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나라가 있으면 믿을 수 있겠는가? 병원비 공짜, 교육비 공짜, 세금 없음, 한 가구당 한 명의 가정부 지원, 결혼하면 주택 제공, 매년 생활비 1억 원 지급 등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며 살고 싶은 나라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나라가 존재한다. 지상낙원이라고 불리었던 이 나라는 호주에서 북서쪽으로 3,260㎞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총면적 21㎢로 울릉도의 1/3 크기의 작은 섬나라, 나우루 공화국이다. 나우루 공화국은 총인구가 9,000여 명인 세상에서 세 번째로 작은 나라이다. 나우루 공화국은 지폐를 휴지로 사용할 만큼 부유한 나라였다. 작은 섬나라인 나우루 공화국이 어떻게 세계 최고의 부국이 된 것일까? 그것은 놀랍게도 ‘새똥’ 때문이다. 나우루섬은 새똥 섬이라고도 불린다. 원래 산호초로 이루어진 이 섬에 많은 새들이 오랜 세월 똥을 싸게 되었다. 그 ‘새똥’은 화학적 작용을 일으켜 인광석이 됐으며, 그 위에 사람이 살게 된 것이다. 인광석은 비료의 주원료가 되는 인산염을 함유한 광석이다. 20세기 폭발적으로 증가한 인구의 식량을 충당하기 위해 사람들은 척박한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척박한 땅에서 풍족한 수확을 얻기 위해서는
수동과 능동에 대한 심리학적인 이해를 통해 신학적인 통찰을 구하여 보기로 한다. 수동적(受動的 : passive)이란 말의 뜻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의 작용을 받아 움직이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는 자기 혼자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를 말함인데 내가 동의를 하던지, 안 하든지 간에 타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을 수동적이라 한다. 신학적인 면에서 칼빈의 절대 예정론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총론을 바탕으로 타락과 창조 이전에 이미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을 자와 멸망할 자가 예정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의 의지나 믿음이 아닌 절대적인 하나님의 예정(하나님의 의지로 선택)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인간 자체의 자유나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의지는 없다고 본다. 즉,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역기능의 관계 가운데 수동적이란 말에는 부정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가스라이팅 등 부적절한 관계라면 가해자의 능동 또한 부정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피해자는 심리적인 자아경계가 무너져 있으며, 가해자는 피해자의 자아경계를 무너뜨리고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욕심을 채운다. 그러나 심리학적인 면에서 보는 절대 예정론은
1938년 8월 조선총독부는 국체명징(國體明徵)을 내세우며 신사 규칙을 전면 제정해 다시 참배할 것을 재차 동아기독대(1933~1939)에 강요하자, 김영관 감목은 재차 ‘달편지’를 통해 신사참배와 황궁요배에 불복할 것을 전국의 교회에 자차 통고했다. 이에 일제는 동아기독대의 신사참배 반대거부의 확산을 막고자 이들을 제압하려는 방안 마련에 신속하게 착수하는데, 이런 와중에 경흥구역에 속한 함경북도 웅기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광고가 실린 ‘달편지’가 일경에 의해 발각됐다. 4. 신사참배 거부와 교단폐쇄(1944년)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한반도를 넘어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전출하려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 같은 전시체제 아래서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법률 제55호)을 공포했는데, 이는 총력전을 위한 체제로써, 국민적 통합이라는 명분 아래 노골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침례교에도 닥쳤는데, 동아기독대(1933~1939, 현 침례교의 전신)의 김영관 감목(총회장)은 1935년의 ‘달편지’를 통해 전국의 교회에 신사참배와 황궁요배의 부당성과 당국의 강요에 불복할 것을
우리교단은 지난 113차 총회를 통해서 교단 산하에 ‘침례교사회봉사단’을 구성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이로써 침례교단은 성경적인 교회공동체로서 교회와 세상을 향한 전문적이고 조직적인 섬김과 봉사의 사역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필자는 이 지면의 글을 통해서 이번 총회를 통해서 세상을 품을 수 있는 귀하고 아름다운 사회봉사단이 공식적으로 출범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교단 사회봉사단의 필요성을 짧게 논해봅니다. 첫째는 교회가 세상의 낮은 자리에 함께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입니다. 한국 기독교에 잘 알려진 설교인 존 스토트 목사는 ‘현대 사회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라는 책을 통해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회들이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려면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교회들의 생각을 환기시켜줍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근본적인 사회문제들은 근본적으로 빈부의 격차에 의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빈부의 격차들은 개인의 능력과 열심으로 극복될 수 있는 부분들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극복될 수 없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더불어서 교회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
그래서 아버지와 저는 성도들 앞에서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 채 허리에 잔뜩 힘을 주고 마치 군가 부르듯 하고 내려왔습니다. 물론, 성도님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및 함성소리와 함께 말입니다. 가슴을 적시거나 감흥을 주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냥 씩씩하게 부른 것에 대견해하는 눈빛 그것 하나였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아버지께 정중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빠, 원수 갚았으니까 다시는 하지 말죠….” 순전히 그 날 무대는, 그 옛날 저 때문에 망친 특송을 상쇄시키기 위해 해 드린 것이지, 아버지 말씀에 순종해 기쁜 마음으로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제법 맘에 드셨던지, “알았다” 하시며 연신 웃으셨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부모님께서, 천안 집에 함께 사실 때인데, 동생을 하나님 품에 먼저 보내고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아갈 때쯤입니다. 특히 부모님께서 새로 나가게 된 은혜침례교회 오지수 목사님과 박미희 사모님 외에 온 교우들이 우리 가족의 사정을 아시고, 특별히 부모님께 많은 사랑과 관심으로 힘을 주셨습니다. 동생의 장례식장까지 오셔서 예배와 기도와 격려를 잊지 않으셨고, 무엇보다 사람을 살리고 순교
우리는 매일 끼니를 거르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만큼 먹거리는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시대에 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각자의 사명을 다하시는 동역자들에게 나의 경험을 나누며 주변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해주고 싶은 마음 뿐이다. 나는 전문적인 학자도 아니고 의료진도 아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투병하면서 많은 환우들과 함께 살아온 경험들이 동역자들에게 작은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에스겔 곡식과 엉겅퀴의 대해 2008년 어느 봄날 암 환우들과 충남 홍성 산속에서 살고 있을 때. 40대 초반의 부부가 찾아왔다. 대장암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전국에 이곳저곳을 다녀 보다가 마지막으로 필자를 찾아온 것이다. 물도 못 삼킬 정도의 환자였다. 너무 늦게 찾아왔기에 기도 외에는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었다. 이런 사역을 5년 이상 하면서 수많은 환자들을 보내고 지켜봤는데 유독 이 환자를 본 나는 애절한 마음으로 산속에서 홀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외쳤다. “하나님 저들을 살릴 수 있는 약들을 하나님은 아실 텐데 저들의 고통
펜윅이 공교육을 금지한 결정적 계기가 1924년 10월 11일 발생했는데, 그것은 충청남도 논산에 있는 강경공립보통학교의 신사참배 거부였다. 이는 강경신사(神社) 추계대제(秋季大祭) 때 강경공립보통학교에 다니는 기독교인(천주교 개신교) 학생들이 참배를 거부하거나 불참했는데, 이로 인해 학교 측은 이들을 처벌(퇴학 처분)했다. 4. 일제의 공교육 거부(1926년)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일제가 심혈을 기울인 것 중의 하나는 바로 한국의 교육계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는 식민지 한국을 황국신민화해 자신들의 식민지를 공고히 하려는 수작이었다. 이를 위해 1911년 8월 23일에 공포된 조선교육령(칙령 제229호)은 한국의 학제를 천황의 칙령 아래 위계적인 법체계로 확립했고, 같은 해 10월 20에 공포된 사립학교 규칙(부령 제114호)은 ‘조선교육령’과 동일 선상에서 한국인의 식민지 교육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1926년 제21차 대화회(총회)가 예천구역 점촌교회에서 열렸는데, 이때 전격적으로 발표된 것이 펜윅의 ‘공교육(학교 교육) 금지령’이다. 이는 펜윅에 의해 주장됐고, ‘달편지’를 통해 전국교회에 전달했는데, 이때의 상황을 경험했던 김용해 목사는 “19
저희 삼형제가 유년기를 보냈던 영등포의 교회에서는 매 주일 저녁예배 때 특송 시간이 있었습니다. 솔로부터 중창까지, 심지어는 자녀들을 동원한 악기연주까지, 그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가족들끼리 그렇게 특송을 한 번 해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씀을 가끔 하셨는데, 아버지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어머니는 적극 만류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꼭 특송을 하겠노라 덜컥 신청부터 하시고는 날짜와 곡까지 정해서 통보를 하셨습니다. “슬픔 걱정 가득차고 내 맘 괴로워도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죄 짐이 풀렸네~.” 아버지의 고집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고, 우리는 매일 저녁 동원되어 연습을 해야 했습니다. 형제가 모두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특송 연습을 하러 모이라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매일 저녁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저녁밥을 먹고, 그냥 우리끼리 몸싸움을 하거나 티격태격하는 것이 더 즐겁지, 몇 번을 불러도 별 다를 바 없는 화음을 들어야 하다니….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적극적인 화음을 듣는 것은 아주 큰 고역이었습니다. 무조건 크게만 부르면 ‘장땡’이라,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깜짝 놀라 깨어나실 정도였습니
가스라이팅은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 1944년 미국의 영화 〈가스등(Gaslight)〉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연극의 줄거리는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남편 잭이 온갖 속임수와 거짓말로 멀쩡한 아내 벨라를 정신병자로 만드는 과정을 그렸다. 잭은 보석을 훔치기 위해 윗집 부인을 살해하면서 시작된다. 이 보석을 찾기 위해서는 가스등을 켜야 했는데, 이렇게 하면 가스를 나눠 쓰던 다른 집의 불이 어두워져서 들킬 위험이 있다. 이 때문에 잭은 집안의 물건을 숨기고 부인인 벨라가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몰아간다. 잭이 보석을 찾기 위해 가스등을 켤 때마다 벨라가 있는 아래층은 어두워지고, 벨라가 집안이 어두워졌다고 말하면 잭은 그렇지 않다며 아내를 탓하며, 결국에는 정신병자로까지 몰아세운다. 또 주변 환경과 소리까지 교묘히 조작해서 현실감을 잃도록 해 갈수록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자책하며 가해자에게 의지하게 만든다. 이처럼 심리적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가스라이팅’이다. 가스라이팅은 정신적 학대의 일종으로,
히브리서 12장 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의 활약이 참으로 눈부시다. 특별히 양궁과 사격 그리고 펜싱 분야에서 보여준 선수들의 메달을 따는 치열한 모습이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여주고, 보는 국민들에게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해 줬다. 하지만 1936년 독일에서 개회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올림픽 시상대에 오르고도 고개 숙인 두 선수가 있었다. 이들은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손에 쥐었다. 이들의 비장한 인상을 관중들은 의아해했다. 시상대에서 이들은 결코 기뻐할 수 없었다. 메인스타디움에는 자신들의 조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의 국가가 우승자를 위해 연주되고 있었다. 이들은 고개를 숙여 게양대에 솟아오르는 일본 국기를 외면했다. 훗날 동메달리스트는 금메달리스트였던 동료가 부러웠다고 말했다. 우승자는 기념품인 참나무 묘목을 들고 있어 가슴팍에 붙인 일본 국기를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의 마라토너인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동메달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