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도 목수의 아들이었고 사도 바울도 텐트 메이커의 직업을 감당하며 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목회의 이중직은 성도와 지역의 삶에 함께 하며 녹아들 수 있는 최고의 선교 선물이자 하나님이 주신 귀한 소명입니다.” 61년 전, 1964년 3월 20알 충남 논산에 세워진 방축교회(임종남 목사)는 원래는 장로교회로 개척됐지만 고 최보기 목사가 부임하고 침례교회로 다시 세워졌다. 이후 11명의 담임 목회자가 방축교회를 거쳐갔으며 2012년 임종남 목사가 부임해 성도들과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를 구현하고 있다. 임종남 목사는 “잦은 담임 목회자가 교체되면서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고 지역사회는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교회 주변에 10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기에 제가 먼저 작은 선물을 들고 가가호호 방문해 인사하고 가정의 문턱을 낮추고 목회자에 대한 신뢰를 쌓기 시작했다”며 “이렇게 3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떠나갔던 성도들이 돌아오고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던 지역주민들도 복음의 문을 열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됐다. 무엇보다 목회자가 먼저 교회 중심으로 삶을 살다보니 성도들도 신뢰하며 교회 재정을 맡겼고 저 또한 욕심부리지 않고 건강하게 교회 재정을 관리할
오송봉산교회(윤양수 목사)는 올해 70주년을 맞이했다. 1954년 창립되어 28명의 목회자가 사역을 한 곳이다. 바이오산업단지가 들어서고 KTX역이 세워진 지금과는 달리 그야말로 깡촌이었을 당시부터 지역에 자리를 잡아 복음의 빛을 발하던 오송봉산교회는 이제 지역을 대표하는 교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오송봉산교회는 매주 5~15명 정도의 새신자가 찾아오며 1년에 약 70명 정도가 등록을 한다고 한다. 바이오산업단지 조성으로 인해 1만 5000여 가구가 밀집해 있기도 하고 오송 지역의 한복판, 새롭게 건축된 예배당이기에 과장을 조금 보태면 지역의 랜드마크와도 다름이 없어 홍보효과로 더할 나위가 없다. 위기의 교회, 부활의 새소망 윤양수 목사가 오송봉산교회 담임으로 부임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교회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부임해 건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동시에 무너졌던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등 그의 헌신은 역대 어느 담임 못지 않다. 오송봉산교회는 교회 건축을 하면서 어려움을 당했다. 박정환 원로목사는 후임 목사를 청빙한 후 그에게 오송봉산교회의 세 번째 예배당 건축을 맡겼으나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결국 해당 인물은 교회를
포항중앙교회(김중식 목사)는 지난 5월 20~22일 교회 3층 기준홀에서 2024년 제2회 셀콘퍼런스를 진행했다. “교회는 이렇게 세웁니다”란 주제로 진행한 이번 행사는 34개 교회 55명의 목회자, 사모, 사역자 등이 2박 3일간 포항중앙교회의 셀교회와 목장의 실체를 직접 나누고 경험했다. 지난 2023년 첫 콘퍼런스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준비한 2차 콘퍼런스는 포항중앙교회의 셀교회 이전과 이후의 변화와 함께 교회의 존재 목적과 이유, 셀교회로 전환하는 실제적인 방법, 건강한 교회의 토양(기초)을 마련하는 방법, 셀교회의 시작에 대한 부분들을 다뤘다. 매시간 목장의 목자(우문희 사모, 최향순 집사, 임정화 집사, 장형우 집사)들이 셀목장을 운영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와 어려웠던 부분과 하나님께서 일하신 기적의 스토리를 간증했다. 참석자들은 실제 포항중앙교회 셀 목장에 참관해 목장에서 어떤 내용들을 나누고 적용하고 있는지 목장의 실제적인 모습과 관계성 등을 살펴봤다. 또한 참석자들과 포항중앙교회의 목자들과의 간담회를 통해서 궁금한 점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시간도 가졌다. 마지막 시간은 참석자들이 김중식 목사와 2박 3일동안 셀교회에 대한 강의와 목장 참관 및
“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양육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는 아이들을 보며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몸소 경험합니다. 아이들이 점점 사라지는 지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이라도 남을 때까지 이 사명을 감당하고 싶습니다.” 시골지역의 지역아동센터는 멀리 흩어져 있는 아이들에게는 방과후 좋은 놀이터이다. 학교에서의 학습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지만 방과후 다양한 활동은 아이들에게 지성과 인성을 길러주는 좋은 배움터라 할 수 있다. 충북 영동 묵정에 위치한 묵정교회(양성모 목사)는 20여년 전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며 아이들과 동거동락하고 있다. 학기 중에는 방과후 교실로 방학 중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놀거리가 부족한 지역에 놀이배움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양성모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회에서 헌신하는 와중에 지역 아이들에게 영어와 수학과외를 하며 신대원에 들어가 목회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2004년 묵정교회 부활절 예배를 집례하며 담임 목회자의 사역을 시작했다. 담임목회를 시작했지만 당시 양성모 전도사는 학원 선생님, 과외교사, 방과후 영어 특활교사의 직함이 더 어울렸다. 묵정 지역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제법
모태신앙인 조영일 목사는 음악을 좋아했던 소년이었다. 어릴 때 밴드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대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생활을 시작해 지점장의 자리까지 올라가기도 할 정도로 공과 사 모든 일에 열심이었던 그는 30대 중반 건강상의 문제로 직장을 그만두고 치킨 배달에서 음악 과외까지 정말 한시도 쉬지 않는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 그가 목사로서 비전을 품고 나아간 것은 40대 이후부터이다. 30대 중후반부터 오산에 거주했던 조영일 목사는 오산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 조영일 목사는 당시 오산교회 담임이었던 고명진 목사(현 수원중앙)를 만나 신앙상담을 풀어놓았다. “목사님, 내가 한번 사는 인생 이렇게 살아가라고 주님께서 저를 이 땅에 보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습니다.” 조영일 목사의 고백에 고명진 목사는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다.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한 조 목사는 40대 중후반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파트타임으로 주말에는 사역을 하고 평일에는 일을 하는 자비량으로 사역의 방향을 잡았다. 본격적인 사역을 위해 아무 연고도 없던 천안에 내려
“도동리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 같아요. 강권적인 하나님의 이끌리심이 이들을 만나게 되고 이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더 나누고 싶어 음료수를 따 건네며 붙잡으니 어떤 부녀회원 ‘찐득이’라고 홀겨도 또 포기할 수 없는 아버지 마음이네요. 아직도 복음을 전해야 할 60여 가구의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이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이혜원 목사(영동대흥)는 대전대흥교회(정인택 목사)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해 평신도로 10년, 사역자로 10년을 교회에서 헌신해 왔다. 사역자에게 자신이 필요로 할 곳이 어디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강권적인 부르심의 역사로 교회 사역을 정리하고 2017년 영동대흥교회를 개척했다. 그렇게 이혜원 목사는 “오직 복음으로만 살리라”는 심정으로 산골 오지 구석구석에도 복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불철주야로 달려왔다. 대전대흥교회에서 이혜원 목사는 여러 사역을 감당해 왔지만 그중 가장 행복한 사역은 어르신을 위한 사역이었다. 삶의 숱한 고생을 뒤로하고 교회로 나오신 어르신들을 환영하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 교회 노인대학을 섬기면서 어르신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관심은 충
교회의 다음세대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시대,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교회의 젊은층은 더 줄어들었다. 점점 교회의 문턱을 넘는 청년들을 볼 수 없는 시대에 유독 청년들이 차고 넘치는 교회가 있다. 바로 대전 자성교회(임헌규 목사)이다. 자성교회는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교회는 아니다. 한적한 주택가에 60여명이 겨우 앉을 수 있는 예배당에는 300여 명 가까운 청년들이 예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다. 이들을 자성교회로 이끌고 있는 힘은 과연 무엇일까? 과연 청년들은 자성교회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이었다. 다음세대를 생각하며 헌신과 섬김의 시작 임헌규 목사는 전도사 시절, 유병문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대전중앙교회에서 고등부 사역을 맡으며 목회의 문을 열었다. 당시만에도 10여 명의 고등부 학생들이 임헌규 목사의 가르침과 지도에 의해 100여 명으로 성장하며 대전중앙교회 교회학교는 부흥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2002한일월드컵을 맞이한 2002년 1월 26일 자성교회를 세웠다. 당시 교회를 돕겠다고 온 2~3명의 청년들과 가족이 함께 교회를 시작하며 제일 먼저 품은 사역은 대학 캠퍼스 사역
익어가는 수수밭을 지나면 자그마한 언덕 위에 보전교회(강희정 목사)가 보인다. 1995년 6월에 부임해 오늘까지 묵묵히 한 길을 가는 강 목사 부부를 만나본다. 시골스런 작은 예배당과 탁트인 교회 앞 전경이 시원스레 눈에 들어온다. 예배당은 몇 년전 수리를 해서 좋아 보였고 나머진 시골에 있는 예배당 그 자체였다. 이곳에서 30여 년동안 땀과 눈물로 주 앞에 희노애락의 목회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두 분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강목사는 어린시절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확신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청년시절 지독한 정신적 방황의 시기를 거치면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있게 만나게 됐다. 심한 통증을 겪으면서 3일간 금식하며 기도할 때 말씀으로 치료하시며 확신을 주셨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6). 하나님 은혜에 깊이 잠겨 이젠 오직 주를 위해 살겠노라 결단하며 확신 속에 30세에 신학교에 입학해 주의 길을 가기를 소망했지만 4학년 2학기 졸업을 두 달 남기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 양돈사업에 뛰어들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 곁 길로 간 결과, 사업은 빚만 남기고 말았고 피폐해진 마음과 잃어버린 사명 앞에
“제주도는 가슴 아픈 상처와 고통의 땅입니다. 오늘의 제주는 그 아픔 속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곳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분의 피흘림과 부활하심의 은총으로 치유되어야 할 땅입니다. 이 역사의 현장에서 제주오라교회가 희망의 메신자가 되어야하는 소명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세계적인 관광지이다. 계절마다 다양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제주도이지만 우리 근현대사에 아픈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인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연합군에 대항해 최후항쟁을 하기 위해 제주도를 택하고 산악지대와 해안가 전체를 군사 기지화했다. 제주도민은 강제노역을 해야 했으며 수많은 고초를 겪으며 많은 도민이 희생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마경찰이 어린아이를 치고 경찰서로 도망가자 시민들이 몰려가 항의하던 중 경찰이 발포해 사망자가 나오자 4·3 무장봉기사건이 일어났고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민을 좌우로 갈라놓고 중산간 마을 위쪽으로 무자비한 소탕 작전을 펼치는 계기가 된 오라리 방화사건을 조작했다. 그리고 불탄 오라리 한복판에 제주오라교회(김영재 목사)가 위치해
“세종시민교회의 사명은 복음의 능력이 증거가 되는 교회, 다음세대를 가르치고 세우는 교회로 특별히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혼들을 위한 복음전도 사명과 무너져 버린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를 살리는 사역에 중점을 두고 쉼없이 달려왔습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세종지역의 어린이·청소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삶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길에 세종시민교회가 함께 할 것입니다.” 세종시민교회 종촌채플(육근원 목사)은 시민과 함께 더 친밀히 호흡하고 복음 전도의 장이 되고자 세워진 교회이다. 세종시민교회가 특별한 이유는 교회 설립부터 남다른 사명을 가지고 세워졌다는 것에 있다. 세종시민교회의 모체는 다음 세대 기독 글로벌인재 양성을 위해 세워진 (사)글로벌선진교육(설립자 남진석 목사) 공동체로 충북 음성과 경북 문경, 세종, 미국 등 총 4개의 캠퍼스를 운영하는 명실상부한 기독교 대안학교이다. 설립자 남진석 목사는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도래와 이로 인한 한국교회 주일학교의 붕괴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가운데 교육을 통한 복음전파와 다음세대를 세우는 거룩한 부담감을 안고 세종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교회와 교육센터를 세우게 됐다. 세종시민교회는
“92년의 역사가 실감이 나지 않지만 예배와 말씀으로 꾸준히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제 머지않은 100년을 향해 세종송담교회는 진실한 예배드림과 말씀을 살아내는 신실함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리라 믿고 감사드립니다.” 세종송담교회는 1931년 4월 2일, 연기군 남면 송담리 임근수 장로의 가정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오경환 목사가 주인을 전도하고 그집의 사랑방에서 예배드리면서 시작했다. 일제의 박해와 6.25 전쟁으로 예배당의 문이 닫히고, 전소되는 시련을 겪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예배드림은 멈추지 않았다. 비록 작은 시골교회였지만 초교파적으로 40여명의 목회자와 교단과 관계없이 지역으로 분리 개척해 지역사회에 영향력 있는 교회로 세워졌다. 92년의 세월이 흐른 세종송담교회는 종촌시대에서 조치원시대를 거쳐 세종시대를 맞이하며 하나님의 몸된 공동체를 이뤄가고 있다. 20여년을 교회의 사역자로 섬기는 가운데 교회의 격변기를 맞아 담임목회의 길을 걷는 임명성 목사(정지영 사모)는 가장 낮은 자리에 거하기 원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라기보다는 이웃집 형님 같은 포근함과 편안함을 겸비한 임 목사를 통해 세종송담교회의 과거와 현재
새로 조성되는 신도시의 특징은 명확하게 구획들이 나눠지며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을 구분짓고 있다. 또한 그 안에 종교부지도 들어서게 되는데 특히 주거지역에 위치한 종교부지에 교회를 건축하는 일은 흔치 않으며 쉽지 않다. 신도시는 복음 전도의 ‘황금어장’이라 할 수 있지만 교회의 문턱은 높은 것이 사실이다. 보상을 받은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신도시의 종교부지로 오기를 희망하는 교회도 나름대로 여러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영종하늘도시에 종교부지를 매입해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한 세계로향하는교회(박재근 목사)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예배당을 마련하고 새로운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교회 개척 피눈물 속 부흥 이루다 1990년 12월 3일 서울 대림동 상가 지하에 교회를 개척한 박재근 목사는 교회를 세우면 모든 것이 다 이뤄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누가 지하 개척교회를 방문하는 이는 없었다. 사택도 없이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매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밥을 굶기도 수없이 많았지만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더 힘써 기도하기 시작했다. 박재근 목사는 “지하 개척교회를 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 구경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매일 복음을
목회자는 종종 갈등과 아픔이 있는 교회로 부임하는 경우가 있다. 부임의 과정이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겪는 성장통과 같은 일들이다. 2001년 2월 공도중앙교회 담임으로 부임한 최인수 목사도 교회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새로운 비전을 품고 교회에 부임했다. 최 목사는 “1996년에 교회를 개척해 나름 성도들도 모이고 즐겁게 목회하다가 공도중앙교회 부임을 제안받았을 때, 새로운 목회의 도전이라 생각하고 교회의 상황도 살펴보지 못하고 수락했다”며 “부임하는 날, 교회의 현실은 너무나 열악해 기도만이 제가 사는 길이고 교회가 사는 길이었다”고 회고했다. 1971년 세워져 7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최인수 목사는 부임 초기부터 현실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교회 이미지 쇄신에 나서기 시작했다. 변화 위한 성전 건축 ‘고난의 시작’ 최인수 목사는 과거의 모습을 잊기 위해 교회명도 공도중앙교회로 변경하고 새로운 비전을 세우며 예배당 건축을 진행하기로 했다. 재정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건축을 시작했지만 터 파기 공사를 끝으로 교회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공사도 2차례나 중단되면서 무모한 도전은 아닌지 성도들에게 큰 상처를 주
“경기중앙교회가 품은 비전은 건강한 교회, 건강한 목회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면서 제가 역점을 둔 것은 바로 건강한 성도와 가정, 교회였습니다. 온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강력한 십자가의 군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끊임없이 훈련하고 가르치며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온 성도들이 강력한 하나님의 군사로 세워지게 되었으며 담임목사의 목회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십자가의 군사가 되었습니다.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도와 기도로 무장된 건강하고 튼튼한 믿음의 교회가 바로 경기중앙교회입니다.” 경기도 평택시 서정역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경기중앙교회(안도엽 목사). 전철역과 인근 재래시장, 농협 하나로마트, 초등학교와 아파트단지까지 교회 주변의 다양한 인프라는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교회를 찾게 된다. 경기중앙교회 또한 지역사회를 위한 헌신과 봉사, 전도의 동력은 식을 줄 모르고 복음의 열정으로 지역 복음화에 힘쓰고 있다. 이 모든 에너지는 바로 안도엽 목사의 특별한 목회관에서 시작됐다. 강력한 부르심…시련과 역경의 연속 안도엽 목사는 불신앙의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목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와 대학원을 다닐 때까지 집안의 도움을 일체 받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 집을 지키는 개들만이 주변의 차량에 반응하며 짖어대는 마을에 태양광 지붕을 올린 교회가 있다. 교회 입구에 들어서면 교회 마당을 지키는 개들이 손님을 반겨주고 교회 외부 스피커에서는 찬양과 함께 방문자를 환영해준다. 어느 덧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나온 죽림교회 김일하 목사는 스마트폰 하나로 교회의 음향을 컨트롤하며 기자를 맞이했다. 김 목사는 “나와 아내가 거의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모든 시설을 스마트화 시킨 상태이다. 새벽예배 시간이 되면 알아서 교회 본당의 불이 켜지고 전기 난방기가 돌아간다. 이른 새벽 은은한 새벽공기에 맞춰 반주기의 찬양이 시간에 따라 흘러나온다. 대부분의 전기 제품이기 때문에 전기료가 걱정되지만 우리의 든든한 태양광 전기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교회 지붕도 사역을 위해 쓰여진다 죽림교회 지붕에는 태양광 패널들이 설치돼 있다. 태양광을 통해 전력을 생산하고 생산된 전력을 교회에서 사용하고 한국전력에 판매한다. 정부 보조를 받고 설치했지만 적잖은 비용이 들어간다. 김일하 목사도 울릉도 출신으로 경북 포항과 충남 서산에서 23년을 사역하고 7년 전에 죽림교회로 부임했다. 워낙 오래된 교회 건물과 사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