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노재천 목사(盧載天, 1884-1964) (2)
그들은 하나님이 이런 때를 위하여 준비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새로운 힘을 얻어 앞을 막고 있는 준령을 넘기 시작했다. 실은 죽기를 각오하고 마지막 예배를 드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으므로 새로운 용기와 남은 힘을 다하여 준령을 넘어 약무초안교회에 찾아 들었다. 형제들의 뜨거운 영접을 받고 힘을 얻은 그들은 곧 사경회를 열어 많은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노재천 목사는 간도에서 활동하다가 1924년 강원도 행곡에서 개최된 제19차 대화회(총회)에서 예천과 제천지역으로 사역지를 옮겼고, 이후 이곳에서 순회사역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 1938년 웅기교회의 ‘달편지’ 발각사건이 발발했다. 경흥구역에 속한 함경북도 웅기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광고가 실린 ‘달편지’가 일경에 의해 발각됐는데, 이는 동아기독교 탄압의 빌미가 되어 노재천 목사를 포함해 김영관 감목(총회장)·백남조 총부서기·이종덕 목사·전치규 목사 등이 원산경찰서로 소환됐다. 일제의 강압적 조사와 무자비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답변으로 인해 일제는 가둔지 3개월 만에 이들을 검찰에 송치하여 5개월간 원산교도소에 감금했다. 이후 더 이상의 죄를 발견하지 못하자 일제는 노재천 목사를 비롯해 이종덕 목사·전치규 목사에게 기소유예를, 김영관 감목(총회장)·백남조 총부서기에게는 3년 집행유예로 석방했다.
노재천 목사가 1942년 9월 5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다시금 일제에 의해 긴급 체포됐다. 이는 1942년 6월 10일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이종근 감목(총회장)이 체포당한 후 약 3개월 후였고, 그는 1938년 웅기교회 ‘달편지’ 발각사건으로 기소유예가 된 상태였다. 당시 노재천 목사는 58세의 나이로, 젊어서부터 시작한 순회 사역을 통해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단련된 몸이었으나 살벌한 일제의 옥중생활을 견디기에 너무도 벅찼다. 그는 체포된 이래 원산 헌병대 유치장에서 겨울을 보냈고, 이듬해인 1943년 5월 1일 함흥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15일간의 재판 결과 검속된 32명 중 그를 비롯한 이종근·김영관·전치규·백남조·장석천·박기양·신성균·박성도 등 9명의 교단 지도자는 일본의 검사에 의해 예심에 회부되어 재차 투옥됐고, 다른 23명은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아 1943년 5월 15일에 석방됐다. 노재천 목사는 조선총독부 검사 와타나베 레이노스케(渡邊 禮之助)에 의해 1943년 5월 28일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 예심이 청구됐는데, ‘예심청구서’에는 그의 범죄 사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5 피고인 노재천(盧山光石)은 어렸을 때 서당에서 수년간 한문을 배우고 성장하여 농업에 종사하던 중 동아기독교회의 교리 신조를 따라 메이지 43년(1910년)경 침례를 받고, 그 교인이 되었고, 타이쇼 3년(1914년) 목사로 선임되어 현재에 이른 자이다. 첫째, 쇼와 16년(1941년) 5월 15일부터 쇼와 17년(1942년) 9월 상순경까지 소속된 충청남도 공주교회에서 매 일요일의 예배 시에 신자 이기출 외 약 50명에게 전기와 같은 설교를 하였다. 둘째, 쇼와 16년(1941년) 5월 중순 및 그해 8월 20일경까지 2회에 걸쳐 전과 같은 교회에서 OOO와 20명에게 침례를 베풀고 이를 교인으로 하였다.”
혹독한 감옥생활로 인해 노재천 목사는 함께 수감된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점차 고문과 영양실조로 건강을 잃어 더 이상 수감생활을 할 수 없게 됐다. 일제는 1944년 2월 15일 다른 6인(김영관·백남조·장석천·박기양·신성균·박성도)과 함께 노재천 목사를 병보석으로 임시출옥시켰다. 출옥 후 그는 원산 반도의원의 차형은 원장(감리교 장로)의 호의로 병원에 입원해 여러 날 간호를 받았다. 점차 건강을 회복하던 차인 같은 해 5월 10일 함흥재판소는 동아기독교회에 교단 해체령을 공표했다. 그리고 임시출옥했던 노재천 목사는 1944년 8월 8일 일제에 의해 재수감 되어 공판이 계속됐고, 9월 7일에 이르러 재판이 종결됐는데, 집행유예 5년으로 석방됐다.
해방 후 1946년 2월 9일 충청남도 부여의 칠산교회에서 교단 재건 회의가 개최됐을 때, 노재천 목사는 임시 감목(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단 재건에 앞장섰으며, 이후 교단을 수습하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이후 원당교회, 점촌교회, 부산교회 등지에서 목회를 하였고 76세를 일기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는데, 자녀 중 막내인 노순구 목사는 미국의 서던침례신학대학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서 교수와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오지원 목사
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 소장
(사)침례교 역사신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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