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상은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졌다.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은 모자란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다.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많이 소유하기 위해 돈을 쫓아 살았다. 그러다보니 인격이 작아졌다. 가족을 놓쳤다. 건강을 잃었다. 크게 소유했지만 존재의 크기는 작아졌고, 행복을 잃었다. 감히 말해본다 식욕은 몸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다. 사는 동안 불필요한 잉여욕망과 싸워야 한다. 새들은 적게 먹고 적게 배설한다. 새들은 날기 위해서 뼛속까지 비운다. 그렇다고 새들이 불행하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뼛속까지 비웠다고 새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도 없다. 오히려 새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며 잘 먹고, 잘 산다. 가진 것이 적었을 때가 걱정거리가 가장 적었다. 감히 말해본다. 부족할 때 보다는 풍족했을 때 더 괴로움이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적게 가지면 괴로움도 적고, 바라는 것이 작으면 불
미국 대선 레이스가 한창 진행 중이다. 공화당 트럼프는 재선을 위한 SNS 정치를 계속하고 있고, 민주당은 트럼프와 맞서 승리할 후보를 고르는 중에 있다. 현재까지는 버그 샌더스와 부통령을 지낸 조바이든, 동성애자 부티지지 등이 접전을 벌이고 있다. 그 외의 다른 후보들이 열심히 뛰고 있지만 아마도 이들 중 한 후보가 대선전에서 트럼프와 치열한 혈투를 벌일 것으로 예상한다. 그런데 트럼프와 상대할 후보군에서는 멀어져 있지만 유권자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한 후보가 있다. 그는 0%의 지지율에서 최근 8%까지 끌어 올리는 놀라움을 주고 있는 대만계인 앤드류 양 갱(Yang Gang)이다. 그는 현재 민주당 대선 후보 4위에 올라 있고 그의 지지층 표가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어느 날 혜성같이 나타난 그가 이렇게 주목받는 이유는 그의 정치적 기반 또는 배경 때문이 아닌 그의 선거운동 방식 때문이다. 그의 선거운동 방식을 연구한 언론은 첫째, ‘좌도 우도 아닌 새로운 지지층’ 둘째, ‘해시(#)태그와 인터넷 신조어로 무장’ 셋째, ‘숫자(math)로 설득’ 넷째, ‘즐기면서 선거 운동’ 등 네 가지로 정리했다. 그는 분명 진보진영
대한민국이 위기다. 한국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나? 지역교회(local church)와 목회자의 성경관과 가치관에 따라 각자도생(各自圖生) 해야 하나? 아니다. 이럴 때 일수록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말씀, 기도, 전도…. 맞다. 맞지만, 위기의 때에 교회에 꼭 필요한 것은 하나밖에 없다. 뭘까? 부흥(Revival)이다! 나라가 위기인데 생뚱맞게 부흥을 들고 나온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진정한 부흥만이 교회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나라도 살릴 수 있다. 도대체 부흥이 무엇이길래 그 모든 것을 살린단 말인가? 인도네시아를 구출하신 하나님 1965년 인도네시아에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가 있기 4일 전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가난한 티모르 섬의 작은 마을에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성령님을 부어 주시기 시작했다. 성령께서는 그 마을의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기도하게 하셨고, 수카르노 정부시절, 인도네시아는 공산주의자들의 변란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됐다. 그렇게 성령님이 부어지신 후, 티모르섬 소우마을의 성도들은 즉시 전도팀을 만들었다. 그리고 티모르섬과 주변 섬들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자,수 십, 수 백 명이 한꺼번에 구원을 받고, 무수한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로 시작, “장군의 아들 김두한, 날자꾸나 이상, 황소 중섭, 역사는 흐른다.”로 끝나는 노래가 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노래한 ‘역사는 흐른다.’이다. 역사는 흘러가야 하는 데, 지금 한국의 역사는 거꾸로 흐르고 있다. 유럽에서는 30년 전에 끝나버린 이념전쟁이 한반도를 휘감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래, 모든 것이 거꾸로 흐른다. 탈 원전 무대책, 태양광과 무능 에너지 정책, 검증되지 않았던 소득주도성장의 경제 파괴, 실패를 되풀이하고 있는 부동산 정책, 비전문가에게 떠맡긴 교육정책, 우물쭈물 난민정책, 지소미아 파기, 안보해체, 한미동맹 파기, 사회주의 고려연방제 지향 그리고 급기야 조국 사태까지….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숨이 찬다. 대한민국 역사 이래 이런 날은 없었다. 그래도 역사는 흐른다.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카톨릭 종교를 시작하자, 참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종교를 떠나 순례의 길을 떠난다. A.D. 313년부터 A.D. 1517년까지 1,200년 동안 유럽은 로마카톨릭 교황이 통치하는 암흑의 시대였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산속이나 계곡이나 알프스 산지에 숨어 살았다. 로마…
지난 4월부터 시작된 홍콩시민들의 우산시위가 수개월째 계속 되고 있다. 며칠 전에는 거리에 설치된 스마트 가로등 20여 개를 시위대들이 쓰러뜨렸다. 그런데 그 이유가 간단치 않다. 최첨단 카메라와 감지기를 갖춘 스마트 가로등이 개인의 사생활 침해는 물론 안면 인식 기능으로 시위대를 감시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이렇듯 요즘 스마트 가로등은 어두운 거리를 밝혀 주는 편리함을 넘어 날씨, 교통정보수집 등 다양한 기능들을 가진 도구로 진화했다. 아날로그 시대의 단순한 기능만을 반복하던 생활도구들이 디지털 시대로 진입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기능들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렇게 4차 혁명시대, 즉 AI 인공지능 시대인 현대는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의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인간의 역할을 조금씩 대체하고 있는 로봇들은 진화의 진화를 하면서 반려로봇의 시대를 거쳐 다양한 분야에서 사람을 흥분시키고 있다. 미래학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 첨단화 되고 인간화 될 인공지능으로 인하여 수 백 만개의 직업들이 오래지 않아 사라질 것이라고 밝힌다. 이미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 친숙해진 다양한 사물 인터넷, 딥러닝(Deep Learning), 온전한 구조의 심장까지 만드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를 마치고 귀가 하는데 어머니가 집에서 키우던 닭을 잡고 집을 나서던 중 내가 물었다. “엄마! 닭은 왜 가지고 어디가?” “음 시장에 가서 팔려고 “ “ 왜 팔아?” “응 돈 쓸 일이 있어서…” 돌아오신 어머니 품에 닭은 없었다. 이튿날 학교 특활시간에 문예부에서 글짓기 시간에 닭과 얽힌 내 이야기를 원고지에 담아 써 내려갔다. 마침 문예부 지도를 하신 담임 선생님이 내가 제출했던 원고지를 주시면서 앞에 나와 읽으라고 하셨다. 200자 원고지의 대여섯 분량을 읽어 내려갔다. 선생님은 참 잘 썼다고 칭찬하시며 다음 글짓기 대회에 틀림없이 입상할 거라고 칭찬 하셨다. 그 후로 나는 원고지 칸을 채우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고 했다. 모든 가르침의 과정에서 어떤 과제를 학습하기 위해서는 학습자는 주어진 자극에 대해서 적절한 반응이 도출되어야 모든 학습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부활절에 성도들이 나눠준 계란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뭇 인생들에서 안에서의 ‘줄’, 밖에서의 ‘탁’이 되어 동시에 일어났을 때, 새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할 수 있다. 부활절에 달걀을 삶아서 나눠주는 풍습을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로마 멸망의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양한 이유들을 제시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설, 쾌락의 대명사인 혼욕으로 문란한 성적 향락을 제공한 목욕탕 설, 납 성분의 수도관 구축으로 인한 납중독 설 그리고 극단적인 타락설 등을 말하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나카가와 요시타카의 ‘빵과 서커스(Bread and Circuses)’의 역자 임해성이 ‘이 책을 읽기 전에’를 통해 언급한 대로 로마의 멸망 원인이 꼭 그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미 앞서 언급한 것들은 로마 초기부터 있어 왔던 문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쇠락은 제국의 거대한 규모가 가져온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결과였다. 번영은 부패를 촉진한다. 정복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파멸의 압력은 늘어간다.”는 임해성의 로마 멸망 진단에 수긍을 하게 된다. 고작해야 9m 앞 밖에 볼 수 없는 코뿔소가 앞을 향해 돌진하듯이 7~80년대 한국교회는 오직 부흥이라는 대명제 아래 코뿔소처럼 눈앞만 보고 돌진하듯 달렸다. 그 결과 제2의 예루살렘이라는 세계의 찬사를 들으며 부러움의 영적 대국이 됐고, 로마가 정복전쟁을 벌이듯이 한국 기독교는 서로 앞다퉈 전 세계로 선교전쟁을 시작
토종 게임기의 부활, 23년 만에 부활한 ‘공중보건장학제도’ 대량 미달! 세상 사람들도 부활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뭔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실체는 모르고 결과만 가져다 쓰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찬양한다. 주님과 함께 일으켜 세워진 우리는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간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갱이이다. 그런데 우리는 진정 성경적인 부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진짜 금요일에 돌아가셨는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금요일’(Good Friday)에 죽으시고 ‘부활절’ 주일 이른 아침에 죽음에서 일어나셨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보통 토요일) 전날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금요일에 죽으신 것으로 믿고 있다. 아니다. 예수님은 수요일 날 돌아가셨다. 그분께서 죽으신 다음 날의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정규 안식일 즉 토요일의 안식일이 아니었다. 그 날은 매년 한 번 있는 안식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안식일이 큰 날이었기 때문이다(요 19:31). 이러한 큰 안식일은 한 주의 어떤 요일이라도 될 수 있으며 그 해에는 분명히 목요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예비일(수요일)에 십자
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은 크게 3세대로 구분되어 있다. 오늘의 사회가 있기까지 과거에 수고하고 땀 흘리는 세대로 ‘공경과 섬김’의 대상인 1세대와 2세대는 지금 우리 사회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세대로 ‘격려와 협조’의 대상이다. 또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책임을 지며 땀 흘릴 제3세대는 ‘투자와 양육’의 대상인 것이다. 바람직한 사회는 이 3세대가 한데 어울려서 서로 공경, 격려와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함께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계층, 학력, 연령, 이념, 지역별로 나라는 사분오열로 갈가리 찢어져 있다. 사회 통합을 앞장서서 견인해야 할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따라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거나 심지어는 즐기고 있다. 그 결과 남북분단보다 남남분열을 더 우려하는 목소리가 비등해져가고 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교단과 교회는 함께하는 공생(共生)의 몫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 대답은 “아니요”이다.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반목과 대립 분열의 내홍을 겪지 않는 교회와 교단이 드물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부여받은 교회 내에서조차 함께하는 삶을 이루어가지 못한다면 교회 밖에서 공
조국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아름다운 전통은 존중하고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전통이 전혀 성경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진리가 전통이 될 수 있지만, 전통이라고 해서 항상 진리는 아니다. 많은 교회에서 사순절이 시작됐다. 사순절이 성경에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순절(Lent)은 성경에 없다. 그렇다면 사순절(四旬節)은 사람의 전통이요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 불과하다(골2:8).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받았던 고난을 생각하며 기도와 절제의 삶을 산다는 사순절! 사순절을 지내는 그 신앙과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성경에 없는 이교도의 절기를 지킬 수는 없지 않겠는가. 사순절은 어디서 왔는가 사순절(四旬節)은 부활절 이전 40일을 금욕하며 지내는 절기를 말한다. 사순절은 주일 6번을 빼고 계산하기에 실제로는 46일 간이다. 특별히 사순절 절기가 시작되는 날은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이라 불린다. 2019년 올해 사순절은 부활절(Easter)이 시작되기 전인, 3월 6일부터 4월 20일(부활절 이브)까지다. A.D. 325년 니케아공의회(council of Nicea)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