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이야기하는 성 이러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하나씩 살펴보겠다. 첫 번째로는 ‘성(sexuality)’이다. 현대 사회의 성문화는 전통적인 가치와 규범의 성 윤리가 무너지고 퇴폐적인 문화로 퇴보했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성을 부정적 측면에서 부각하여 기독교적인 바른 이해보다는 성을 드러내지 않는 은밀한 사적 영역에 두었다. 하지만 성서에 근거한 기독교적인 성 윤리를 세상에 바르게 제시해야, 성적으로 타락하는 사회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성을 살펴보자. 구약성경적 성은 결혼과 연관되며, 사회 전체의 복지라는 관점에서 엄격한 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성은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에 관한 자유보다는 엄격한 통제와 절제가 중요한 문제로 인식됐다. 신약성경적 성은 총체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친 새로운 윤리적인 측면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성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은 육체적 쾌락이 악하며, 성관계는 종족보존을 위하여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 그 자체는 악하여 성적인 쾌락이 신령한 생활의 적으로 여겨졌다. 이제는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 영혼 우위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부분은 텍스트의 보편성과 텍스트의 개별성을 구분함으로써 기록된 텍스트의 의미를 더욱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서 해석에서 쉽게 간과한 부분은 텍스트의 보편성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텍스트의 개별성을 등한시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타난 문제는 텍스트가 “살았고 운동력”이 상실된 “닫힌 의미”로 여겼다는 것이다. 텍스트의 개별성은 성서를 읽는 독자의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삶의 정황에서 무한하고 풍부한 의미를 재생산해 내는 힘과 같다. 말하자면, 성서의 텍스트는 저자의 본래적 의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텍스트를 통해서 말을 건네는, 즉 해석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발화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나 뜻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왜 독자는 텍스트를 읽는가? 텍스트를 읽는 이유는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를 발견하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 이다. 문제는 독자가 규범이 아니라 텍스트가 규범이다. 독자는 텍스트에서 출발해야 한다. 종교개혁 시대에 개혁자들은 성서의 절대 권위에 굴복하고 어느 것이든 성서 텍스트 위에 군림할 수 없었다. 특히 마틴 루터의 경우에는 “성서가 곧 스스로 의미를 드러낸다”라는 해석적 원칙과 존 칼빈의 경우에는 “성서가 성서를 해석한
우리 신앙의 본질(핵심)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그래서 요한1서 1장 3절은 우리의 구원을, 즉 우리의 신앙을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말하고 있고, 요한1서는 여러 곳에서 그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해서 교리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그분의 성품과 의도와 뜻을 친밀하게 아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성서공회 중 하나인 United Bible Society에서 발간한 핸드북 시리즈 요한1서에서 Haas, C., Jonge, M. de와 Swellengrebel, J. L.는 요한1서에 나오는 하나님을 안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요한1서 2장 3절에 대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구절에서 ‘안다’는 동사는 ‘친밀한 교제 안에 있다 혹은 친밀한 교제를 가지다’라는 뜻이다. 즉 어떤 사람의 성품이나 의도를 친밀하게 안다는 뜻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번역은 여기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안다고 하고’라고
1981년의 미국 영화 ‘레이더스(Raiders)’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세계 영화계를 신선한 충격에 빠뜨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중 첫 작품이다. 영화제목 ‘레이더스’는 원래 ‘침략자들’이라는 뜻이지만, 영화 포스터의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아서’(Raiders of the Lost Ark)라는 제목처럼 언약궤를 찾아 나선 모험 판타지다. 해리슨 포드라는 최고의 명배우가 주연을 맡았고, 우리나라 TV에서도 여러 번 방영된 바 있다.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Ark of the Covenant)는 바벨론에 망할 때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고, 고고학 교수인 인디아나 존스 박사가 그 언약궤를 찾아 나선 것인데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언약궤를 추적하던 독일군이 법궤를 열었을 때 그 안에는 모래뿐이고, 거기서 무서운 천사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성한 궤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천사들이 궤를 지키듯이 본문에도 언약궤의 움직임에 따라 ‘하나님의 손’이 나타난다. 그 손이 노획(鹵獲)한 언약궤를 갖다둔 블레셋의 도시마다 재앙이 임한다는 말씀이 사무엘상 5장, 이 장의 중심 단어는 ‘여 호와의 궤’, ‘언약궤’다. 12절밖에 안
지난 시간은 다음 세대가 교회에서 사라진 현실을, 반면에 하나님은 오늘날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눴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 그리고 우리가 그 일에 어떻게 함께 할 것인지를 나누기 전에, 먼저 우리의 현실을 영적인 관점에서 진단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한편으로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 세대의 현 영적 상태와 관련해서 가장 적절한 성경구절이 호세아 4장 6절이라고 생각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다음 세대가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 우리 어른 세대의 영적 타락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어른 세대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 다. 옥한흠 목사님이 소천하던 해 1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에 낸 기고문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말과 정확하게 같은 말을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제목이 “교회 이렇게 무너지다니”였던 것 같다. 그 몇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힘으로 프로그램 가지
기독교 세계관의 이해 오늘날 우리는 역사상 그 어떤 때보다도 다양한 사상들 속에 둘러 싸여 있다. 한 세대가 갖는 의식 구조나 공감대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는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 즉, ‘세계관’이 형성되어 있다. 이는 여러 상황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된다. 그런데 현대 사회 내 이런 다양한 현상들 중의 많은 부분이 세속적인 세계관의 원색적인 표출로 이어지며, 기독교 신앙과 상충한다. 기독교와 대립되는 기존에 있던 세속적인 세계관으로는 크게 다섯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이신론이다. 제1원인인 초월적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나 스스로 운행하도록 버려두셨기에, 하나님은 내재하지도 않으시고 완전한 인격도 아니시며, 인간 사의 주권자나 섭리자도 아님을 말했다. 두 번째는 자연주의이다. 물질을 영원히 존재하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인간은 하나의 복잡한 기계로 인식해 인간의 이해력 역시 기계의 복잡성처럼 생각하였다. 물질의 존재 목적과 역사 과정 등도 자연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세 번째는 허무주의이다. 허무주의는 철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감정으로서 모든 가치를 부정해 인간이 의미 있는 행동을 하
필자는 이사야서 59장 9-12을 구절을 읽을 때 어떤 해석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우선 이 구절에서 필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엄하고 무서운 징벌적 책망을 넘어서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인격을 무시하고 모욕적인 험한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처럼 연상한다. 하지만 필자는나 자신에게 스스로 묻는다. 과연 그러한 의미로 읽고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당시 이 글을 쓴 저자는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을까? 저자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이 구절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하퍼스 바이블 코맨터리’의 내용을 확인했다. 왜냐하면이 구절의 의미는 주해의 도움이 필요 했기 때문이다. 주해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선지자를 통해 보여준 그들의 고난에 대한 이유가 하나님의 부재이기 때문에 이제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 애곡하고 있다. 그들 자신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를 만들었다.” 이 중 주요한 두 단어는 ‘하나님의 부재’(God’s absence)와 ‘애곡’(the lament) 이었다. 필자는 여기서 성서의 구절과 주해의 설명에도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어로 설명한 이 주해는 명사 ‘애
중국에서 날아온 코로나바이러스가 들어온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코로나바이러 스는 여전히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방역 당국의 지침대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방역수칙을 지켰는데도 코로나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앞으로도 언제까지 갈지 예측하기 어렵다. 백신접종을 하고 있지만 항체가 형성되고 치료제가 개발되어서 코로나가 정복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지난 1년간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 예배를 드리며 소규모 모임은 하지 못하고 주일 예배도 소수 인원만 모이고 대부분 영상예배를 드리며 1년을 살고 보니 성도들의 영성도 추락하고 교세도 추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부 교회와 이단 신천지 그리고 인터콥 열방센터, IM선교회 국제학교 등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하면서 직장에서는 기독교인들에게 교회를 가지 말라는 말을 하게 됐다. 교인들도 스스로 주변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혹시나 전파자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1년 가까이 교회를 나오지 못하면서 믿음도 열심도 다 식어 매우 안타깝다. 어떤 업소에서는 기독교 인은 출입을 자제해달라는 안내문을 붙일 정도로 교회는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문제는 기약 없는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비대면) 상황이 언
이전에는 주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역동적인 국면을 살펴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의 행동으로 표현됐다. 주 예수께서 행하신 치유 사역이 하나님의 그런 권능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죄들의 사함”의 선언으로 표현됐다. 중풍병자 치유 사역은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마비된 신체를 치유해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걸어가게 하시는 신체적인 치유 사역이었지만, 영적으로는 믿음으로 주 예수 앞에 나온 인간을 향하여 “죄들의 사함”을 주시는 영혼의 치유 사역이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향해 그가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통해 “주 예수는 땅에서 죄들을 사하는 권세를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죄들을 사하시고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주권적인 권능의 행동을 통해 나타났다. 주 예수의 치유 사역 속에 나타
목회현장에서 종종 듣게 되는 유머입니다. 만약 처음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말씀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어떡합니까! 무슨 이런 유머가 있습니까!”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유머에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 숨어 있습니다. 특별히 매일매일 상황이 바뀌는 환경 속에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부대키며 살아야 하는 목회 현장에서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센스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왕궁에서 각국의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이 모이는 만찬이 열렸습니다. 그때 서양의 식사 매너에 익숙하지 않는 동양인 정치인과 외교관들도 많이 초청됐습니다. 지금도 서양식 저녁식사 테이블에는 스푼, 포크, 나이프가 많이 세팅되고, 컵들도 물컵, 음료수컵 등 여러 개 놓여 있어서 제대로 교양 있게 식사하려면 여간 헷갈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100여년 전 다른 나라의 문화를 잘 모를 때는 모든 것이 이상하고 어색했을 것입니다. 그 만찬 자리도 동양에서 온 외교 사절단들에게는 이상한 것 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맛있는 음식이 나왔다면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을 축이고 식사한다고 옆에 있는 핑거볼
성서 텍스트와 성서 해석자인 독자는 이해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작용한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텍스트와 저자의 연관성에 초점이 되어 있어서 독자는 이해의 구성요소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는 독자를 해석의 구성요소로 받아들일 경우에 발생하는 텍스트의 이해와 저자의 의도가 왜곡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전통적인 해석적 논의에서 독자 (reader)가 이해의 주요 요소에서 배제됐다. 그럼에도 이해의 기술로 정의되는 해석학에서 문제가 되는 구성요소는 저자였다. 전통적으로 저자(author)는 텍스트의 생산자이면서 테스트 자체를 통제하는 입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텍스트에 선행하는 입장을 취하고 독자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독자의 위치나 자리를 이해의 구성요소로 수용할 수 없었던 저자는 결과적으로 독자를 무의식적으로 배제함으로써 텍스트와 독자를 독립적으로 구분하게 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성서해석에서 문제가 되는 주된 쟁점이 텍스트와 독자를 독립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이해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독자가 텍스트에 개입하거나 참여하는 경우에 텍
사람이 행복하고, 원활한 삶을 살아가려면 영혼육이 전반적으로 고루고루 건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몸의 한 부분이 위궤양이나 관절염, 당뇨병, 비염, 고혈압. 등으로 말미암아 불편함을 느끼거나 고통스러우면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또한 마음에 원망이나 불평, 근심, 걱정, 미움 등 영적으로 병들어 있다면 생활하는 모든 영역에서도 여간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듯이~”가 아니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늘 영육간에 건강하게 지낼 때 사람이 진정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러주신 말씀대로 잘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이 천국의 삶이 되리라 봅니다. 사람과의 관계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여러 갈등으로 말미암아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선하고, 좋은 사람만 만나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까다롭고, 힘들고, 피곤한 사람들과도 어울려 살아야 할 때도 있고 때론 이웃들을 통해서 부당하게…
예수님은 종말론적 현상들 중 하나가 세계적 전염병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은 세상 끝에 있을 종말론적 현상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문자적 의미로 전달한 것보다는 상징적 그림 언어로 바꾸어 묵시문학적 환상의 틀로 바꾸어 전달했다. 요한계시록 6장에 네 번째까지의 인 심판은 서로 다른 색상들의 말과 그 말 위에 탄 자들의 환상을 통해 종말의 현존성과 임박성을 강조한다. 첫 번째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활을 들고 흰 말 탄 자는 정복을 통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자라면(6:1~2), 사람들을 죽이는 붉은 말을 탄 자는 전쟁을 상징한다(6:3~4). 말을 탄 자는 전쟁 후에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극심한 기근을 상징한다(6:5~6). 마지막으로 네 번째 청황색 말은 죽음을 상징한다(6:7~8). 네 말 탄 자들의 환상은 평화, 전쟁, 기근, 죽음이 인간의 이기적 죄악의 결과로 인간 스스로 되받은 인간재앙이 인류 역사에 일어났고 앞으로 더 극단적으로 일어날 것을 통해 이미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이 땅에 도
방문상담을 하는 ‘건강가정사’들은 사회복지나 가정학, 여성학 등의 교과목 이수 외 체계적 가족 방문 및 가족 상담 관련 훈련을 받지 못하고, 사례관리자 또한 개인초점의 사례관리에 익숙하여 가족초점의 사례관리나 상담개입에는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상담을 통한 변화에 상담사 변인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면 효과적인 방문 가족 상담을 할 수 있는 상담사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족방문상담을 할 때는 기본적인 의사소통 외에 방문상담의 상황 및 대상에 적합한 상담접근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경원외 2인은 방문대상자의 유형을 ‘지지호소형’ 과 ‘문제해결형’ 및 ‘정보/조언요구형’으로 분류하고, 유형별 ‘표준 상담중재’를 제공하였다. 해결중심 라이프웨이 상담사는 방문대상 자를 ‘고객형’과 ‘불평형’ 및 ‘방문형’ 중 한 유형으로 분류하고, 고객형은 ‘은혜사건’ 혹은 ‘예외상황질문’을 사용할 수 있다. 불평형은 ‘대처질문’과 ‘임재질문’으로 개입할 수 있다. 그리고 방관형은 ‘자기관심질문’과 같은 질문 기법으로 피상담자의 강점 혹은 자원들을 찾아내거나 해결의 작은 단서들을 도출할 수 있다. 이처럼 상담사는 방문대상의 특성이나 가족환경,
부부싸움은 곧잘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시작되는데 산으로 올라갔다가 건너지 말아야 할 강까지 이르기도 한다. 왜 싸움이 시작되었는지 기억도 못하는 경우도 태반이다. 싸움이 커지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됐다고 말하는 부분들은 대부분 시초의 갈등 때문이 아니다. 싸우다 중간에 던져진 말 때문에 더 열 받고, 그 반동으로 화나서 한 대꾸가 더 큰 싸움으로 이어진다. 이혼도 애초에 문제가 되었던 직접적 원인 때문이라기보다는 싸워가는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면서 헤어져야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교회의 갈등도 시작을 따지면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한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별일도 아닌 작은 불씨가 초가 삼간을 다 태운다. 별일도 아닌 시작에 뒤따라오는 반응이 갈등의 방향을 결정한다. 일하며 상사에게 스트레스를 있는 대로 받던 남편이 집에 들어와 애들 시끄럽다고 짜증을 부린다. 들어오자마자 짜증인 남편에게 서운해서 대뜸 애들한테 해주는 게 뭐 있는데 성질이냐고 되받아친다. 졸지에 나쁜 아빠가 된 남편은 너는 잘하는 게 뭐가 있냐고 한 방을 날린다. 그렇지 않아도 육아에 살림에 지치고 자존감이 바닥이던 아내는 내가 너 때문에 이러고 산다고 원망을 한다. 열 받은 김
교단 내 임시총회에 향한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교단은 거의 매년 임시총회를 열며 전년도 총회에서 미비했던 문제들을 다뤄 나갔다. 하지만 건설적인 결론이 도출된 것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매번 대의원권 문제, 총회비 문제 등으로 시작도 전에 시간을 거의 잡아먹어 버려서 정작 논의해야 할 문제들은 제대로 된 이야기 한번 못 나누고 종결돼버리는 일이 종종 있어 왔다. 또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이 규약이 맞다” “저 규약이 맞다”며 입씨름만 하다가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꽤 있었다. 총회(총회장 박문수 목사)는 오는 4월 13일 오후 2시 여의도 총회 예배실을 비롯해 전국에 지정된 장소에서 대면과 비대면을 병행해 임시총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번 임시총회는 △총회 규약과 기관 및 위원회 정관 (규정), 총무 사무규정 수개정의 건 △다음세대 부흥위원회 신설의 건(규약기관) △원로목사(홀사모 포함) 지원의 건 △기관 재정립의 건을 다룬다. 이번 임시총회의 안건들을 살펴보면 크게 원로목사 지원의 건과 다음세대 관련 안건, 그리고 총회 기관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가게될 예정이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기관에 대한 문제다.
완연한 봄 날씨가 성큼성큼 다가왔지만 아직 우리는 메마른 땅에 우물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중국에서 처음 발생한 이후 한국에서는 지난 2020년 1월 20일 첫 번째 확진자가 발생하고, 2월 16일까지 30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당시 확진자 증가 추세가 하루에 한두 명 수준이고 확진자의 동선 정보 공개도 바로바로 됐지만 2월 18일 31번째 확진자가 나타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모 사이비 종교를 통해 확산된 코로나19로 인해 확진자 수는 수백 배로 치솟았으며,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유럽, 아메리카의 확진자가 폭발하기 시작한 2020년 3월 10일 이전까지 확진자 수 순위가 중국에 이은 세계 2위, 인구수 대비로는 세계 1위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이때부터 한국사회는 물론 교회들의 수난이 지속됐다. 3월 이전까지만 해도 대면예배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확진자 수의 증가는 전국을 사실상 얼어붙게 했고 때때로 조금씩 완화되기는 했지만 1년이 넘도록 비대면예배가 지속되는 아픔을 겪게 했다. 총회는 코로나19 확진자가 확산되면서부터 전국 교회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대응지침을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총회장이던 윤재철 목사(대구중앙)는 “코로나
올해 부활절은 오는 4월 4일로 3주 앞으로 다가왔다. 이 땅의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죄목도 찾지 못하고 단지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많은 교회들이 부활절은 전후로 해서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키고 부활절 감사예배를 준비한다. 믿지 않는 영혼들을 위해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죄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왜 죽으셨는지를 전하며 교회는 새로운 활력을 찾으며 기쁨과 감사함이 넘치는 시간을 보냈다. 한국교회도 부활절을 기념해 지역별로 수많은 교회들이 함께 참여해 부활절연합예배를 드리고 교회가 이 땅의 희망이며 회복임을 선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연합찬양대의 찬양과 설교, 헌금을 통한 구제와 나눔은 한국교회가 쌓아온 오랜 역사와 전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부활절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면예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부활절과 관련된 여러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거나 축소되고 비대면으로 부활절을 기념했다. 주의 만찬을 대면행사로 여기는 방역당국의 지침으로 인해 ‘드라이브 스루 주의 만찬’이라는 신개념을 임기응변으로 실
지난 2월 26일 국내에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됐다. 당장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일상으로의 복귀가 점점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반갑기 그지없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 지이겠지만 한국교회에게 코로나19 팬데믹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 상황이 이리 오래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고 대면예배를 할 수 없는 시간이 계속될수록 목회자는 물론이고 성도들의 피로 감은 계속 쌓여만 갔다. 하루빨리 예배당에 모두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국내의 코로나19 1차 대유행은 대구의 모 이단 종교단체를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대구·경북의 교회는 코로나 이전에도 해당 종교단체로 인해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1차 대유행 사태를 통해 더욱 크나큰 상처를 받았다. 당시 본보는 해당 지역의 몇몇 교회들과 연락을 취해 그 당시의 상황을 기사로 보도한 바 있다. 코로나19 이전부터 미디어 선교의 중요성을 알고 미리 대비했던 교회나 그나마 인터넷 사용에 익숙한 목회자들은 여러 방법을 통해 예배를 지속해 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 들의 경우 그저 하염없이 교회의 문을 잠가 놓을 수밖에 없었다. 목회자가 준비됐다 하더라도 성도들이 인터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교회는 대면예배의 제한과 기타 모임 금지라는 철퇴를 맞았다. 다수가 모이는 시설이라는 정부의 입장에 대해, 교회는 철저한 방역지침을 준수하며 어느 기관 못지 않는 철저한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 옮겼다. 실제 신천지를 제외하고 종교시설 감염자 비율은 8.2%라는 최근 통계도 나오면서 정부는 “교회의 대면 예배를 통한 감염은 거의 없었다. 방역수칙을 준수한다면 대면예배 자체가 감염위험도가 높은 행위가 아니다”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지만 교회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감독은 여전하다. 매주일 시도공무원들의 교회 방문은 이제 일상적인 상황이다. 방역지침 점검을 내세우며 교회를 방문해 인원을 파악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점검하는 것에 대해 교회를 철저하게 이 지침을 준수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대면모임 비율은 수도권은 20%, 비수도권은 30%이며 예배 이외의 모든 모임은 일체 금지된 채로 1년의 시간이 지나왔다. 그동안 정부의 방역지침과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해, 소상공인과 주요 업종별 관계자들은 헌법소원과 소송, 시위, 공청회를 거치면서 해결책을 찾았다. 집단감염 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이면 어김없이 정부 측의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