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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믿음은 회색지대를 용납하지 않는다

시대를 읽는 지혜-4
임원주 목사
진리교회 협동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비록 사람이 믿는 것이며, 사람이 믿기로 결단해 믿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로부터 오는, 그 기원과 출처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바울은 이 내용을 간단히 압축해 ‘선물’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엡 2:8~9). 그래서 교회를 좀 다녔다고 한다면 이 내용과 이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따라서 누구든지 믿음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이 구절의 개념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몇이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의구심이 조금도 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크게 실패하거나 낙담하거나 큰 죄책감에 짓눌려 견디지 못한 채 하나님 앞에 엎드린 사람들이 보여주는 믿음의 경우다. 성경적 믿음의 정의에 기본적으로 깔린 개념은 ‘도구’이며,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인데, 정말이지 사람이 이 기본개념에 충실해지는 것은 자신감, 자존감, 자부심을 상실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실패의 상태에 있을 때, 의기소침해져 있을 때, 자신감을 잃었을 때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되고, 신실한 마음가짐을 갖기가 쉬워진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다
물론, 심각한 실패를 하고 고통스러운 절망감에 시달릴 때 가슴 속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원망에 맞서 싸우며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지켜내는, 그러한 믿음의 싸움은 조금도 쉽지 않다. 원망이 분노로 바뀌기 쉽다. 이 때문에 믿음을 저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원망이 자신의 가슴에 둥지를 틀지 못하게 막아내고 분노를 저 멀리 쫓아내는 데에 성공한, 믿음의 승자도 있다. 속된 것, 은혜의 원수에게나 속한 유혹에 선 싸움에서 믿음의 승자가 된 이들이 겸손히 자신을 낮춰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감동적이다.


믿음이 승리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믿음의 승자를 즐겁게 칭송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러나 승자 자신은 또 다른 차원의 싸움에 진입한다는 것을 그 자신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실패하여 의기소침해졌을 때 겸손히 처신하며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것과 성공해 자랑스럽고 당당한 위치에 올라섰을 때 마찬가지로 겸손히 처신하며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은 비록 ‘믿음’에 대한 정의는 정확하게 동일하지만 그 정의를 실현하는 차원이 완벽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사람일지라도 그 본성 깊은 곳에는 이 차이를 망각하기 쉬운 성향이 남아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이 차이점을 지적하는 격언을 쉽게 만난다. 예를 들면, ‘화장실에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라든지, ‘돈을 빌려줄 때는 앉아서 빌려주지만 받을 때에는 서서 받는다’라든지, ‘자신을 찍어달라고 선거운동할 때 다르고 당선된 뒤에 다르다’라든지, ‘부자가 되더니 사람이 변했어!’라든지, ‘힘센 자리에 가더니 딴 사람이 됐어!’라는 말이 그 차이점을 목도한 경험담을 배경으로 한다. 익숙하게 들어본 말이라면 이런 식으로 사람이 변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뜻이다. 그래서 ‘원래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어’라든가 ‘사람이 자리를 만들고 그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결론은 언제나 진리처럼 들린다. 그런데 진리처럼 보인다고 해서 진짜로, 진리를 정확하게 반영한 판단이라고 믿으면 안 된다. 성경에 입각한 판단은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각별한 가르침에 주목한 판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는 죄 그 자체로 나쁜 것이기에 우리는 죄에 맞서 싸우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종교란 이단-사이비 말고는 없다. 신통찮은 무당조차도 죄짓지 말라고 가르친다. 죄가 사람 속에 들어가서는 그 인격의 깊은 곳에 치명적인 감염을 일으켰다. 건강한 세포였던 것이 암세포로 변질되는 것처럼 사람의 인격 깊은 곳에서부터 변질이 일어났다. 그 변질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이기심’이며, 다른 표현하자면 ‘자기중심성’ 혹은 ‘자부심’이다. 이것은 여러 상황에서 여러 변종을 낳는다. 


그래서 교만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오만방자함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우쭐거림, 때로는 자랑질, 때로는 시기심, 때로는 경쟁심, 때로는 자존심, 때로는 우월감, 때로는 비아냥, 심지어 ‘쓸데없는 잡담’으로 나타난다.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가르치셨다. 이 말씀은 공관복음 전부에 실려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 다섯 차례 나온다. 이 중에서도 ‘자기부인’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구절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마가복음 8장 34절을, 혹은 마태복음 16장 24절을 각각 그 다음 구절과 함께 읽으면 이 말씀은 단순히 제자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직결된 말씀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참된 믿음은 ‘자기부인’을 전제로 포함한다
결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내용이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구원받기 위해 예수를 믿고 고백한 사람에게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라고 가르치시니,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의존하는 동시에 ‘자기를 부인’하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니, 어떤 점에서는 역설적이다. 이 역설적인 두 측면을 동시에 이뤄내야 한다니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과업이다. 하지만 이 불가능성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를 선물로 주시고, 예수의 공로로 말미암은 믿음을 우리 가운데 일으키신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예수께서 완성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물로 받은 그 믿음을 깊이 알고자 하고, 그 믿음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야 한다. 그것 역시 믿음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 믿음에 실패하기 가장 쉬운 때가 바로 성공했을 때이다. 성공했다는 자부심이 가슴에 가득 찼을 때, 자신감이 넘칠 때, 자신이 해냈으며 더욱 해내겠다고 다짐할 때, 교회를 건축하고 빚을 다 갚았을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러움과 칭송을 받을 때, 다른 누구도 감히 도전하기 어려운 과업에 도전하기로 했을 때, 비록 겉으로 드러내는 표정과 말투는 겸손하고 온화하여 다른 어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그 영적 내면에서는 ‘자기부인’이라는 믿음의 싸움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것이다. 


자기부인의 이 싸움을 ‘인격수련’ 혹은 ‘도덕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철학이며 동양종교라면 기독교는 믿음의 싸움이라고 보며, 성경이 가르치는 법도를 준수하는 것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특별한 종교다.

 

믿음의 성장은 자기부인의 성숙함에서 찾아야 한다 
이러한 믿음의 특성을 부인하고, 자기부인의 싸움을 외면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면서도 참된 믿음을 가졌다고 자부하면서 ‘기독교’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이단사이비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참된 믿음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종교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단적 교리, 이단사이비 원리를 끝까지 놓치 않는 종교가 동일한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외람된 것이 없다.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 정통교회와 이단사이비를 하나로 합칠 수 있는 정당한 권력이라는 것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사특함은 자신만큼은 양지와 음지가 만나는 회색지대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하기도 한다. 참된 믿음은 결코 회색지대를 용납하지 않는 믿음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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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3500침례교회와 목회 동역자. 성도들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인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이제는 구원의 완성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사실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복음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