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라는 신체적인 정신적인 불편함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복음 안에, 믿음 안에 차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 또한 신체적인 불편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랑의교회 김상호 목사는 그동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일에 헌신해 왔다. 1994년 7월 16일 대전에서 사랑의교회를 개척한 김 목사는 특수목회가 아닌 일반목회로 목회의 첫 발을 내딛었다. 김상호 목사는 “처음부터 특수목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목회자로 모두가 잃어버린 양이라는 생각으로 사역을 감당했고 제가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장애인 사역을 목회에 추가하며 이뤄진 일”이라며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고 양육하고 불편한 이들을 돌보는 사역에 매진해 왔다”고 설명했다. 사랑의교회가 단독으로 특수 사역을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재정적인 형편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단법인 수레바퀴재활문화진흥회를 알게 됐다. 척수손상을 입은 이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정과 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해 홍이석 목사를 통해 세워진 수레바퀴재활문화진흥회는 김상호 목사가 추구했던 목회 협력 사역에 귀한 도전이
“끊임없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상처와 아픔을 보듬어 안아주면서 이게 바로 그 분이 우리를 향한 진정한 복음이며 사랑이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교회는 자랑하고 내세우는 곳이 아닌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서 묵묵히 예수님을 몸과 마음으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목회자 자녀가 가지는 갈등 중에 하나는 부모님의 목회 소명을 바라보며 ‘나도 그 길을 걸을 수 있을까?’이다. 유성훈 목사도 부친의 목회 사역을 묵묵히 지켜보며 ‘나는 이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진 목회자 자녀였다. 시골교회의 담임목회자로 섬겼던 부친의 곁에는 항상 물질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다. 성공해서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싶은 마음으로 일반 대학(음악대학)을 진학하고 새로운 길을 준비했던 유 목사는 어머니의 권유로 마지못해 참석한 연세중앙교회 흰돌산 수양관에서 사도 바울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됐다. 강단 정면으로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 예수님의 형상을 보게 된 유성훈 목사는 그 자리에 꼬꾸라지며 회개의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아버지 목사님의 크신 은혜를 외면하고 그 은혜를 모르는 자식이었다는 마음으로 회개한 그는 일반대학을 마치고 신학도의 길을 걷게 됐다. 이어 경기도 광명시 다사랑교회에서 유상채 목사와
“홍성교회는 빛의 자녀로 사회와 예배, 가정, 통일, 열방과 환경을 향한 선한 이웃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DNA를 간직한 공동체로서 교회와 성도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내며 성도들과 두 손 꼭 잡고 걷고 싶습니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 1954년 한 가정집에서 시작한 홍성교회가 교회 창립 69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홍성지역의 낮고 소외된 이들을 향해 나눔과 섬김, 사랑을 실천해온 홍성교회는 현재 2013년 최윤종 목사가 사역하고 있다. 특별히 본인의 고향 모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최윤종 목사는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와 지역사회를 품는 마음으로 10년의 시간을 보냈다. ‘행복한 성도’ ‘영향력 있는 공동체’를 꿈꾸며 홍성교회는 △사회 속에서의 선한 이웃 △예배 세움 선한 이웃 △가정 세움 선한 이웃 △북한을 품고 복음통일을 사는 선한 이웃 △열방과 환경선교를 살아가는 선한 이웃으로 나아가고 있다. 최윤종 목사는 “지방에 위치한 평범한 교회이지만 예수님에 초점을 맞추고 복음 중심의 사역에 뜨겁게 사역하고 있다”며 “모든 사역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교회의 기초가 되는 말씀사역과 다음세대를 양육하며 세우는 사역이 소중하지 않을까
붉은 황토빛 논밭이 시원스레 펼쳐진 상하면을 지나 삼광교회(윤보열 목사)는 40여년을 그곳에서 소금으로, 빛으로 서 있었다. 1983년 4월, 김범일 전도사는 이곳에서 주님의 목회를 생활로 실천하며 시작했다. 정말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주민들을 계몽하며 땀과 눈물로 목회하기를 수십년, 그동안 교회는 대내외적으로 역량을 갖추며 든든해졌고 하나님은 이제 그 바탕 위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성장과 성숙의 장으로 이끌기 위해 2014년 1월 2대 담임목사로 윤보열 목사를 이곳으로 부르셨다. 9월의 맑은 가을날 지역사회에서 사람을 세우고 지역을 섬기며 목회하고 있는 윤보열 목사를 만났다. ● 간단한 목사님 소개를 해주세요. 고향인 전남 해남에서 6세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공군 부사관으로 9년 6개월을 근무하며 성경공부 하던 중 23세 때 말씀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반석교회(이근영 목사)와 오산중앙교회(이평화 목사)를 섬겼고, 남원강복교회를 개척해 목회한 후 김제 회성교회에서 15년을 목회하고 삼광교회에서 9년째 목회하고 있습니다. 출생부터 여기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걸음걸음 은혜와 축복의 여정이었음을 고백하게 되며
농촌교회가 가지고 있는 한계는 지역 인구 감소에 따른 성도들의 이동이었다. 성숙한 성도를 세우며 교회를 건강하게 성장시키고 있지만 도시로 삶의 터전을 떠나거나 진학과 학업 등의 이유로 떠나는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생기면서 교회 성장 동력이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1987년에 창립한 원남제일교회도 교회 초기에는 100여 명이 넘는 성도들과 수십명의 다음세대들이 예배하며 전도하고 매일 저녁 모임을 통해 생동감 있는 교회였다. 1999년에 3대 원남제일교회에 부임한 최원석 목사도 성도 중심의 교회 사역을 전개하며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시켰지만 진학과 결혼, 취업으로 성도들이 대도시로 이동하게 되면서 교회 성장은 쉽지 않은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최원석 목사는 “성도들과 함께 매일 기도하고 예배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강조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터전을 떠나는 이들을 보면서 목회의 최대 위기의 순간임을 직면하게 됐다”며 “뚜렷한 방법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보다 철저하게 교회 중심의 삶을 강조하며 흔들리지 않은 신앙관을 세워줬다”고 설명했다. 교회 사역의 변화 ‘그
꿈과사랑의교회(구, 충무침례교회)는 경상남도 통영시 서호동에서 60여년 전 미남침례교 선교부와 침례교단 총회의 협력으로 충무침례교회라는 이름으로 지역 복음화의 등불을 처음 내디뎠다. 당시 선교사와 경남지역의 전도인들이 지역의 젊은이들과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열매들을 맺었던 젊은 청년들과 학생들이 지금까지 교회의 귀한 직분을 장로로, 권사로 감당하며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고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섬기고 있다. 북신동 시절 꿈과사랑의교회는 북신동으로 성전을 건축 이전했다. 당시 영적 지도력을 겸비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교회는 점차 성장해 나갔다. 주일이면 주일학교, 중고등부, 청장년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며, 함께 동고동락했다. 주일에는 교회에 아침부터 모여 저녁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찬송과 기도가 끊이질 않았다. 이러한 밑바탕을 통해 교회는 점차 역동적으로 성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죽림 시대 교회가 점점 성장해가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향해 부흥의 열망과 새성전의 꿈과 세계선교와 다음세대를 세우라고 명령하셨다. 당시에 김동곤 장로는 교회의 죽림시대를 열망하면서 먼저 건축헌금을 약정하고 성전부지를 계약했다. 그는 성전부지에 무릎을 꿇
사회적기업 밀알모션베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7월, 금촌역에서 차로 약 10분거리에 위치한 밀알모션베드 공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열방교회 담임목사이자 밀알모션베드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김면식 목사의 사업체이자 사역의 현장이다. 밀알모션베드는 식약청에 의료용가구제조업으로 등록되어 의료용전동침대를 전문으로 제작 판매하는 사회적기업이다. 직원의 평균 연령은 62세로 시니어들의 노후 생계를 돕는 한편, 이를 통해 복음 전파의 화수분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시니어들이 아무래도 의료용 침대이다보니 일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김면식 목사는 초보자도 쉽게 일을 할 수 있도록 OEM방식(위탁생산)과 OJT방식(현장생산을 도입해 직원들이 서로 조금씩 가르치며, 조립하고 완성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 밀알모션베드에서 생산한 의료용 침대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병원용 침대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케어할 수 있도록 고안된 가정용병원침대 혹은 병원용가정침대를 특화시켜 소비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등 여가생활을 하기에 편하며 움직이기 힘든 임산부, 노약자, 환자들에게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 있어 가정용, 병원용, 요양원, 프리미엄
늘푸른교회는 1985년 6월7일 탄생했다. 우리는 늘푸른교회를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 “시,심,나”(SISIMNA)라고 불렀다. 나는 교회개척보다는 학교를 세워 다음세대를 교회세대로 세우는 교육목회를 꿈꾸고 있었다. 학교사역을 준비하던 중에 학교 사역을 하고 있는 선배 목사님의 보면서 “학교 속에 교회인가, 교회 속에 학교인가?”를 고민하게 됐고, 학교 속에 교회가 아니라, 교회 속에 학교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 교회가 먼저다. 교회를 세우자. 결심이 서자 아내의 동의를 얻고, 2살 된 아들과 1년 동안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다. 광야를 지나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낯선 사랑 살고 있던 집의 전세금으로 조그만 상가 2층을 얻었다, 교회 안에 사택을 마련했다. 사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어린 아들과 꿈 많은 소녀 같았던 아내에게 미안했다. 나는 내가 개척하면 금방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개척예배 후 1년 동안 새 신자가 1명도 없었다. 나중에는 양식이 없었다. 어느 주일 날 예배 중에 아내가 쓰러졌다, 서둘러 예배를 마감하고 가까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나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시는 분이십니까?
“제주라이트교회의 사역은 새로운 사역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텐트 메이커처럼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처럼 우리 또한 이 지역을 복음의 불모지로 여기며 선교적 관점에서 접촉점을 마련하고 그 가운데 복음을 전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바로 우리임을 선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시기의 초대교회는 대부분 가정에서 시작하고 적은 인원이 모일 수 있는 곳에서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도는 교회를 통해 들어오는 헌금으로 생활했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며 텐트를 제작하며 비용을 마련하고 그 비용으로 소아시아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 해외 선교를 감당하고 있는 선교사들도 거점 지역을 선정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지역에 학교를 세우거나 편의 시설을 마련하고 지역주민과의 접촉점을 늘리면서 관계성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관계성을 기반으로 보다 깊은 교제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이 해외에서만 통하는 선교 사역일까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실제로 이 방법으로 지역사회에 깊숙이 자리잡은 교회가 있다. 바로 제주라이트교회(황길상 목사)이다. 황길상 목사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캄보디아와 베트남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다. 목사 안수
백향목교회(박상완 목사)의 시작은 1960년대 김흥순 할머니 전도자의 복음 열정에서 시작했다. 백향목교회는 당시 충광교회라는 이름으로 보라리 양달말 가정집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그후 1969년,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흙벽돌을 찍어 직접 교회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19년이 지난 1988년 9월 20~30명의 성도들의 눈물과 땀, 그리고 피로 206평의 대지 위에 1층 50평, 준 2층 10평 정도의 새성전을 건축해 입당예배를 드렸다. 현재 백향목교회 성전은 1991년부터 7대 담임목사로 교회를 인도하고 있는 박상완 목사 때 지어졌다. 박 목사가 백향목교회에 부임한 지 10여 년이 흐른 시점에서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재정도 안정되자 박 목사는 당시 예배당의 여건이 교회 성장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백향목교회 역사상 3번째 교회건축을 추진했다. 그런데 기존에 교회가 있던 대지는 건축 허가가 나오지 않는 맹지로 건축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새 땅을 찾고 구입하는 과정에서 자그마치 10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말았다. 이렇듯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들의 헌신으로 2007년 6월 3
“교회의 규모나 상황, 환경에 연연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곳이 하나님 나라이며 무엇보다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역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지역을 말씀과 섬김으로 보듬으며 미래의 주역인 다음세대를 품으며 나아갑니다.” 미국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교육학 박사 과정을 준비하던 김태형 목사는 병환 중에 계신 부모님에게 마지막 복음증거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과 학생비자 갱신 때문에 제주도로 돌아왔다. 김 목사의 부친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아가셨지만 비자갱신은 거부당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김태형 목사의 발걸음을 인도한 곳이 바로 제주중앙교회였다. 2007년 제주 삼도동 지하에 위치한 제주중앙교회는 개척 초기 1대 담임목사 아내의 중병으로 치료를 위해 육지로 거처를 옮겨야 할 상황이었다. 교회를 맡을 수 있는 목회자가 없는 와중에 마침 제주로 내려온 김태형 목사는 2008년 4월 20일 제주중앙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제주 목회를 시작하게 됐다. 평신도 중심의 사역으로 기반 다져 미국에서 교육 관련 학문을 접하고 이에 대한 학업에 매진해 왔던 김태형 목사도 교육목회 중심의
“늦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를 개척했지만 또 다른 부르심에 침례교회 최남단 서귀포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한 사역의 연속이었지만 오직 말씀을 붙들고 가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제주도에 여러 침례교회 중에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는 충만한교회(정윤봉 목사. 구 서귀포침례교회)는 여느 침례교회와 비슷한 상황에서 말씀과 복음을 사모하며 한 길만을 걸어온 교회이다. 1991년부터 교회를 맡아 섬기고 있는 정윤봉 목사는 교회 건축과 성장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계획하심 속에 충만한교회를 지키고 있다. 정윤봉 목사가 충만한교회로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이뤄졌다. 평신도로 신탄진침례교회를 섬겨왔던 정 목사는 1987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신학교에 입학해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다. 신학교 졸업을 앞둔 정 전도사는 주님의 음성에 따라 대전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당시 교회를 정하지 못한 예비 목회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정 전도사에게 제주도 서귀포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박주현 목사가 찾아왔다. 그리고 박 목사를 통해 서귀포침례교회 청빙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대전에 이미
“우리꿈교회가 성장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성도들과 함께하는 식사교제와 나눔이었습니다. 목회자 중심이 아닌 교회 공동체의 핵심인 성도들 중심의 사역으로 섬기고 함께 하면서 그 안에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강남중앙침례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했던 김원정 목사는 김충기 목사가 은퇴하고 피영민 목사가 2대 담임목사로 취임할 시기에 새로운 소명으로 2005년 경기도 화성시 진안동에 우리가꿈꾸는교회(현 우리꿈교회)를 개척했다. 대지를 매입하고 교회를 건축하면서 김원정 목사는 “이제 교회도 지었으니 성도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꿈교회의 위기였다. 적잖은 부채를 안고 있는 교회, 예배당은 잘 마련했지만 찾는 이가 없는 예배당을 보면서 김원정 목사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에게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고 경험했다. 교회 성장은 느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꿈교회는 찾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한 성도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지는 역사는 바로 ‘밥상 공동체’였다. 김원정 목사는 “먹는 게 남는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정말 성도들과 다양한 식탁 교제를
서정교회는 평택‧송탄지역 침례교회의 모교회로 1953년 윤영락 목사를 비롯한 5명이 가정에서 개척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 지역의 영적 부흥과 회복을 위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1957년 부임한 정학봉 목사(당시 전도사)가 미남침례교 선교회와 협력을 맺은 후 급성장한 서정교회는 은혜중고등학교와 은혜신학교(수도침신의 전신) 등을 개원하기도 했다. 윤종기 목사는 서정교회의 12번째 담임목사로 지난 2012년 12월에 부임해 올해로 10년째를 맞이했다.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목동침례교회에 다니면서 침례교인이 된 윤 목사는 성장하면서 목회자의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들어가 답십리교회와 서울제일교회, 여의도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을 이어왔다. 45세에는 담임목사로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해달라고 작정 기도한 윤 목사는 45세가 끝나는 생일인 8월 첫 주간, 침례신문에 청빙공고문이 올라온 서정침례교회에 간절한 기도 끝에 이력서를 냈다. “나는 기본적으로 목회자의 인사권자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요. 서울에서 담임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으로 가는 것이 목회자의 참된 마음가짐이라 생각
뉴라이프교회 박진웅 목사는 오랫동안 다닌 연세중앙교회(윤석전 목사)에서 중등부 담당 교역자로 사역했다. 그러던 가운데 청년 사역에 대한 강한 부르심을 받은 박 목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들이 그를 고민하게 했지만 박 목사는 마음을 다잡고 신학생 때 함께 기도모임을 했던 청년들과 개척을 준비했다. 단순히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넘어 선교적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박 목사는 3달 동안 여러 교회를 방문하며 선교적 교회를 위한 고민을 했다. 결론적으로 좋은 선교적 교회란 하나님의 사명을 향한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시작임을 깨닫고 함께 했던 3명의 청년들과 2016년 3월 가정에서 교회를 시작했다. 간판 하나 달기 힘들었던 교회 개척 청년 사역을 위해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박 목사의 선택은 지금 뉴라이프교회가 위치한 신촌지역이었다. 박 목사는 마침 서강대 앞에 한 건물이 자리가 나와 그곳으로 교회 장소를 결정하고 계약을 하기 위해 건물주를 만났다. 하지만 건물주는 교회를 하겠다는 박 목사의 말에 “절대 안됩니다”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과거 해당 건물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영생교 교주 조희성이 숨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