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의 기적 같은 고난을 이겨내고 목회 여정을 마무리했다. 시대를 거스르는 고난과 역경 배고픔과 굶주림의 서러움을 느끼는 것조차도 사치라 죄악이라 생각이 들게 하는 종의 길 찢어진 천막 사이로 별빛처럼 비추는 낭만이 가득한 천막 교회에서 밤새워 부르짖던 눈물의 찬양들, 애끓는 심정을 가사에 실어 부르고 또 부르고 눈물로 지새우던 수많은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1979년 2월 28일 신학교 3학년 신학생 정대기를 만나 한 생명, 한 생명을 찾아 구원하는 그 기쁨 어디에 비기랴. 영혼을 향한 열정으로 우리 두 사람은 뜻을 모아 기도로 준비하고 결혼 2주 만에 꿈에 부푼 개척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전라남도 순천이 어디에 붙었는지 한 번도 들어보지도 가보지도 않은 오로지 침례교단에 불모지라는 순천 땅, 장로교의 선교지로서 타 교파는 터를 잡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더욱이 침례교회 개척은 어느 누구도 시작할 엄두도 못 내는 전략 개척지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배경이나 도움의 손길 기도 동역자 물질 후원자 등 단 한 가지도 준비하지 않은 채 무모할 정도로 사명 의식에 불타 급하게 맨 몸으로 개척에 뛰어든 것이었다. 아직 재학 중이라 남편이 학교에 가고 나면
20년을 살면서 저에게 가장 큰 고민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죄를 정복할 수 있는가와 인간이 사는 목적을 알고 싶었습니다. 대학 2년 때 기독교동아리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됐고, 목회를 꿈꾸는 남편도 만나게 됐습니다. 그 때부터 부모님의 엄청난 핍박을 받아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고 거짓말을 하게 되어 비밀리에 신앙을 유지했습니다. 그 당시 간절한 소망은 ‘마음 편히 교회를 갈 수 있다면, 국어 전공 서적이 아니라 매일 성경보고 전도하고 양육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였습니다. 목숨 건 사투의 결과 26살 때 결혼을 허락받았고, 27살 8개월 만삭의 몸으로 집 거실에서 남편과 단 둘이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대학교 때 그토록 꿈꾸었던 삶을 22년째 살고 있습니다. 매일 기도하고 전도하고 양육하면서 말입니다. 목회 15년만에 전주대학교 채플 강사로 부름을 받아 그토록 갈망했던 캠퍼스 사역이 시작됐습니다. 저는 그 때 두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첫째, 전주대에 기독교 동아리를 세운다. 둘째, 학생회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건물을 준비해 학생들에게 무료로 밥과 차를 주면서 말씀으로 양육한다. 밥을 굶는 학생에게 매일 도시락을 싸서 갖다 주고, 부모님 부재인 학생의
저는 1958년도에 산 속에 있는 작고 가난한 교회 전도사의 여섯 딸 중의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사례비도 거의 없는 작은 교회라서 니콜스 선교사님이 미국으로 입양을 권유했으나 다행히 여기에 남게 됐습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 인생에 첫 번째 신앙적인 변화는 중3 때 일어났습니다. 여름 방학 때 나무 그늘에 배를 깔고 누워서 방학숙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의 나의 고민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으려면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 돈을 많이 벌어서 헌금을 해볼까? 여군이 되어서 나라를 위해 일해볼까? 기타 등등 선풍기도 없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부채를 열심히 부쳐대도 땀이 줄줄 흐르는 한낮의 폭염 속에서, 어머니는 한복을 입으시고 아버지는 검은 양복 차림으로 심방을 다녀오셨습니다. 어머니는 그날 그 더위에 제대로 열을 받으셨습니다. 대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심방 가방을 냅다 마루로 휙~ 던지면서 “에잇! 빌어먹을 것 못해 먹겠다!” 하시는 겁니다. 저는 어머니의 그 모습을 보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아하! 하나님의 일은 하기 싫어서 저렇게 억지로 해도 복을 받는구나! 나도 사모가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