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는 지난해 여름 기록적인 장마를 통해 우리에게 가슴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극한 기후’라는 말을 남기며 인간의 예측을 넘어서는 재해로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도 고지대로 혹은 위도가 높은 지역으로 이동하며 기후 위기의 고통 가운데 있다. 이처럼 창조 세계의 신음과 고통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자녀인 우리에게 큰 도전이다. 이는 외면하거나 방임할 수 없는 숙명적으로 대처할 과제이다. 창조세계의 회복과 보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지구를 위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꼭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급변하는 지구 생태계 위기는 비단 우리 시대, 우리 교회만의 도전과 관심사가 아니었다. 6세기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들도 파괴된 숲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20세기 초에 창설된 시토 수도회도 다른 영적인 일도 중요하지만, 삼림복구를 위해 나무 다시 심기 운동을 벌였고, 훼손된 땅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힘썼다. 우리 시대의 주 관심사인 생태운동(生態運動)은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 역사에서 진행되었던 일이다. 현재 인류의 주소는 423이라고 한다. 423은 무슨 숫자일까? 지구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이다. 마리아와 요셉
박기양 목사(朴基陽, 1894-1979) 박기양은 1894년 10월 20일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청북동에서 박규석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5세 때(1899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해 4년간 수학했는데, 훈장이 가르침에 따라 잘 읽을 뿐만 아니라 한 가지를 배우면 두세 가지를 깨닫는 등 그의 자질이 뛰어나 많은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서당을 수료할 즈음 모친의 병세가 악화되어 1903년 9월 세상을 떠났고, 아내를 잃은 부친은 방황하다가 훌쩍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이로 인해 박기양은 졸지에 부모를 잃게 됐고, 급기야 1년 후 동생마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다른 동생들과 함께 외갓집에서 성장했고, 17세 때(1911년) 소산동에 살던 임학이의 장녀와 결혼했다. 1911년 4월 충청북도 영동에서 활동하던 박영호 전도인을 통해 기독교로 개종했고, 1915년 이종덕 감목(총회장)으로부터 침례를 받았으며, 같은 해 10월 경상북도 포항 조사리에서 개최된 제10차 대화회(총회)에서 반장 직분을 받았다. 이듬해인 1916년 경상북도 문경의 신원(세원)에서 개최된 제11차 대화회(총회)에서 전도인으로 임명받았다. 1917년 2월 4일 장남이 출생했으나
농촌교회가 점점 소멸되고 있다. 농촌 인구가 줄어들면서 마을 자체가 사라지고, 그 마을의 대표적 인프라라 할 수 있는 교회도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농촌교회에 부임한 한 목회자는 예배보다 고령의 성도들을 돌보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토로한다. 장례예배는 이제 농촌 목회자의 주요 사역 중 하나가 돼 버렸다. 농촌교회를 살리기 위한 한국교회의 다양한 시도는, 그 생존이 곧 한국교회의 존속과 직결된다는 절박한 인식에서 출발했다. 교계 연합기관을 중심으로 농촌교회와 지역 성도들이 생산한 특산물을 바자회나 장터 등을 통해 유통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일회성 행사에 그쳤다. 농특산물의 품목도 다양하지 않아 소비자들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사실 한국교회 부흥의 절정은 1990년대였다.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의 흐름에 따라, 지방과 농촌의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도시교회로 옮겨 갔다. 물론 지방과 농촌에 남아 교회를 섬기며 신앙을 지킨 그리스도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말 이후, 한국교회는 정체기에 들어섰다. 대도시 중심의 사역, 지역 불균형, 저출산, 주 5일제 시행 등의 변화 속에서 교회는 양적 성장의 둔화를 겪기 시작했다. 한때 120
5. 노재천 목사(盧載天, 1884-1964) (2) 그들은 하나님이 이런 때를 위하여 준비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새로운 힘을 얻어 앞을 막고 있는 준령을 넘기 시작했다. 실은 죽기를 각오하고 마지막 예배를 드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으므로 새로운 용기와 남은 힘을 다하여 준령을 넘어 약무초안교회에 찾아 들었다. 형제들의 뜨거운 영접을 받고 힘을 얻은 그들은 곧 사경회를 열어 많은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노재천 목사는 간도에서 활동하다가 1924년 강원도 행곡에서 개최된 제19차 대화회(총회)에서 예천과 제천지역으로 사역지를 옮겼고, 이후 이곳에서 순회사역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 1938년 웅기교회의 ‘달편지’ 발각사건이 발발했다. 경흥구역에 속한 함경북도 웅기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광고가 실린 ‘달편지’가 일경에 의해 발각됐는데, 이는 동아기독교 탄압의 빌미가 되어 노재천 목사를 포함해 김영관 감목(총회장)·백남조 총부서기·이종덕 목사·전치규 목사 등이 원산경찰서로 소환됐다. 일제의 강압적 조사와 무자비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답변으로 인해 일제는 가둔지 3개월 만에 이들을 검찰에 송치하여 5개월간 원산교도소에 감금했다. 이후 더
기독교로 개종한 후, 피터스(이삭)는 선교사로서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신학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스승이자 지도자인 알버터스(피터스) 선교사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알버터스 선교사는 단순한 신학적 교리 교육을 넘어, 성경 해석과 설교, 교회사, 선교학의 기초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지도를 통해 피터스의 신앙과 지식을 세심하게 다듬어 줬다. 당시 나가사키에는 몇몇 개신교 선교사들이 함께 운영하는 소규모 성경학교가 있었고, 피터스는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수업을 들으며 신학적 기반을 쌓아갔다. 정통파 유대인 청년이 침례를 받고 개신교인이 됐다는 소식은 나가사키를 넘어 규슈 전역, 더 나아가 일본 전체에 복음을 전하고 있던 선교사들에게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특히 혼슈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사역하던 헨리 루미스 선교사는 피터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미국 성서 공회(American Bible Society) 일본 담당 총무로, 후에 일본 최초의 장로교회인 요코하마 제일장로교회(요코하마 시로 교회)의 초대 목사로 섬기게 되는 인물이다. 루미스는 피터스를 만나기 위해 요코하마에서 나가사키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직접 찾아왔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우리는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피 흘린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기억한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전장의 한복판에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마음껏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는 평화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들의 헌신은 단지 과거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앙과 삶의 본이 된다. 순국선열들의 희생은 그저 국가를 위한 충성심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이웃과 미래 세대를 위한 사랑이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도 깊이 연결되는 고귀한 행위였다. 우리 침례교회는 이런 희생을 단지 감사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신앙의 언어로 해석하고 기도로 응답해야 한다. 이 땅의 그늘진 곳, 상처 입은 마음들 위에 하나님의 위로와 치유가 임하도록 함께 무릎 꿇을 때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라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참된 사랑의 본을 본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피 흘리신 주님의 은혜처럼, 이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친 이들의 사랑 역시 하나님 앞에 귀하고 거룩한 것이다.
5. 노재천 목사(盧載天, 1884-1964) 노재천은 1884년 1월 21일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에서 한학자 노성우의 둘째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이 마을의 훈장이었기에 그 밑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07년 김용산과 결혼했고, 이듬해인 1908년 10월 20일 충청북도 구룡촌 교회에서 개최된 당회(지방회)에서 예천구역 전도인 박영호의 권유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는데(이때 장전욱, 김재덕도 함께 개종), 이날에 장남 한성(아들 노윤백 전 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손자 노은석 전 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을 득남하여 큰 경사의 기쁨을 누렸다. 그는 장진규 총찰과 장기덕 반장이 담당하던 훤평교회(현 용궁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1910년 6월 충청북도 옥동의 구룡촌 교회에서 개최된 펜윅의 사경회와 당회 직후 신명균 목사에게 침례를 받고 예비 전도가 되어 그해 8월 경상북도 영양지역에 전도사역자로 파송 받음으로 순회전도자로 활동했다. 1913년 3월 노재천은 장기덕 총장과 함께 경상남도 진주 지방에 전도로 파송되어 호별 방문 전도를 했는데, 집안은 부인에게 맡기고 ‘불고가사’와 ‘불고처자’의 신앙으로 오직 전도에만 열중했다. 전도자로서 그의 생활비(노비)는
지난 6월 3일 치러진 제21대 대통령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1728만여 명의 지지를 받아 49.42%의 득표율로 대한민국의 새 지도자로 선출됐다. 2024년 12월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대한민국은 극단적인 양극화 속에서 갈등과 반목의 시간을 겪었다. 수많은 의견과 뉴스들이 우리의 가치관마저 흐려놓으며,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과연 진실은 무엇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시기를 우리는 지나왔다. 무엇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견해와 판단, 자기 소견대로만 주장하는 모습은 마치 사사기 시대의 혼란을 떠올리게 했다. 교회와 목회자들도 이러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혼란을 겪었고, 성도들에게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대통령 탄핵 이후, 8명의 후보들은 저마다의 뜻을 굽히지 않으며 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 해법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여 일이라는 짧은 선거운동 기간 동안 모두가 ‘나라를 걱정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대한민국을 위한 대안 제시나 정책 토론보다는 ‘진영 논리’와 ‘갈라치기’, 상대 후보를 헐뜯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했다. 결
‘라이즈 업 뱁티스트’는 온라인으로 시작했지만, 전국 교회가 각 교회와 가정에서 유튜브 생중계로 함께 참여하며 우리에게 다시 사명을 일깨우고, 모든 일상이 멈춘 순간에도 말씀과 기도를 잊지 않고 붙들고 나아가는 침례교인이 되도록 선포하고 합심으로 기도한 모임으로 유명하다. ‘라이즈 업 뱁티스트’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인 2021년, 팬데믹을 극복하고 침체되고 무너진 교회를 기도로 세워 나가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전국 기도운동이기도 하다. 이는 당시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코로나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며, ‘라이즈 업 뱁티스트’는 명실상부 기도하는 침례교회의 모습을 보여준 시간이었고, 특별히 교단을 대표하는 목회자들의 메시지를 들으며 도전받는 시간이었다. 전국 침례교회가 연합으로 기도하는 ‘2025 라이즈 업 뱁티스트(전국침례교회 연합기도회)’가 오는 6월 1일 주일, 대전은포교회(이욥 목사)를 시작으로 6월 13일까지(단, 6월 7일 제외) 전국 12개 교회에서 열린다. 이번 기도회는 전 총회장 김인환 목사를 비롯해 이욥 총회장, 박춘광 목사(신동탄지구촌), 최인선 목사(은혜드림), 김재홍 목사(성광), 강신정 목사(논산한빛), 강석원 목사(거
일본의 주요 도시는 미국의 공습으로 초토화됐다. 이런 이유로 당시 원자폭탄 투하가 불필요하다는 입장이 있었다. 즉 통상 폭격만으로도 완전히 쓸어버릴 수 있는데 굳이 특수폭탄을 투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육군참모총장인 조지 마셜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에 따른 무조건적인 항복을 시키기 위해서 원자폭탄 작전을 강행했다. 이에 따라 위원회가 선정한 원폭 투하의 대상은 5개 도시였다. 그중 하나가 공업 거점, 주요 군사 거점인 ‘히로시마’였다. 다음으로 공업 거점인 ‘교토’를 정했다. 그러나 교토는 약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본의 수도였기 때문에, 도쿄 천도 이후에도 일본인들에게 여전히 ‘정신적 수도’로 남았다. 그런 유서 깊은 고도(古都)를 불태우면, 전후 처리 과정에서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 내부에서 강했다. 이런 주장 때문에 교토는 목표에서 제외됐고, ‘나가사키’가 새로운 목표지에 추가됐다. 나가사키는 지금도 존재하는 미쓰비시 중공업의 조선소와 일본 해군의 진수부(후방 사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원자폭탄 ‘투여 목표 도시’로 최종 선정됐다. 당시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별명을 딴 암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