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셨음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일생 중에 그분을 떠나지 않을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맹세합니까?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저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삶 속에서 전하는 자로 살겠습니까?” 호수의 풍광이 간신히 짐작될 만큼 이른 새벽이었다. 우리의 죄된 심령처럼 어둠이 깔린 그 시간 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영혼과 온 생애 위에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이기를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순례 여정 셋째날의 첫 행보인 침례식을 행했다. 아멘! 아멘! 우리 모두의 심령 안팎에 마침 태양이 떠올라 서로가 은혜로 상기된 얼굴을 뚜렷이 볼 수 있을 즈음 아마도 전무후무할 갈릴리 호숫가에서의 침례식이 마무리됐다. 이곳보다 그리스도를 풍기는 곳이 또 있을까. 순례 중의 침례의식은 의례히 예수님께서 몸을 담그셨던 요단강에서 행해지나 우리는 변화를 주고 싶었다. 1차 순례 중 요단강에서 한 성도님이 침례를 받으셨는데 장소가 품은 의미는 충분했으나 지극히 현실적으로, 무엇보다 생각 이상으로 탁했던 강물과 전 세계의 순례객들이 몸을 담그고 드나들어 매우 혼잡스러
사역자라는 신분 덕에 두 차례의 여정을 모두 경험했던 나는 1차 순례 내내 아이와 함께 오지 못한 아쉬움을 떨치기 어려웠다. 막 성인이 된 자녀에게 더 이상 부모란 이유만으로 믿음을 강제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던 시점에 다녀온 첫 순례였다. 모태 신앙인 혹은 일명 묵은 신자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없이 흘러드는 말씀은, 무시하자니 꺼림칙한 오랜 기록물에 불과한 것인데 그 결정을 따라 나섰더니 강과 산, 광야가 발 아래에서, 눈 앞에서 그날의 그분을 재증언해 줬다. 구멍 난 믿음의 틈새가 메꾸어지는 경험이랄까, 신앙이 새바람으로 환기되는 경험이랄까. 다음 순례는 무조건 딸아이와 동반하리라는 결심을 어여삐 보셨는지 뿌리교회의 2차 순례는 자녀 동반 중심으로 기획됐고 심지어 아이들의 침례식이 여정에 포함됐다. 대망의 순례 첫날 경유 공항인 이스탄불에서 생각보다 긴 출발 지연 상황을 만나 첫날의 원 일정을 모두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게 되어 최적의 이동 경로를 확보하고자 과감히 므깃도 방문을 빼고 가이사랴 항구에 제일 먼저 들렀는데, 3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보다 많은 부분이 보수돼 우기임을 잊을 정도로 빛나는 햇살을 품고서 한층 유적지다운 모습으로 뿌리 2차…
3년 전 1월, 코로나가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기 직전 그 땅을 밟았다. 세워진 지 겨우 4년 남짓한 미자립교회의 배부른 행보였다. 온 성도로 하여금 성경 속 지명을 입체적으로 떠올리게 만들겠다는 담임 목사의 말씀 중심 목회 지향성이 불러 낸 거룩하고도 거국적인 사단(事斷)이었다. 올 1월, 기세 꺾인 코로나 덕분에 다시 한 번 그 땅을 밟았다. 아마도 가보지 않은 최후의 성도가 짐을 꾸려야 이 복된 소요가 멈출 것인데 교회가 조금씩 자라나고 있으니 끝을 가늠할 길이 없다. 3년 마다 일명 뿌리 이스라엘 원정대의 구성원이 달라지는 것은 거의 필연적 요소다. 그도 그럴 것이 마련해야 하는 비용이 결코 적지 않은데다 최소 7~10일 정도의 외유가 허락돼야 하다보니 경제적, 일상적 처지에 결행 여부가 달려있다는 점 그리고 각종 예약, 예매일을 앞당길수록 비용이 절감되다보니 순례일보다 수개월 앞선 시점에 참여여부를 확정지어야 하는 등 알고 보면 은근 모험심이 요구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성지순례가 마치 선별된 자들만 갈 수 있는 듯 소개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인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고백하는 신자의 관점에서 분명 순례 여정은 여느 여행과 차별된 걸음
최초로 한글에 띄어쓰기를 적용한 것은 영국에서 온 ‘존 로스’ 선교사였지만, 그의 저서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 1877)’ 교재와 띄어쓰기는 대중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를 대중화시킨 인물이 나타났다. 바로 미국의 ‘호머 헐버트’ 선교사였다. 그는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했었다. 때문에 당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1905년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는 시도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을 해줬다. 그런 그였기에 고종에게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등’ 서구의 언어식 표기요소를 적극 권장했고, 또한 국문연구소 설립을 건의하여 만들게끔 했다. 이런 그의 노력으로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에는 본격적으로 띄어쓰기 등이 도입되게 됐다. 이후 1933년 조선어학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면서 ‘띄어쓰기’는 정착단계에 이르게 됐다. 이렇게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에는 과거 선교사들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1)…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하셨다(창 1:27~28).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불순종하는 것은 어떠한 차이를 가져오는가를 사례를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2022년 6월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인구는 약 5157만 명이다. 이스라엘은 2020년 기준으로 922만 명이다. 2020년 출산율은 우리나라가 0.8명이고, 이스라엘이 2.9명이다. 이 출산율대로라면 90년 후 양국의 인구는 얼마가 될까? 현재 인구는 한국이 5157만 명이고 이스라엘이 922만 명으로 한국:이스라엘=5.6:1이다. 인구변화방정식 y=аbⁿ(참조: ‘저출산 극복 p.33)에 대입하면, 30년 후에는 한국이 2063만 명, 이스라엘은 1337만 명이 돼 그 격차는 1.5:1로 좁혀진다. 60년 후에는 한국이 825만 명, 이스라엘은 1939만 명이 돼 인구는 역전돼 1:2.4로 이스라엘이 오히려 커진다. 90년 후는 한국 330만 명, 이스라엘은 2811만 명이 돼 그 격차는 1:8.5로 벌어져 이스라엘이 더욱 커진다. 현 출산율대로라면 90년 후 우리나라는 인구 330만 명의 노인국이 돼 국가소멸·민족소멸을 목전에 두고 있는 반면에, 이스라엘은 생산연령인구가 많은 2811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은 모든 국민들이 알고 있을 만한 법정기념일이다. 매년 장애인의 날이 되면 사회적으로 장애인의 날 행사를 진행하고, 정부는 언론을 통해서 장애인의 날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힘쓰고 있다. 최근 20~30년 동안 많은 교단들과 교회들은 사회적인 약자인 장애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장애인의 날을 전후한 주일을 장애인 주일로 정해서 예배드리고 있다. 교회가 장애인 주일을 지정해 예배하는 이유는 일반사람들이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거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과 교회의 성도들이 장애인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큰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발달된 사회일수록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의 인권을 매우 중요시한다. 그래서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다양한 법과 제도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 동일하게 교회 역시 성경적인 믿음을 가진 교회들은 교회에서 장애인들을 주님의 자녀들로 섬기고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에 뜻을 같이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경우는 교회의 사역 가운데 어떻게 장애인들과 함께 해야 할지에 대한 인식과 정보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많은 목사들이 장애인주일을 지키면서 무엇을 장애인들에게 해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국 언어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가? 우리말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에 분명 틀림없다. 한글은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고 대게 알고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 사료와 사실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한글 창제는 세종 이도와 그의 자녀들인 ‘문종, 세조(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의 작품이다.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이 완성된 후 그것을 책으로 만드는 시기에 참여했으며, 그중에서도 벼슬이 낮은 학자들만 참여했다. 왜냐하면, 당시 집현전 학자들의 대부분은 중화사상(中華思想)을 기본으로 하는 화이 질서(華夷秩序)에 빠져있었고, 화이 질서를 명분으로 양반 중심의 지배 사회를 계속 누리고 싶었다. 이들은 한자와 성리학으로 견고하게 구축된 통치 영역에, 미개한 백성들이 들어오기를 원하지 않았던 교만함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 기득권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벼슬 높은 집현전 학자들과 조정의 일부 대신들이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는 것을 알면, 맹렬히 반대하는 것은 물론, 화이 질서의 근본인 명나라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종 이도는 자녀들 중에 자신의 뜻을 이해하고, 신뢰가 두터우며 및 역량이 있는 이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그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중략)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이곳 모든 사람들로부터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 내용은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언더우드 선교사의 “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이란 기도문이라고 한다. 이 기도문은 인터넷 상에 영문으로 번역되어 돌아다니고 동영상과 설교의 예화로 등장해 널리 퍼지고 있다. 내용만 보면 감동이 몰려오고 은혜롭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허구다.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과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도 언더우드가 기록한 기도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한다. 물론 당시 언더우드가 비슷한 내용으로 기도는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 상상이고, 언더우드가 직접 기술한 역사적 사료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확인이 안 된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이 처음 등장한 곳은 정연희 소설가가 쓴 양화진(1984 刊)이라는 소설이다. 작가도 분명히 역사적 사실이 아닌 허구의 시라고 밝혔다. 그리고 기도문의 내용만 보더라도 여러 가지 반론을…
2020년부터 포항에 내려와 담임목회를 시작하고 2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말 빠르게 지나간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시간 동안 성도들을 돌보고, 교회의 회복을 위해 달려온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3년 차를 접어들던 시점에서 참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교회를 더 힘있게 이끌어나가고, 어떻게 더 건강한 교회를 만들까 하는 생각들과 기도들로 하루하루를 지내다가 국내선교회가 주관하는 KIM 세미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그동안 참석할 기회들이 있었지만, 여유가 생기지 않아 그저 마음속에 담아만 두고 있었던 차에 국내선교회 회장 유지영 목사와 선배 동역자들의 권유로 이번 세미나 만큼은 꼭 참석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포항에서 한 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일찍 세미나 장소에 도착해서 관계자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준비되어지는 과정들을 보면서 국내선교회의 수고와 헌신을 먼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대함으로 세미나는 시작됐고 그동안 목회현장에서 열심히 땀흘려 목회하시는 선후배 목사님들과 함께 예배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한국침신대 김광수 총장직무대행의 설교, 이날 강사로 나선 최병락 목사와 박호종 목
지난 2022년 12월 29일 청운 불멸교회(맹호부대)에서 고양 성광교회(유관재 목사) 청년부 주관으로 연말 찬양 위문 예배를 진행했다. 코로나로 인해 방문 위문 활동이 없었던 청운 불멸교회에는 약 2년만에 일어난 방문 선교였다. 청년들의 열정있는 찬양과 김경진 목사(성광교회 청년부)의 강력한 복음 메시지가 80여명의 용사들과 교회 성도들에게 큰 감동과 위로를 줬다. 위문 예배 후 찾아온 주일 예배 때에는 예배 참여 인원이 약 30% 증가했다. 위문 예배 이후 군종병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독교에 대해 모르는 친구들이 그날 밤 늦게까지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물어봤다고 했다. 위문 예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김경진 목사가 예배 참여 용사들 중에 기독교인이 있느냐 물었을 때였다. 80여명의 인원 중에 10명 남짓의 인원들이 손을 들었다. 그 순간 군 선교와 우리 한국 교회가 직면한 청년들의 상황이 동시에 펼쳐지는 듯 했다. 새롭게 떠오르는 다음 세대 청년들은 한국 기독교회의 고령화, 온라인 콘텐츠의 증가, 코로나로 촉발된 비대면 시대 등의 사유로 어릴 적 우연히라도 교회에 가보지 않은 청년이 대다수인 세대가 됐다. 그러한 청년세대가 처음으로 복음을 접하고
하나님께 떼쓰면서 20대에 성우를 꿈꾸던 청년 시절에 성경이 들리는 녹음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성장하는 동안 유아세례와 입교식을 거쳐 침례까지 받으면서 진정한 복음이 내재화되는 신앙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결국 피 묻은 발자취가 있는 침례교 신학과 성경적 설교에 빠져들게 하셨습니다. 드라마 성경, 빠른 성경, 정독성경 등 많은 낭독자를 보면서 성경 저자에게 허락하신 영감을 재현하는 훈련에 자원했습니다. 20대와 30대에 기도원에서 100여독에 순종하면서도 성경에 무지하다는 것을 많이 느껴왔습니다. 성경을 관통하는 스터디에 계속 참여해 오면서 성경공부와 성경읽기가 하나로 된 온라인 사역을 꿈꾸게 됐습니다. 우연치 않게 유튜브 성경을 발견하는 분들이 성경을 1독하는 목표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특히 침례를 낭독하는 채널을 발견하지 못해서 더욱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10년 전에 편도선이 심하게 부어 대학병원에서 염증을 1주일 동안 제거한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목소리를 잃을 뻔하다가 다행히 수술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느꼈습니다. 언제가 제 마지막 인생일지 모르나 끊임없이 낭독해 누군가에 들려진다면 하나님께 영광일 것 같습니다. 자기…
1890년 7월 26일 제중원 2대 원장이자 미국의 의료 선교사인 헤론이 사망하자, 미 공사관은 조선 조정에 1883년 10월에 맺은 조영수호통상조약에 의거해 묘지를 요구했다. 이에 고종의 허락 하에 조선 조정은 당시 사유지였던 양화진 280평을 매입해 외국인 묘역으로 조성했다. 이것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시작이다. 이후로 양화진에 많은 선교사들이 묻히게 됐고, 해방 이후 주한미군의 묘지로도 사용됐다. 현재 양화진에는 417명이 안장돼 있으며, 그중 선교사 및 가족은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을 비롯한 6개국 총 145명이 안장돼 있다. 1645년 조선에 신문물로 들어온 서학을 통해 천주교가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과정에서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등 수많은 박해가 있었고 그 피의 대가로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복음이 선교사보다 앞서 전해진 조선에는 결국 문호가 개방됐고, 1832년 최초 개신교 선교사인 독일의 칼 귀츨라프 선교사가 들어온 이후, 알렌(1884년)을 비롯해 서양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입국했다.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와 가족들은 하나님과 조선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헌신했던 분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2월 8일 우리교단 국내선교회가 주관한 4회 KIM세미나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지난 2022년 1월 국내선교회 신년 감사예배와 수료식을 더크로스처치(박호종 목사)에서 진행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더크로스처치가 서울 서초동에 있었는데 이후 계속된 부흥으로 경기도 판교성전으로 이전하게 됐습니다. 이런 부흥을 경험하는 더크로스처치의 판교성전에서 세미나로 함께 할 수 있어 더욱 감사하고 많은 교회들에게 도전과 희망을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1일 세미나지만 시작부터 강력한 주의 임재와 성령님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국민일보의 기독교 브랜드 대상을 받은 팀 중에 하나인 레비스탕스의 찬양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주의 임재로 더 가까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더하율의 유하은 자매의 찬양과 간증 또한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전도종족 수준의 복음화율로 인해 많은 염려가 되는 세대 가운데 이렇게 뜨겁게 예배하며 주의 임재를 사모하는 청년 예배자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국내선교회와 함께하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국내선교회를 주님이 참 사랑하신다는 마음이 듭니다.…
특별한 생각 없이 곧잘 쓰는 말이 있다. ‘희망사항’이라는 말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희망사항’이라는 말은 확실한 지식과 의지가 없고, 실현가능성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하게 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막연한 소원, 현실성 없는 꿈을 희망사항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장차 무엇이 될 것이냐,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면 “내 소원은 이것입니다” “내 목적은 이것입니다” “10년이 걸리더라도 이것만은 꼭 이룰 것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하는 젊은이가 거의 없다.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대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나약하고 초라하다. 어쩌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허상의 고백을 듣는 것 같아 아쉽고 쓸쓸하다. 나약한 정신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확실한 희망과 이상이 없다면 결단이나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희망이라는 말보다도 소망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소망은 바라는 바를 분명히 말한다. 막연한 희망사항이 아닌, ‘간절한 기대’(企待)를 가지고 있다. ‘간절한 기대’는 먼 곳에 있는 것을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본다는 뜻이다.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소가 담장 너머로 푸른 풀밭을…
“한 평생 보리쌀 몇 말로 연명하면서 목양하신 선배 목사님들 때문에 오늘의 교단이 있게 됐습니다”라는 김인환 총회장의 취임 인사말을 들었습니다. 과거에는 대의원권을 부여받아 정기총회에도 참석했지만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정기총회에서 원로들도 본이 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 부끄러운 모습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원로목사님들은 가난으로 쉽지 않은 농어촌교회에서 일평생 목양일념으로 걸어오신 분들이 대부분이십니다. 우리들은 ‘어쩌면 후배들을 위해 말씀과 기도로 무릎을 꿇고 주님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며 은퇴 이후에도 전도와 선교를 생각하며 복음 생활에 우리의 삶을 온전히 헌신하고 있습니다. 총회는 교역자복지회도 있고 은혜재단을 통해 목회자의 연금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목회자들의 처우가 많이 개선되고 있지만 이는 현역 목회자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이지 원로 목회자는 직접적인 지원이 미비한 상황입니다. 교단을 위해 헌신하며 오직 목회의 길만 걸어온 우리 원로목사들에게 보다 구체적이며 중장기적인 노후 대책이나 지원 프로그램이 상설화되기를 원합니다. 단순히 한 회기를 이벤트성 행사나 일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