생각을 했기에, 선교는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프링캠프가 끝나고, ‘선교’ ‘복음’ ‘일본’ 이 세 단어가
존 로스와 이응찬은 행보를 따로 하기로 했다. 존 로스는 안식년을 앞당겨 영국(스코틀랜드)으로 귀환했고, 이응찬은 관아에서 고용한 추노관을 피해 달아났다. 관아에서 고용한 추노관은 너무도 노련하게 이응찬을 추적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원래 직업이 무역 상인인 이응찬에게는 고려문 근방은 눈에 훤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스타 크래프트(미국 블리자드)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Maphacks(지도 전체를 볼 수 있는) Cheat Key를 사용해 상대방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과 유사하다. 고려문에서 북쪽에 위치한 봉황산을 통해 중국(청나라)으로 가는 것처럼, 정보를 흘리고, 정작 이응찬은 고려문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의주로 방향을 틀었다. 이렇게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추노관이라 할지라도, 이응찬에게는 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 이응찬에게는 그를 돕는 손길들이 꽤 있어, 결국 추노관을 따돌릴 수 있었다. 존 로스와 이응찬이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뤄지고 한글 성경의 번역의 마중물이 된 장소는 <고려문>이었다. 예전 회차에서 언급했듯이, 고려문은 현재의 중국 단둥시에 속한 ‘평청’이란 지역이며, 북한 신의주
114차 정기총회에게 참석해 우리 총회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답답한 마음에 몇 자 적어본다. 필자는 목사안수 40년차로 1984년 총회에서 목사인준을 받고 침례교 목사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총회도 성실히 참석했는데 소송이 이어지면서 총회가 어려움에 처하고 모두가 안타까워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됐다. 2024년 한 해는 침례교 총회로서는 최악의 한 해였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총회장은 취임하자마자 직무정지 가처분으로 업무를 수행 할 수 없게 됐고 부총회장도 직무정지가 되어 총무가 직무대행으로 한 해를 이끌어오면서 총회가 원할하게 돌아가지 못했다. 114차 총회를 위해 선거관리위원회는 총회장 후보등록 공고를 냈고 두 분의 후보가 등록이 됐다는 문자안내와 침례신문에 보도도 나왔는데 총회가 임박해서 선관위는 후보 두 사람에게 결격사유가 있어 자진사퇴를 권고했는데 듣지 않아서 후보등록 취소를 통보했다는 문자 안내를 보냈다. 선거관리위원이 여러 명인데 허수아비도 아니고 규약도 보지 않고 자격유무를 심사하지 않고 후보등록을 받은 것은 아닐 텐데 왜 총회를 코 앞에 두고 번복을 했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총회를 며칠 앞두고 후보
사단법인 한국교회총연합이 주최하는 2023 한국교회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탄소중립 ‘나부터 실천’ 사업이 시작됐다. 회개와 회복 그리고 행동이 필요한 시기에, 생존과 공존을 위한 ‘나부터 실천’ 다짐은 이미 변화의 시작이다. 기후 위기‧탄소중립의 환경적 요소(Environment)를 포함한 사회적 책무(Social)‧지배구조(Governance) 등 비재무적 요소를 기업경영이나 투자 결정에서 재무 수익과 함께 적극 고려하자는 전 세계적 움직임이 ESG로 표현된다. 환경(E)‧사회(S)‧지배구조(G)에 대한 논의는 효율성뿐만 아니라 회복력(resilience)과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국제기구는 2050년까지 연간 2~5조 달러, 현재보다 2~6배의 추가 기후금융 수요를 전망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후금융 수요도 2050년까지 누적 1,722~2,471조원, 연간 57조~82조원으로 추정되고, 향후 기후금융 부족이 심각할 것으로 전망한다. 정부는 지난 4월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을 선포한 바 있다. 골자는 올해부터 5년간 90조원의 예산으로 청정에너지 확대와 저탄소 산업구조 전환에 투자하며 범국민 실천 운동을 전개해
관아의 추격에 일단 존 로스와 이응찬에게는 총 3가지 계획이 있었다. 첫 번째 계획은 둘이 중국 본토에서 잠시 동안 피신해있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단념하게 됐다. 그것은 나중에 후술할 존 로스가 겪은 ‘천주교 신부들의 부정적인 인식’때문이었다. 혹여나 발생할 천주교와의 갈등으로 인해 중국에 다시 가는 것이 꺼려졌다. 두 번째 계획은 이응찬과 함께 배를 타고 영국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금전적인 상황도 여의치 않았고, 영국에서 이응찬의 생활을 감당할 만큼 존 로스의 본가(부친이 양복 업자)가 여유가 있지 않았다. 세 번째 계획은 각자 흩어져서 관아의 추격을 피하고, 적당한 때에 다시 만나 번역 사역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당시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따라서 존 로스는 관아의 추격을 늦추거나 수월하지 않게 만드는 중국으로 피신해, 영국으로 가려는 방안을 세웠다. 어차피 가야 할 안식년 때문에 영국으로 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 시기를 조금 더 앞당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응찬은 고려문에서 함경북도 쪽으로 피신하려는 방안을 세웠다. 그런데 여기서 혹자는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어 양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거
아마 한 달 쯤 그렇게 지냈는데 1950년 10월 12일 ‘남한의 국방군이 평양에 들어왔다’는 가짜 뉴스가 돌았다. 그래서 그 가짜 뉴스를 진짜로 알고 인민군에 안 나가고 숨어 있던 청년들이 다 밖으로 나와서 햇볕을 쬐면서 좋아했다. 사실 그 때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 가까이까지 북진 중이었고 인민군이 우리 마을 지역에서 마지막 후퇴하고 있었다. 10월 20일 국군이 평양에 입성하고 우리 마을도 그 때에야 완전히 해방됐다. 그래서 10월 12일부터 20일까지 일주일 동안 지역 빨갱이들이 그 동안 숨어 있다가 가짜뉴스에 속아 밖으로 나왔던 청년들의 집을 이 잡듯 다 잡아내서 그대로 총살했다. 그 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은 정말 거의 죽은 사람 같이 보였다. 그런데 나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았다. 사람들이 내가 아궁이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또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우리 집은 마을과 좀 떨어진 외딴집이었다. 바로 앞집이 하나 있었다. 빨갱이들이 마지막 후퇴하면서 한 집 한 집 수색하는데 바로 우리 앞집 이창부라는 청년이 그 동안 멀리 다른 곳에 가서 숨어 있다가 집에 왔었는데 마땅히 피할 곳이 없으니까 뛰어나와서 달아났
평양 김일성대학 운동장에 갔는데 약 1000명(?)이 모여있었다. 거기서 하룻밤 지내고 다음날 오전 급하게 부대 편성을 하는데 나는 몇 대대 중화기 소대 분대장에 임명됐다. 그 때 시간이 오전 11시쯤이었다. 잠시 후에 점심 먹고 군복이 나오면 입고 훈련장으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공습경고도 없이 갑자기 그 때 별칭 ‘호주쌕새기’ 미군 전투기 몇 대가 날아와 약1000명 모인 그 운동장에 무섭게 기총사격을 해댔다. 그러자 장교고 교관이고 없다. 모두 나 살려라 뿔뿔이 도망치고 흩어진다. 나도 물론 정신없이 도망쳤다. 한 참 달리다 보니 보통강 옆에 수수밭이 있다. 그 수수밭에 엎드려 전투기의 기총사격을 피했다. 물론 많은 청년들이 기관포에 맞아 죽었다. 몇 분 후 그 무서운 폭격은 지나가고 고요해졌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는데 이제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다시 그 운동장으로 가나 아니면 여기서 도망쳐 집으로 가나. 그런데 집으로 도망쳐 가고 싶은데 내가 그 부대 편성할 때 우리 집 주소를 그대로 적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 주소로 찾으러 오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다시 운동장으로 들어가야 하나 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바로 옆에 숨어 있던 청년이 나를
1933년 생, 나는 북한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시골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제시대를 살았고 공산치하에서도 살았다. 부모님은 완전 원시적인 농사꾼이었고 어머니는 일제시대부터 예수교장로회 평서노회 소속 반석교회 직심(북한 방언, 열심)있는 집사님이셨다. 아버지는 교회 출석 안하고 농사일에만 열중하셨다. 우리 집은 대농이었다. 일제시대 벼 100가마니를 공출하기도 했다. 1945년 8.15 해방 때, 나는 번석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1946년 3월 반석중학교에 입학했다. 북한에서는 해방 후 인민학교 5년제 학제 개편으로 1946년부터 소학교 6학년생은 중학교 2학년으로, 소학교 5학년생은 중학교 1학년으로 진학하게 됐는데 나는 2학년으로 진학했다. 당시 시골에서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여자 아이들은 소학교에도 안 가는 애들이 많았다. 나는 약 50호 되는 시골마을에서 유일한 중학생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솔직히 말해서 불학무식한 농사꾼인데 나를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보내주셨다. 그 당시 학교 시험제도는 5점 만점제인데 전과목 5점이면 상급학교에 무시험 입학 특혜를 줬다. 나는 전과목 5점인데 북한 정부에
이응찬의 도움으로 선교사 존 로스의 조선어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그러나 역관도 아니면서, 양인과 시종일관같이 지내는 이응찬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양인의 첩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했다. 결국 이응찬은 관아에 고발당했다. 이응찬을 관아에 고발한 사람들은 평소 이응찬에 대한 악감정을 갖고 있던 고려문의 무역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압록강에서 풍랑을 만나 쫄딱 망하게 된 이응찬의 불행을 고소해 했지만, 이후 양인을 만나 적당히 돈도 벌며, 행색이 좋아진 이응찬을 질투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이 있듯이, 남이 잘 되면 축하 및 격려해 줘도 모자랄 판인데, 남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그 무리들의 심성이 고약했던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이 한국에만 있는 줄 안다. 그래서 그만큼 한국인들은 이기적인 민족이라고 비논리적인 자국 혐오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우물 안 개구리’라는 다른 속담과 완벽하게 부합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기 때문에, 다른 국가, 다른 지역, 다른 민족 내에서도 이런 현상과 말은 자주 일어난다. 일본어에는 이런 심리를 가리키는 ‘메시 우마(メシ ウ
2. 말콤 펜윅의 기독교적 애국활동 : 대한노래(1906) 지금까지 발견된 역사적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침례교 항일운동의 효시(嚆矢)가 서울에서 개최된 초교파적 위국 기도회에 서울의 침례교인들이 참여한 것에서 비롯됐다면, 침례교 항일운동의 사상적 토대는 “한국침례교의 아버지”라 일컫는 말콤 펜윅의 기독교적 애국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889년에 평신도로 내한했다가 1893년 귀국했고, 이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896년에 재차 내한했다. 원산에서 활동하던 펜윅은 일제의 내정 간섭으로 점차 그 힘을 잃어가는 대한제국을 바라보며 1906년 8월에 “My Country Tai Han”(내 나라 대한)이라는 애국적 사상이 담긴 가사의 노래를 발표했다. 가독성을 위해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필자가 현대어로 고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노래> (1절) 우리 대한나라 대한국을 위해 노래합세. 열성조 나신데 또 돌아가셨네. 모든 산 곁에서 노래합세. (2절) 우리 대한 이름 어찌 사랑할까? 우리 대한 그 산과 골이나 그 강과 수풀 다, 사랑하는 우리 노래합세. (3절)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 성자 믿세. 구주 믿는 백성 성경
지금이 어떤 시대입니까? 두려움과 절망으로 사방에 둘러싸여 있다면 ‘평강하다’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읽은 책에 우리 현실을 직시한 목회자의 심정 고백이 나옵니다. 그분은 자신이 미국의 문화막시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번역하면서 느낀 안타까움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 다큐(=‘문화막시즘 미국의 타락’)를 번역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문화를 통한 ‘긴 행진’이라는 사악한 전략이 그 모든 왜곡된 사회현상 밑에 잠복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이상이 오늘날 우리 한국의 명백한 현실인데도 국민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르게 지도해야 할 목회자들이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오태용, ‘문화막시즘 미국의 타락’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유대 사회는 ‘평강하다’ ‘평강하다’는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가 빈번히 선포되던 시대였습니다(렘 8:10~11).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외친 예레미야의 예언은 정반대로 ‘두려움과 재앙’이었습니다(렘 19:15). 그러자 여호와의 성전 총책임자인 바스훌은 분노하며 예레미야를 때리고 착고 씌워서 투옥시켰습니다. 다음날 예레미아가 착고를 벗고 옥에 나왔을 때 바스훌 앞에서 예언, 경고합니다. “여호와
조던 피터슨, 스티븐 힉스와 같은 학자들이 강조하듯이,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막시즘, 문화막시즘입니다. 자크 데리다, 미셀 푸코 등 대부분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근래에 젠더이데올기를 통한 양성해체와 성 정치의 기수 주디스 버틀러에 이르기까지 모두 급진적 문화혁명 전사, 네오막시스트입니다. 유럽과 미국은 신좌파가 선전하는 글로벌 성 혁명, 문화혁명에 무너져갔습니다. 이렇게 유럽에서 급속도로 번지는 공산 사회주의 운동과 문화막시즘의 위험성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경고음을 울린 학자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레이몽 아롱은 ‘지식인의 아편’이란 책을 써서 프랑스 좌파 이데올로기에서 전염병처럼 번진 반미주의에 반대하면서 자유주의의 덕목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변증법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무산계급의 시대가 억압된 자들을 해방시킨다는 공산주의 이론은 사이비 종교와 같다.…진보라는 이름을 내세워 민중을 잘못된 길로 몰아세우는 좌파 지식인은 ‘막시즘’이라는 아편의 중독자다. 객관성, 보편성과 소통하지 못하는 사상으로 억지요, 고집일 뿐이다. 독일의 틸로 자라틴 박사는 그가 속했던 좌파와 68세대들의 노선으로부터 결별했습니다. 자라틴 막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러한 좌파적 신념의 역사로 시작된 프랑스혁명은 그 후 연속되는 무신론적 인본주의 혁명의 뿌리가 됩니다. 하나님을 인간 이성으로 대체하고 새로운 인간 종교를 창시하기 위한 무신론적 인본주의의 혁명입니다. 진보세력의 공모자들 스스로 ‘하나님 없는 인간’(l’HSD, l’homme sans Dieu)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소설 ‘1984’의 작가로 유명한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반(反기)독교적 사상에서 비롯된 혁명의 정신을 파리 자유의 여신상처럼 우상시합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혁명은 또 역사적으로 반복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혁명은 신좌파(neo-Marxist) 혁명세력에 의해서 또 한 번 인본주의 이데올로기로 중무장하고 온 세계로 포문을 열게 됩니다. 바로 1968년에 일어난 프랑스 68혁명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이 68문화혁명은 현대주의로부터 엄청난 파급·파괴력을 지닌 포스트모더니즘시대로 옮아가는 혁명을 알리는 불꽃 신호탄과도 같습니다. 2. 프랑스68혁명은 앞선 혁명과 ‘부전자전’ 프랑스혁명 이후 인본주의 모더니즘 시대는 프랑스68혁명을 거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전환됩니
셋째로, 과일 재배법을 한국인에게 전수해 조선의 농업기술 진흥에 기여했다. 펜윅이 과일 재배와 농사법을 전수한 첫 번째 제자가 윤병수(尹秉秀, 1867-1944)이다. 사실 윤병수는 펜윅의 농장 견습생이 되기 이전 1885년 10월 25일에 원산항(元山港) 장무관(掌務官)으로 임명받아 약 2년 6개월간 벼슬아치로 일했다. 공무원이었던 윤병수는 원래 묘목 재배에 관심이 많았는데 펜윅을 만난 이후부터 새로운 인생길을 걸으며 과수 재배 전문가로 성장하게 됐다. 그렇다면 윤병수가 펜윅의 과수원 제자가 맞는지, 언제부터 견습생이 됐는지, 학농원(學農圓)을 세워 언제쯤 자립했는지, 그리고 개화기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하다. 이에 관해 여러 자료가 있는데 연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밝히고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겠다. 1) 1909년 3월 14일자 황성신문 기사 첫째가 1909년 3월 14일자 황성신문의 기사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원산거(元山居) 윤병수씨(尹秉秀氏)는 원래(元來) 종식업(種植業)에 유지(有志)ᄒᆞ야 거(去) 광무(光武) 팔년(八年)붓터 당지(當地)에 주거(住居)ᄒᆞᄂᆞᆫ 영국(英國) 목사(牧師) 편위익씨(片爲益氏)에게 종예술(種藝
“미국 혁명의 원리와 프랑스 혁명의 원리가 닮았다는 것은 정숙한 청교도 가정의 어머니와 추문을 다루는 프랑스 소설의 부정한 여인이 똑같이 닮았다는 것과 같다. …참으로 19세기에 프랑스보다 더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는 없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강연’ 중> 유럽 역사에서 비극의 역사로 기억되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은 현시대의 기독교의 위기 측면에서 볼 때도, 치명적 위기를 불러온 중차대한 사건입니다.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는 이 때를 두 번째 타락이 있었던 때라고 강조합니다. 첫 번째 타락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입니다. 두 번째 타락은 프랑스 혁명 시기로, 서구사상사와 문화사에서 도로 메꿀 수 없는 깊은 틈이 이때 생겨났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역사는 근대 프리모던(Premodern)에서 현대 모던(Modern)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현대모던에서 포스트모던(Postmodern)으로 넘어갈 때도 또 한번 공포의 혁명이 프랑스에서 재발합니다. 앞에서 첫 번째는 1789년의 급진적인 정치적 혁명이고, 그 다음 두 번째는 1968년의 문화혁명입니다. 이렇게 프리모던에서 모던으로 포스트모던으로 운명의 역사를 결정하는 배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