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가사키는 과거 가톨릭의 박해 역사가 있는 곳이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수많은 성당이 세워진 가톨릭의 성지라고 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나가사키는 통상적으로 익숙하고 친숙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나가사키 하면 나가사키 짬뽕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짬뽕이란 말은 나가사키에서 유래된 것이다. 기원에 대한 여러 설이 있지만 그것은 모두 근거 없는 낭설에 가깝다. 분명한 것은 짬뽕은 일본어과 일본에서 유래됐다. 19세기 푸젠성(복건성) 출신의 천핑순이 일본 나가사키에 정착했는데, 푸젠성의 지방 요리인 탕육사면(돼지 뼈와 닭 뼈 육수에 파, 버섯 등 야채와 면을 넣은 요리)에 자기 나름대로 해산물과 어묵을 추가해 변형한 면 요리를 만들었다. 1899년 만들어진 면요리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중국면이나 중화면으로 불렸다. 그러다 당시 일본인들이 여러 가지가 섞인 음식이라는 의미로 일본어 명사 ‘섞음’(지금은 사용하지 않음)이라는 ‘찬폰(ちゃんぽん)’으로 이 면 요리를 부르게 됐다. 또한 중국어 동사 ’밥을 먹다’의 ‘츠판(吃饭)’의 푸젠성 사투리가 일본인들에게는 ‘찬폰(ちゃんぽん)’처럼 들렸기에, 결국
부활절을 맞이한 이 봄, 우리의 마음은 여느 해보다 깊은 울림과 간절함으로 가득하다. 사회 곳곳에서 들려오는 갈등과 혼란, 불안과 상처의 소식들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부활’이라는 신비로운 은혜 앞에 서게 된다. 어두운 무덤을 밝히며 솟아오른 그 생명의 빛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깊은 위로와 희망이 된다. 지금 한국사회는 많은 이들이 서로를 향한 이해와 배려를 잃어가고, 공동체의 온기가 점점 식어가는 듯한 위기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때일수록, 교회는 세상 속에 파송된 부활의 증인으로서, 그 기쁨과 소망을 세상과 나눌 소명을 되새겨야 한다. 교회는 다시금 부활의 복음 앞에 서야 한다. 부활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 각 사람 안에 시작되는 새로운 생명이며, 회심의 출발이다. 침례는 그 부활의 은혜를 개인이 믿음으로 고백하는 가장 명확한 표현이다. 그렇기에 우리 교단 공동체는 개인의 신앙고백과 자유로운 양심에 따른 회심의 응답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그 자유는 곧 책임이 되며, 그 책임은 지역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돼야 한다. 우리 교단은 성경을 믿음과 삶의 유일한 기준으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납세의 의무를 지고 있으며 세금을 납부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국가의 보호와 관리를 받을 수 있음을 자연스럽게 체득한 상황이다. 직접세와 간접세를 통해 우리는 다양한 세금을 납부하며 그에 대한 혜택을 받고 있다. 침례교회의 협동비 납부도 우리가 침례교회 회원으로 당연히 가져야 할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각 교회는 회원의 자격으로 대의원을 파송하고 교회를 대표한다. 이는 협동비를 납부하며 이뤄지는 일이다. 단순히 총회에 가입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특히 협동비의 30%는 목회자 개인에게 노후 후원금으로 자동으로 적립하고 있으며 이는 은퇴시 지급되는 것이기에 교회가 정한 협동비 납부가 원활하게 이뤄진다면 이 부분도 목회자에게 유익이 될 수 있다.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는 총회에 가입한 교회가 일정액의 협동비를 납부하며 회원의 권리와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총회 규약 8조 8항은 “본회에 가입한 교회는 협동비를 납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각 교회가 자율적으로 정하여 매월 정기적으로 납부한다. 단, 본회의 공직에 취임코자 하는 자와 1명 이상의 대의원을 파송하는 교회는 총회가 정한 총회비를 납부한 자로 한다”로 규정하고
4. 장석천 목사(張錫天, 1885~1949) 장석천은 1885년 11월 19일 충남 부여군 임천면 칠산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부여의 유서 깊은 향반이었고, 그의 부친은 한국침례교회 초대 감로 중 한 분인 장기영이었다. 그는 조상 잘 둔 덕분에 비교적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어려서부터 지병으로 고생했다. 1902년 초(17세) 부친 손에 이끌려 신명균 조사에게 기도를 받은 후 기적적으로 회복됐고, 이후 부친의 권유에 의해 신명균을 따라 원산에 갔다. 그가 신명균을 따라간 것은 지병으로 학문 배울 시기를 놓쳤기에, 그를 통해 한문과 성경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장석천은 신명균에게 약 5년에 걸쳐 학문을 익혔고, 철저한 신앙훈련을 받았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펜윅 선교사의 집에 들러 성경에 대한 의문점을 열심히 질문했는데, 머리가 명석했던 장석천은 특히 신약에 대한 지식이 해박해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주요 절수를 암송하고 신약에 있는 어떤 구절도 잘 찾아낼 수 있어서 “걸어 다니는 성구 색인”이라 불렸고, 펜윅 선교사는 그의 방문을 언제나 환영했다. 장석천은 1902년 봄 일본에서 활동하던 스테드만 선교사가 잠시 내한했을 때, 부친과 함께 그에게
지난 3월 21일,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강한 바람과 건조한 날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 산불은 안동시 남후면 등 인근 지역으로 번지며 큰 피해를 초래했다. 산림청은 전국 12개 지역에 최고 수준의 ‘심각’ 산불 경보를 발령했으며, 이후 전국으로 확대됐다. 경상북도 의성과 안동 지역의 산불로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을 돕기 위해 다양한 구호 활동이 전개됐다. 대한적십자사 경북지사 등 단체의 자원봉사자들은 산불 발생 직후부터 이재민들을 위한 재해구호물자 지원과 심리 회복 상담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대구한의사회 소속 한의사 약 40명은 피해 지역에서 진료 자원봉사를 진행하며, 이재민들의 건강 회복을 돕고 있다. 경기도는 재해구호기금 35억 원을 지원하고, 소방인력과 장비를 파견해 산불 진화 및 복구 작업을 지원하고 있다.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는 ‘안동 산불 피해 이재민 돕기’ 모금 운동을 전개해 회원들의 기부를 독려하고 있다. 이재민을 돕기 위한 한국교회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은 지난 3월 28일 경북 의성 산불 피해 현장을 방문해 피해 주민들을 위로하고 공동모금회를 통해 의성군과 의성군기독교연합회(회장 김
신사참배 거부에 대한 교단의 결의가 확고하자 일제는 ‘우태호 사건’을 빌미로 원산총부에 들이닥쳤고, 원산의 헌병대도 1942년 6월 10일 이종근 감목(총회장)을 전격적으로 체포했다. 일제는 그에게서 자신들이 얻고자 했던 답을 얻지 못하자 다음날 강원도 울진에 있던 김영관 목사도 체포했다. 이는 그를 통해 교단탄압의 원인을 찾고자 했던 것으로, 김 목사는 이미 1938년 웅기교회 달편지 발각사건으로 3년 집행유예를 받은 상태였다. 이종근 감목처럼 김영관 목사도 일제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으므로 인해 고달픈 감옥살이가 시작됐다. 당시 김영관 목사는 이미 체포된 다른 분들에 비해 비교적 젊은 46세의 나이었으나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42년 6월 11일에 체포된 이래 원산 헌병대 유치장에서 겨울을 보냈고, 이듬해인 1943년 5월 1일 함흥 교도소로 이감됐다. 15일간의 재판 결과 검속된 32명 중 김영관 목사를 비롯한 이종근·노재천·전치규·백남조·장석천·박기양·신성균·박성도 등 9명의 교단 지도자는 일본의 검사에 의해 예심에 회부되어 재차 투옥됐고, 다른 23명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1943년 5월 15일에 석방됐다. 김영관 목사는
우리교단이 매년 9월에 진행하는 정기총회와 함께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행사가 있다면 ‘목회자부부영적성장대회(성장대회)’일 것이다. 매년 4월 또는 5월에 진행하고 있는 성장대회는 목회적 쉼과 재충전의 시간으로 다양한 프로그램과 집회, 동역자와의 만남과 교제의 시간으로 진행해 오고 있다. 올해 114차 성장대회는 “행복 그리고 새로운 도약”이란 주제로 오는 4월 28일부터 2박 3일간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 리조트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현재 성장대회 준비위원회가 세부적인 계획과 일정을 준비 중에 있다. 총회는 지방회별로 참가 신청을 받고 있으며 개인 참석은 받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지방회 중심으로 2박 3일간 성장대회에 참석해 단합을 도모하고 화합의 장으로 마련하기 위한 배려로 이해된다. 교단을 대표하는 행사인 만큼 114차 총회도 비중을 가지고 이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총회 준비위는 진정으로 목회 동역자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해 목회 일상에 지친 심신을 회복하고 새롭게 목회적 도전과 사명의 재발견의 시간으로 만들어줬으면 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고 경제침체가 계속되면서 함께 모이는 것이 예년 같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
최근 114차 회기 침례교 전도운동인 100만 뱁티스트 전도운동이 첫 모임을 가졌다. 한국침례교회의 사명이자 목적은 이 땅에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 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대명령을 감당하고 있는 교회는 그 본질이 바로 전도이며 선교인 것이 당연한 진리이다. 우리는 그 진리를 향해 이 민족과 열방을 향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 100만 뱁티스트 전도운동은 111차 고명진 총회장 회기 당시 코로나 팬데믹으로 침체된 교회의 부흥을 도모하고 개교회에 전도의 사역들을 지원해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로 시작됐다. 111차와 112차를 거쳐 이번 114차에서도 이 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전국 200여 교회가 참여하는 이번 100만 뱁티스트 전도운동은 총회의 전도물품 지원과 더불어 여러 전도 사역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단체와 교회들이 협력해 권역별로 전도사역이 전개된다. 그런 만큼 전국의 모든 목회자와 교회가 교회 부흥을 목적으로 진행되는 이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으면 한다. 전도의 환경과 현실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변화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복음을 듣고자 하는 이들은 점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축호전도, 노방전도는 사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유산(遺産)은 정체성과 자존심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어떠한 미래를 그려나갈 것인지 제시하는 청사진을 공유하는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 문명은 문자를 만들고 그들이 걸어온 길을 기록해 왔다. 이런 기록을 남기는 일, 역사를 남기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보존해 나갔던 국가나 민족들은 오늘날에도 문화 강대국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역사를 무시하고 기록하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직접 불살라버린 민족이나 나라는 현시대 그 존재를 찾아보기 힘들거나,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금세 무너져 내려가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문화대혁명으로 오랜 시간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을 깡그리 불살라버렸던 중국의 현재 모습을 보면, 기록을 남기고 이를 후세에 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경제대국으로 성장해 이제는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고 싶지만 이렇다 할 내세울 것이 없어 남의 나라 문화를 항상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기는 모습은 “소국이라 부르기에는 땅이 넓고 대국이라기엔 속이 좁아서 중국이라 부른다”는 한 네티즌의 댓글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 침례교는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며 후세에 전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열
김영관 목사(金榮官, 1896-1986) 김영관은 1896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4남(영국, 영진, 영익, 영관) 1녀(명선) 중 4째로 출생하였다. 본래 그의 가정은 진천 김씨의 유서 깊은 양반 가문으로, 뿌리 깊은 유교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첫째 영국과 둘째 영진이 1907년 간도에서 활동하던 김재형과 김경춘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 두 형제는 부친의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믿음으로 견뎠고, 마침내 가족 모두를 복음화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뤘다. 형들에 의해 복음을 전해 들은 김영관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녔고, 형들의 신앙을 본받아 날로 믿음이 성장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목숨 걸고 기독교 신앙을 믿고, 전해야 했던 시기였기에 온갖 고난과 환란 속에서 4형제는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성장했다. 1906년 대한기독교회의 간도 선교가 시작된 이래 1912년에 이르러 김영관은 형인 김영진과 함께 안규찰 종찰의 지도로 중국의 임강현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감당했고, 이듬해인 1913년에는 윤종두, 윤종진, 이만기, 홍순필 등과 함께 임강현에서 압록강 너머 대안 지역인 평안북도의 자성, 후창으로 넘어가 사역했다. 이때 중국어에 능통한 방사현과
이삭에게는 일본 규슈의 나가사키현이 다른 나라로 갈 중간 정착지였다. 잠시 나가사키에서 거주하던 이삭은 갑자기 개신교회의 주일예배를 가고 싶었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인도에 있을 때 유대인이었지만, 개신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개신교의 교리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됐다. 그때의 호기심이 다시 발동하여 나가사키에 소재한 개신교회 주일예배를 가려고 한 것이다. 1895년 4월 7일 주일 아침, 이삭은 개신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 그 교회에서 이삭은 그의 일생을 바꾸는 운명의 만남을 갖게 됐다. 바로 알버터스 피터스 선교사와 만나게 된 것이다. 알버터스 피터스 선교사는 네덜란드계 미국인으로 일본 나가사키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는 예배 후 이삭에게 기독교 교리에 대해 배우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이삭은 이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교리를 배우면서 이삭은 다른 나라로 가려는 일정을 늦추고, 나가사키에서 일자리까지 구하면서 기독교 교리를 세밀하게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약 9개월이 지난 1896년 1월, 이삭은 피터스 선교사에게 침례를 받게 됐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침례를 준 피터스 선교사의 이름을 따라 ‘이삭
114차 총회의 회기가 시작되면서 주목했던 행사는 바로 지난 2월 20일에 열린 전국지방회 워크숍이었다. 과거 교단발전협의회에서 보다 확대된 형태로 진행한 이번 워크숍은 지방회를 대표하는 회장과 부회장, 총무가 참석해 114차 총회 회기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11월 임시총회를 통해 구성된 새 집행부는 총회 사업과 예산 등을 확인하고 각 기관을 순방해 기관 보고를 들은 뒤, 이를 지방회 워크숍을 통해 공유한 자리였다. 그동안의 교단 주요 사업은 정기총회를 통해 보고를 받거나 인준을 통해 진행했던 사업이지만 침례교단만의 정체성을 세우고 현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이번 워크숍에서 주목할 부분은 바로 각 기관 보고 내용 중 기관의 재산 현황 공개와 114차 회기 중점 사업이라 할 수 있다. 각 기관의 재산은 그동안 정기총회 의사자료집을 통해서만 대의원들이 확인할 수 있는 자료였다. 1년에 한 번 이뤄지는 정기총회에서 1000페이지가 넘는 의사자료집의 기관 보고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관에 후원하고 있는 교회들도 기관의 후원 현황이나 재정 현황에는 그렇게 관심을
아래 내용은 1990년 당시 중학생이었던 양찬호 목사(아름다운)가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함께 했던 김호철 목사(현 세도제일)에게 보낸 편지글입니다. 양찬호 목사는 당시 장은교회를 출석하며 주일학교 교사였던 김호철 목사의 인품과 사역을 존경했다고 한다.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무더운 여름 날씨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몸은 건강하시겠지요! 저 또한 선생님께서 염려하시는 덕분에 몸 건강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7월 12일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교사 강습회는 7월 13일 저녁 7시부터 시작됩니다. 7월 14일은 오후 2시부터 시작됩니다. 대전침례교회가 17일부터 여름성경학교를 하는 바람에 또 연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학교입니다. 시간도 넉넉하고 시험 또한 끝나서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기말고사는 7월 5~6일, 이틀동안 보았어요. 홀가분한 기분 외에 걱정감도 있어요. 이번 여름방학을 잘 보내라 하는데 집안일도 있고 교회의 많은 행사도 있는 바람에 공부가 잘 안될 것 같습니다. 기도 좀 해주세요. 그리고 8월 6~9일 3박 4일동안 중고등부수련회도 있어요. 재미있을 것 같도 같고 기대도 됩니다. 장소는 학성침
지난 2월 13일 2024학년도 한국침례신학대학교(총장 피영민) 학위수여식이 있었다. 190명의 학사와 175명의 석사, 박사 6명, 목회연구원 7명, 평생교육원 29명 등이 새로운 침례교의 가족이 된 것이다. 그동안 학업에 정진하며 예비 사역자의 길을 준비한 이들에게 진심어린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또한 이들을 위해 아낌없는 기도와 후원으로 함께 해준 가족들에게도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제 이들을 우리 교단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미래를 책임지는 사역자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뜻에 따라 순종하며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먼저 그 길을 걷고 있는 목회자들이 이들의 길을 열어 함께 할 것이다.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사명의 길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목회 현장의 현실이 피부로 와 닿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어떤 사역이 나를 향한 부르심인지를 고민하며 이 길을 선택한 이들에게 목회 현장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상황이다. 특히 한국교회의 침체 속에서 교회는 사역자를 세우는 것이 적잖은 부담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경제 침체와 물가 상승 등의 외적인 요인으로 수도권 지역의 사역자들이 사역하며 생활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외에도 여러 교회들
전치규 목사(全穉圭, 1888~1944) 전치규는 1888년 1월 5일 강원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동리에서 신동으로 불렸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고을에서 한학자로 활동하며 존경을 받았다. 20세(1907년) 때 영동구역 울진에서 활동하던 손필환 교사(전도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에 입교했고(이때 전치주, 남규연 등 8명이 함께 개종), 이후 울진지역에 행곡과 척동에 교회가 세워져 부흥함에 따라 울진구역이 설정됐다. 학문이 뛰어났던 전치규는 개종 직후 펜윅의 비서로 발탁돼 원산총부로 갔다. 그는 총부의 사무를 보는 한편 펜윅 밑에서 6년간 성경을 공부했으며, 조력자로 성경 번역에도 참여했다. 펜윅이 한글로 번역을 하면 어휘를 다듬고 바로잡는 일은 그가 담당했는데, 먹을 갈아서 일일이 붓으로 썼고, 한 번 쓴 것을 다시 교정을 보고 나면 또 고친 부분이 많아 다시 써야 하는 등 5~6번 기록하는 것은 예사였다고 한다. 신약성경 전체를 쓰는데 며칠이 걸렸는데, 이로 인해 밤을 새는 건 다반사였으며, 그의 손이 부르틀 정도로 붓으로 기록했다. 이런 정성을 통해 나온 성경이 바로 원산 번역 ‘신약성경’으로, 그는 이를 다 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