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젊은이부 예배에 들어갔습니 다. 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주안에서 살면서 혹시 간증할 사람이 있으면 한번 해보아라”라고 말입니다.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다음 주일에 똑같은 질문을 또 했습니다. 그때도 여전히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은 간증할 사람이 많아서 시간에 쫓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 다음 주 예배 시간에 이어서 할 정도로 이제는 간증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예배 때마다 간증 시간을 넣으니 아이들이 매주 깨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서 좋고 또 함께 있는 다른 젊은이들이 여러 면에서 다채롭게 은혜를 받게 되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감동스러운 간증은 대 예배 시간에 모든 성도와 함께 은혜를 나눴습니다. 그 후, 저는 전 교인들에게 이와 같은 교육하게 됐습니다. 제가 “신앙은?” 하면 교인들은 “삶이다”라고 고백하게 했고, 제가 “기도는?” 하면 교인들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의 우선순위는?” 하면 “교회〉 가정〉 직장”이라고 하며, “인격적인 우선순위는?” 하면 “하나님〉 가족〉 이웃”이 라고 합니다. 오늘날 청년들이
미식가들의 바이블, ‘미슐랭 가이드’를 아시나요? 음식 맛, 서비스, 분위기, 가격 등을 기준으로 레스토랑의 등급을 매기는 가이드이다. 가장 낮은 별 1개부터 별 3개까지의 등급을 매기게 되는데 별 3 개를 받은 레스토랑의 요리사는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고 한다. 매년 별의 등급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별을 얻는 것도 힘들고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요리의 나라 프랑스에 조차 단지 20여개의 3스타 레스토랑만 있다고 하니 정말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은 정말 최고의 맛집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의 가격은 상상 이상이다. 점심 코스가 1인 10만원 수준이고 저녁 코스는 2인에 50만원에서 100만원에 이르는 메뉴가 많다. 그러니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 되는 것은 요리사에게 있어서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명예와 부를 동시에 차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을 선발해 가이드를 만드는 회사가 아주 재미있다. 이 정도 권위라면 뉴욕의 대단한 요리사 그룹이나, 세계 최고의 프랑스 요리학교인 르꼬동 블루 정도에서 관장해야 맞는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미슐랭 가이드를 만드는 회사는 타이어 회사다. 우리가 잘
‘우리는 우리의 더러운 발자국을 지우기 위해서 허리춤에 빗자루를 매달고 다녀야 합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실 수도 없습니다. 사원에 들어가서 신께 기도드릴 수도 없습니다. 신성한 그곳에 그림자도 드리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천하게 태어난 것은 전생에 지은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 들은 우리와 닿는 것만으로도 오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은 불가촉천민 달리트입니다’ 이것은 나렌드라 자다브가 저술한 ‘신도 버린 사람들’이란 책 표지에 실린 불가촉천민에 관한 글이다. 힌두교에 의해서 생겨난 인도의 신분 제도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사, 수드라 등의 4계급인데 이카스트 체제에 속하지 않는 가장 하층의 사람들이 불가촉천민들이다. 1955년 법이 제정되어 그들을 종교적, 직업적, 사회적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인도 총인구의 약 15%에 속해있는 국민들은 지금도 차별대우를 받으며 절대적인 빈곤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불가촉천민은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파키스탄 남부의 ‘누더기를 입은 땅’이란 뜻의 쫄리스탄 사막에도 거주하고 있는데 바로 마르와리족이다. 이들의 숫자는 약 2만 명이나 그 이상일 수 있는데 힌두교도들로서 역시 천대받으
코로나를 바라보는 2가지 관점이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은 세계보건기구 WHO와 선진국들의 싱크탱크 및 글로벌기업 CEO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코로나19 이전의 삶으로 쉽게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과학을 믿으니까요!’라는 말은 지난 12월 14일 미국에서 처음으로 백신 접종을 받은 여성 간호사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매일 코로나로 사망하는 사람들을 치료해야 하는 뉴욕 병원 간호사로서 제법 두려울 법도 한데,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강력한 신념의 근거가 과학이었다. 과학과 의술을 믿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과학을 믿기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 전진한다는 매우 인본주의적인 사상이 이번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고난 속에서 발견하는 희망은 최소한 신앙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데,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세상은 신앙이나 믿음보다는 과학이나 정보가 더 중요한 듯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는 대규모 전염병이 창궐하고 사람들이 많이 죽을수록 신앙이 성장한 것이
필요하면 자신이 교회에 찾아가겠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찾아오거나 방문하는 것은 부담이 되거나 도움이 되지 않다고 보아 기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개인들은 저마다 내면적인 갈등이나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힘든 삶의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의미 상실, 그로 인한 불안, 우울과 자살충동을 경험하며, 사회에서 단절되는 개인들이 늘어간다. 스스로 자기문제를 포기하거나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된 개인들과 가정들이 증가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나 사회기관들에서 이들을 지원하고 돌보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고, 찾아가는 방문사업들을 확장하고 있다. 교회에서의 방문사역은 그 기능이 약화 내지는 외면되고 있는 가운데, 현대인의 각종 문제현실과 어려운 상황 들은 이웃의 관심과 방문 등을 통한 지원과 도움이 더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목회신학자 브리스터(C. W. Brister)는 빠른 변화의 시기에 발생하는 교회 사역의 위협 요인들을 언급하며 ‘행위와 성찰’(action and reflection)을 강조한 바 있다. 교회의 전통적 유산이 상실 되어가는 위기를 언급하며, ‘일상의 사건과 갈등, 믿음과 영성의 문제들’에 대한 점검과 갱신의 필요성을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순간 입에서 나온 첫소리가 “나의 주님이시요”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보는 순간 “나의 주님”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신앙의 첫 고백이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으로 신앙생활을 출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면서도 실질적으 로는 너무나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오늘 도마의 고백처럼 우리도 진정한 믿음의 바탕에서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 되어진 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유와 쉼과 평안”의 삶을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면상 짧지만, 최근에 있었던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두 달 전부터 우리 집 마당에 산란계 암 닭 열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첫날부터 이 녀석들은 달걀을 낳기 시작했는데, 저희 부부는 닭장 안에 갓 낳은 달걀을 난생처음 보는 순간 신기하고도 놀라워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웃들도 우리 집에서 닭을 키우며 달걀을 생산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하여
“엄마는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 초등학교 2학년이 썼다는 “아빠는 왜?”라는 시다. 아빠라는 존재가 초등학생 아이에게 냉장고보다, 강아지보다 못한 존재인 듯한 모습에 글을 읽으며 남자로, 아빠로서 서글픈 마음마저 든다. 이것이 어느 한 아이 만이겠는가? 한국에서 아빠라는 자리, 남편이라는 자리가 외로움을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요사이 더 많이 접하는 연애인 사망뉴스, 가족사망 뉴스가 사람의 가치나 존엄을 망가지게 한다. 어느 연구에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외롭다’, ‘괴롭다’거나 ‘슬프다’와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한다고 한다. 또 ‘나’라는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며,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을 표현하는 단어를 적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보다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이 쓴 글에서처럼 자신 위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이라서 기보다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믿음에서조차 “우리 가족”,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민족” 등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은 “내”라는 의미를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은 연합국 전쟁사가로부터 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유능한 독일군 지휘관중 한 명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네 종류의 장교에 대해서 말합니다. 첫째, 게으르고 멍청한 장교, 둘째, 열심히 일하는 지혜로운 장교, 셋째, 열심히 일하면서 멍청한 장교, 그리고 최고의 리더인 ‘똑똑하고 게으른 장교’입니다. ‘멍부’ 즉 멍청하면서 부지런하고 열심까지 있는 리더는 최악입니다. 의미 없는 일에 자신과 부하들의 힘을 모두 소진시킵니 다. ‘멍게’ 즉 멍청하면서 게으른 리더는 최소한 자신의 멍청함을 주위에 전염시키진 않습니다. ‘똑부’인 똑똑하고 부지런한 리더는 모든 일을 다 잘하려 하기에 중요한 일에 집중못할 때가 있습니다. 최고 리더는 ‘똑게’입니다. 즉 결정적인 한 두 가지 일에 집중하는 똑똑하고 게으른 장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게으름’은 사실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지혜’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결정적인 일에 집중할때 나머지 일들에 대해서는 게으르게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최악의 리더는 방향을 모르면서 소신있고 열심까지 있는 리더입니다. 젖은 장작에 열심히 불을 때서 연기만 폴폴 나는 리더입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니라”(마태복음5:17) 몇 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봉고차한 대를 구입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대리점 직원이 친절하게도 그날부터 당장 타고 다녀도 될 수 있도록 자동차 등록 및 자동차 번호판까지 모두 갖춰서 교회로 직접 배달해 줬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봉고차를 타고 시내를 다니기에 하나도 손색 함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잘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 사용하기에는 그래도 몇 가지 보완해야 할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봉고차에 올라타기엔 계단이 너무 높아서 중간 발판을 장착시켰습니다. 그리고 한여름에 햇볕이 너무 강렬할 것을 대비해서 유리창마다 햇볕 차단지를 모두 붙였고 또한 자동차 핸들에는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가죽 덮개를 씌웠습니다. 이런 보완할 점들을 모두 보완한 후에 저는 속으로 “이젠 완전해졌네”라는 말을 하게 됐습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기존에 있는 율법을 더 보완하여 완전하게 하실…
한국은 지난 세기에 빠른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이루며 발전을 거듭했다. 이제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됐다. 그러나 물질적·외적인 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뤘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빈부의 양극화, 연애도 결혼도 집도 포기하는 ‘포기세대’의 등장, 극심한 노사갈등, 세대갈등, 젠더 갈등이 난무하는 ‘피로사회’ 및 ‘위기사회’가 됐다. 각종 폭로와 비방, 고발과 대립이 사회 전반에 넘쳐난다. 이런 상황에선 사람들의 초점이 자기 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타인들에 대한 존중이나 인정, 배려를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근래에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강남역 살인사건, 이수역 폭행 사건, 불법 몰카, 미투 폭로 등의 사회현 상들은 이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상대를 찍어내지 않으면 자신이 당한다고 생각하는 정글 같은 사회, 자기중심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개인주의적이라고 알려진 서구보다도 한국의 공동체성이 더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교회가 인간 곤경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라는 맥락에서 이웃을 돌아보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이들을 방문하고 돕는 심방사역을 조명한바 있다. ‘심방’ 혹은 ‘방문’은…
실제로 지옥을 보면 전도열에 불타게 됩니다. 한신목회개발원 원장 이중표 목사님은 이런 간증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중학생일 때 둘도 없이 친한 친구가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읽어 보라고 줬습니다. 그 책을 읽어보니 석가, 공자, 노자, 장자, 소크라테스, 예수 등이 했던 명언들이 가득했는데 그 가운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가장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예수님 말씀만 기록된 책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신약성경을 줬습니다. 신약성경을 읽는 중에 목사님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 후 고등학생 때인 어느 날 아침 기침을 하는데 피가 쏟아졌습니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 보았더니 폐결핵으로 폐오른쪽에 구멍이 나서 피가 나온다는 것이었 습니다. 그러면서 약을 먹는데도 전혀 치료가 되지 않았습니다. 절망한 목사님은 약국을 돌면서 수면제를 샀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 수면제를 손에 들고 잠시 눈을 감았는데 갑자기 지옥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목사님은 지옥에서 해골 떼들이 소리치면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게 됐습니
요즘 우리 주위에는 유명한 정치인, 체육인, 연예인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환승역에서 저승(천국행, 지옥행) 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신 분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생의 마무리를 아름답게 한 후 천국 행을 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이 환승역으로 떠날 남은 시간이 얼마쯤인가를 예측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로 떠날 시간이 가까워 왔다는 것을 예감하며, 이 땅에서의 삶이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이제 그 기간이 다 돼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이렇게 사는 삶이 한치도 헛된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사명감을 가지며 날마다 육신의 소욕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어도 우리의 육신은 세상의 정욕으로, 죄악으로 가려고 합니다. 기도하며 내 속에 계신 성령이 육신을 지배하도록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세상의 것, 물질, 권력, 명예 등 아무리 대단해도 시간이 지나가면 다 사라지게 되는 헛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남을 배려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 끝에서의 삶. 남을 배려하는 사랑의 삶만이 나중에 천국에
오래 전에 나의 친척 중에 몹시 시련을 겪으며 결혼한 부부가 있었다. 연애 시절에 아가씨의 부모가 심한 반대를 하였기 때문이다. 이유는 총각의 어머 니가 술집을 했고, 세 아들의 장남으로 결핵까지 앓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들의 관계를 끊으려는 과정에서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학대와 고통을 줬다.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도록 아가씨를 방에 가둬놓기도 하고, 강제로 삭발을 시킨 적도 있으며, 밧줄로 묶고는 매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의 관계를 끊을 수 없었다. 총각이 국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자 아가씨는 총각의 근무처가 있는 곳으로 야반도주하여 찾아가선 결국 결혼을 했다. 이들의 결혼 생활은 남편이 고위 공무원으로 은퇴한 지금에도 과거 연애를 할 때처럼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 부부의 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어 희생시켰다(요3:16). 죄인들이 사는 세상, 거짓과 불법, 무질서와 폭력, 낙심과 절망이 있는 세상에 구원과 생명과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1991년도에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에서 학생부 전도사 사역을 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한국에 가서 사역하라는 강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얼마나 강하게 역사하시던지 도무지 사역이 마음에 안 잡힐 정도로 한국에만 집착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7월 한 달 동안 휴가(언제 다시 갈 수 없으니 분명한 결정을 하고 돌아오기 위하여)를 내어 한국에 답사를 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와서 보니 두 가지 때문에 마음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첫째는, 한국에는 교회가 너무 많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둘째는, 10년을 미국에서 살다 보니 어느덧 자신이 미국화가 되어있어 한국에서 적응하며 살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았습니다. 한 예를 들어, 한국의 여름은 습도가 너무 높아서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했으며, 인구 밀도 너무 심해서 굉장히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서 알고 지내던 어느 한 분이 처가댁에 방문하기 위해 한국에 오셨는데 그분과 함께 통
가? 두향이 선생의 안두에 가져 놓았던 매화는 오늘도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마치 두행처럼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퇴계와 두향의 사랑보다 더욱 애달픈 사랑이 있으니 네가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사랑하는 너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 미투 사건을 접하면서 청순한 사랑을 노래해 봅니다. 이황(李滉) 퇴계(退溪) 선생께서 매화를 노래한 시는 백수가 넘습니다. 매화를 유별나게 사랑 하는 이유는 관기(官妓) 두향(杜香) 때문입니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48세 때였습니다. 두 향의 나이는 매화향이 솔솔 풍기는 방년 18세, 두 향은 퇴계 선생에게 첫눈에 반했습 니다. 그러나 선생의 근엄한 자태는 항상 풀 먹인 안동포처럼 고고했습니다.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은 퇴계 선생은, 텅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 두 향을 만남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인가? 두향은 시, 서예, 가야금 뿐만 아니라 그림도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별나게 매화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외로움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퇴계 선생은 그윽하고 맑은 향기에 깜짝 놀라 잠에서…
코로나19 국내 최초확진자가 나온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코로나 위기는 진형행이다. 바이러스 사태가 이렇게 길어지는 이유는 급속한 전파와 백신과 치료제 개발의 어려움도 있지만 정부의 방역지침을 무시하고 위반하면서 집단감염 등의 확진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코로나 방역지침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자영업자들과 소상공인들은 코로나 경제 침체로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으며 최근 코로나 이후 일자 리를 잃고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이 200만명을 돌파한 상황이라고 한다. 교회도 사회적 거리 두기에 본연의 대면 사역은 거의 중단 되고 비대면 사역 중심으로 교회사역과 목회사역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계속 연장되는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으로 개척교회와 미자립교회는 교회 폐쇄까지 고민할 정도로 목회의 위기 속에 빠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교단도 이러한 코로나19 위기를 함께 극복하고 새로운 목회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무조건적인 재정적 지원 보다 보다 실질적으로 비대면 사역을 돕고 실질적이며 장기적인 재정적 지원책도 마련하고 있다. 이에 교단을 대표하는 교회들이 함께 모여 지난해 각 교회별 성탄헌금을 모아 도움이
지난 한 주간 매서운 한파가 몰아쳤다. 설상가상 갑작스런 폭설로 인해 퇴근길 발이 묶여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이러한 혹한은 비단 날씨 뿐만이 아니었다. 새해 벽두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에 대한 소식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와 희망과 기대가 가득하기도 했지만 안 좋은 소식들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얼어붙게 했다. 확진자 수가 좀처럼 감소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와 관련된 확진 소식이 어김없이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 정부가 교회를 말살하려 한다며 방역지침을 무시한 채 항의집회를 열겠다는 어느 교회의 목회자를 비롯해 모 선교단체는 대규모 감염사태를 일으킨 후 앞에서는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시설 폐쇄 명령서를 부착하기 위해 센터를 방문한 방역당국 사람들과 몸싸움까지 하고 저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특히 이 선교단체는 대표의 입을 통해 코로나19 관련 음모론이 자주 언급됐다는 제보까지 더해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한 입양아가 양부모의 학대 끝에 죽음에 이른 사건도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필이면 현재 용의자로 지목된 양부모 모두 한국교회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어서 가뜩이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갈수록 악화되던 교회를
예년과 달리 희망과 기쁨이 가득해야 할 2021년의 새해여야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그렇지 못하다. 지난해 우리의 모든 것을 뒤바꿔 놓은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매일 수백명의 확진자를 양산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송년과 신년의 교회 사역은 암담했다. 1년을 마무리하는 주요 행사들은 아예 취소하거나 온라인 비대면으로 진행했고 성탄 행사와 송년, 신년 교회 행사는 방역당국의 지침에 따라 20명 이내의 비대면이나 온라인으로 행사했다. 이조차 할 수 없는 교회는 어쩔 수 없이 대면 예배를 강행했지만 지역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2021년의 시작도 다를 바 없다. 코로 나19의 확산은 정부의 믿음과 신뢰를 무너뜨리며 집단감염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여전히 소수 모임에서 마스크를 벗거나 오랜 시간 대면 형식을 취하면서 감염되는 사례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가 코로나19에 이제는 둔감해지고 감염에 대한 스스로의 대비를 등한시하고 있는 단면일 것이다. 교회도 철저하게 방역 지침을 준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 하나 쯤이야 괜찮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집단감염이 생기는 것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교회의 존재
코로나19 확진자가 이제는 1000여 명이 넘어서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코로나19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강력한 방역지침을 규정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방역체계는 허술하기 이를때 없다. 다중이용시설의 출입을 제한하며 이용시간까지 제재를 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확진자 증가세는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단순히 출입을 제한하는 선에서 방역지침이 이뤄진다면 교회 사역은 위축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 수도권은 2.5단계 제주(1.5단계)를 제외한 전 지역은 2단계로 종교활동은 2단계가 20% 이내 인원이 참석할 수 있으며 2단계는 20명 이내로 참석 인원이 제한된다. 3단계가 되면 종교활동은 1인 영상만 허용되는 상황이다. 일반적인 모임의 인원 제한은 2단계는 100인 이상, 2.5단계는 50인 이상을 금지하고 있어 교회에 대한 제한이 과도하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 예배는 단 한 사람의 인원으로 진행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담임목회자 한 사람의 몫으로 모든 것을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교회의 이런 상황에 대해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을 비롯한 한국 교계도 정부의 방역지
평화의 왕, 구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유대인을 위한 왕이 아닌 온 인류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왕이라면 당연히 최고의 궁전과 최고의 대접을 받아야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못했다. 가장 낮고 가장 천한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들을 향해 오신 것이다. 우리가 이 기쁨과 소망을 함께 나눠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실은 우리의 뜻과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공포를 경험하며 매일 500여 명이 넘는 확진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코로나 확산세에 속수무책 무너지는 조짐을 보이면서 결국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은 오는 12월 28일까지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로 격상해 보다 강도 높은 방역 체계를 구축하고 코로나 확산을 저지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는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유행이 본격화되는 시기로 모든 시설에 대한 출입 제한을 규정하고 출입인원도 대폭적으로 줄어든다. 무엇보다 교회가 속한 종교시설의 활동에 대해서는 더 종교활동에 대해서는 더 엄격한 잣대로 규정하고 있다. 비대면을 원칙으로 하되 20명 이내의 인원이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다. 코로나19 상황에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하지만 비대면 원칙과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