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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거부로 수난당한 침례교 대표 32인(8)

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18


박기양 목사(朴基陽, 1894-1979)


박기양은 1894년 10월 20일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청북동에서 박규석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5세 때(1899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해 4년간 수학했는데, 훈장이 가르침에 따라 잘 읽을 뿐만 아니라 한 가지를 배우면 두세 가지를 깨닫는 등 그의 자질이 뛰어나 많은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서당을 수료할 즈음 모친의 병세가 악화되어 1903년 9월 세상을 떠났고, 아내를 잃은 부친은 방황하다가 훌쩍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이로 인해 박기양은 졸지에 부모를 잃게 됐고, 급기야 1년 후 동생마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다른 동생들과 함께 외갓집에서 성장했고, 17세 때(1911년) 소산동에 살던 임학이의 장녀와 결혼했다. 1911년 4월 충청북도 영동에서 활동하던 박영호 전도인을 통해 기독교로 개종했고, 1915년 이종덕 감목(총회장)으로부터 침례를 받았으며, 같은 해 10월 경상북도 포항 조사리에서 개최된 제10차 대화회(총회)에서 반장 직분을 받았다. 이듬해인 1916년 경상북도 문경의 신원(세원)에서 개최된 제11차 대화회(총회)에서 전도인으로 임명받았다. 1917년 2월 4일 장남이 출생했으나 가족을 처가에 맡기고, 그달 말 중국 만주의 임강현으로 전도의 길을 떠났다.


박기양 전도는 1917년 3월에 신성균, 신용균, 주상득과 함께 고향을 떠나 예천, 단양, 충주를 거쳐 4일간 걸어서 서울에 당도한 후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걸어 원산으로 갔다. 원산총부에서 4일간 유한 후 함흥, 장진, 희청, 자성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의 임강현까지 장장 1,500리 길을 짚신 감발로 걸어 당도했다. 그가 집안현에 가서 전도할 때는 12월의 엄동설한으로, 숙박할 곳을 찾지 못해 얼어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1919년 4월에는 함경북도 장진읍에서 전도하다가 일제 헌병에 체포되어 하루 종일 유치장에 갇힌 채 온갖 고문을 받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그는 전도 여행을 떠난 지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1920년 경상북도 광천에서 개최된 제15차 대화회(총회)에서 전도 직분을 받았고, 1921년 10월 종성동 성경학원에 입학하여 1학기 수업을 마친 후 1922년 5월 원산총부의 파송을 받아 김재형 목사와 함께 시베리아의 연추로 갔다. 1922년 9월에는 함경북도 경흥에서 개최된 제17차 대화회(총회)에서 다시 연추로 파송을 받아 김영진 목사와 함께 순회 전도인으로 활동했는데, 이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고, 1923년 1월에는 함경북도 태산준령을 넘고 만주의 경계선을 지나 시베리아의 연주, 태성으로 향하던 중에 빙판 30리의 습지를 걸어가다가 몸이 얼어 굳어지고 배는 허기져서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마침 쿠두나교회를 찾아가는 일행의 구조를 받아 겨우 목숨을 건지고 기운을 다시 차려 목적지에 이르러 수년간 일하기도 했다.


1923년 충청남도 강경에서 개최된 제18차 대화회(총회)에서 박기양 전도는 교사(전도사) 직분을 받아 충청남도 예산구역에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으로 활동했다. 1924년 강원도 울진에서 개최된 제19차 대화회(총회)에서 김용세, 신성균, 김영관 등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고, 예산구역으로 파송을 받아 순회 사역을 했다. 1929년부터 평안북도 운산과 초산지역에서 박기양 목사는 양명길 전도와 활동하면서 수 개의 교회를 개척했는데, 이를 토대로 초산구역이 새롭게 개설됐다. 그는 1935년까지 평안북도 운산과 초산지방을 거쳐 자성구역의 산간벽지를 누비며 전도사역에 전념했다. 그는 하늘을 가로막는 태산과 인적을 거부하는 준령을 넘나들며 한 집, 두 집씩 외롭게 살아가는 동포들을 찾아 복음을 전하며 가정교회를 개척하는 등 북방지역 복음화에 앞장섰다.


박기양 목사가 충청남도 예산구역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인 1942년 9월 6일 일제에 의해 긴급 체포됐다. 이는 일제의 노골적인 동아기독교 박해의 일환이었다. 체포될 당시 그는 48세로, 다른 이들에 비해 비교적 낮은 연령에 속했으나, 일제의 탄압과 모진 고문을 통한 옥중생활 앞에서는 젊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견디기 어려웠다. 박기양 목사는 체포된 이래 원산 헌병대 유치장에서 겨울을 보냈고, 이듬해인 1943년 5월 1일 함흥 교도소로 이감됐다. 15일간의 재판 결과 검속된 32명 중 박기양 목사를 비롯한 이종근·김영관·전치규·백남조·장석천·노재천·신성균·박성도 등 9명의 교단 지도자는 일본의 검사에 의해 예심에 회부되어 재차 투옥됐고, 다른 23명은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아 1943년 5월 15일에 석방됐다. 그는 조선총독부 검사 와타나베 레이노스케에 의해 1943년 5월 28일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 예심이 청구됐는데, ‘예심청구서’에는 그의 범죄 사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6 피고인 박기양은 어렸을 때 서당에서 수년간 한문을 배우고, 성장하여 농업에 종사하던 중 동아기독교회의 교리 신조를 따라 타이쇼 6년(1917년) 침례를 받고, 그 교인이 되었고, 동 12년(1923년) 교사가 되고, 다음 해(1924년) 목사로 선임되어 현재에 이른 자이다. 쇼와 16년(1941년) 5월 15일부터 쇼와 17년(1942년) 6월 상순경까지 매 일요일 소속된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 금남교회에서 신자 장사출 외 약 40명에게 전기와 같은 설교했다.”


고문과 취조의 연속인 수감생활로 인해 박기양 목사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졌고, 급기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일제는 1944년 2월 15일 다른 6인(김영관·백남조·장석천·노재천·신성균·박성도)과 함께 그를 병보석으로 임시출옥시켰다. 출옥 후 박기양 목사는 원산 반도의원의 차형은 원장(감리교 장로)의 호의로 병원에 입원해 여러 날 간호를 받았다. 점차 건강을 회복하던 와중에 같은 해 5월 10일 함흥재판소는 동아기독교회에 교단 해체령을 공표했다. 그리고 임시출옥했던 박기양 목사는 1944년 8월 8일 일제에 의해 재수감 되어 공판이 계속됐고, 9월 7일에 이르러 재판이 종결됐는데, 집행유예 5년으로 석방됐다.


해방 후 1946년 5월 충청남도 부여의 원당교회에 부임했는데, 성경 말씀을 잘 가르친 것이 교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본 교회를 떠난 후 교인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3번이나 다시 부임했다고 한다. 입포교회, 상주교회, 용담교회와 울릉도의 평리교회, 인천의 숭의교회에서 목회했다. 1979년 4월 11일 향년 86세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슬하에 2남 4녀와 외손자를 포함해 20여 명의 후손을 남겼다. 그중 차남 박은호 목사는 경상북도 예천의 개포중앙교회를 시무했고, 손자 중의 박정근 목사는 부산의 영안교회를 시무했다.

오지원 목사
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 소장
(사)침례교 역사신학회 이사
ohjw794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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