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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우리의 책임 (마태복음 28장 1~10절)

최인선 목사 은혜드림교회

김훈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라는 책에 보면 저자의 아버지에 대해 기록한 '광야를 달리는 말'이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 책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묘사하는 글이 있습니다. 조금 절약해서 소개하면 ‘휴가를 다녀와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이렇게 진행됩니다.


“아버지는 오랜 병석에서 누워계셨고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그 언저리에 와 있었다. 아래를 살필 때, 아버지도 울었고 나도 울었다. 추운 날씨에 땅을 파는데 한나절이 걸렸다. 관이 구덩이 속으로 내려갈 때, 내 어린 여동생들은 마치 그 속에 따라 들어갈 것처럼 땅바닥을 구르며 울었다. 불에 타는 듯한, 그리고 다급하고도 악착스러운 울음이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 한식날 아버지 무덤에 성묘가서도 나는 울지 않는다. 내 여동생들도 이제는 다들 늙어서 울지 않는다. 슬픔도 시간 속에 풍화되는 것이어서 40여년 지난 무덤가에서는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다.”


목회의 사역 가운데 가장 어색하고 마음 아픈 사역 중에 하나가 장례식입니다. 참 어색한 날입니다. 장례를 많이 집례했지만, 집례를 할 때마다 어색하고 힘들고 고달프고 섭섭한 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큰 이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항상 우리를 어색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장례식을 그렇게 많이 치뤄보아도, 유족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수없이 반복했지만, 여전히 어색한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끝을 말하는 겁니다. 죽으면 심장이 멎고 피의 순환이 멈추고 뇌로 들어가는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서 뇌의 기능이 마비되는 순간, 전두엽의 기능은 없어지고 그래서 우리의 존재는 육체의 고깃덩어리를 남기고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을 무척이나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죽음을 확실하면서도 또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입니다. 저도 죽음이 두렵고, 우리 모두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좀 다른 특별한 자신감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죽어도 천국에 가서 다시 산다는 겁니다. 오늘 밤이 되어 우리가 침대에 들어가 잠을 청할 때, 우리에게 분명한 한가지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일 아침 일어난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내일 아침 새벽기도를 어떻게 일어날까? 고민하는 것도 역시, 내일 아침에 새로운 생명이 주어진다는 명백한 사실을 믿기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토마스 왓슨이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부활 때에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을 더 분명하게 믿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여러분들도 부활하실 것을 믿으십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런데 죽음이 두려운 만큼 부활한다는 믿음은 죽음의 그 두려움의 힘을 넘어서 이겨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람들은, 그리고 철학자들은 죽음이 가장 강한 힘이라고 생각했어요. 죽음을 가장 큰 힘으로 여긴 사람들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러니까, 죽음 앞에 무기력하고 무능력합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죽음 앞에는 모든 자존심도 내려놓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신앙을 가진 바울을 뭐라고 합니까. 지금 요즘 아이들이 하는 말로 하면 “사망! 너 이리와봐 오늘 나하고 맞짱 뜨자! 사망아 니가 그동안 이겼던 승리가 어디 있니? 한번 말해봐. 이젠 끝이야”


우리 모두는 죽음을 미루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사실은 죽음의 문제 앞에서 온전히 이뤄지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연약한 인간이 부활을 경험할 때 나타나는 변화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주는지 세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인간은 동이 틀 때, 무덤을 향해 가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옛날이 더 좋았어'라는 말은 사실은 실제로는 사실이 아닐 겁니다.


옛날에 밥 한끼를 해 먹으려면, 남자들은 산에서 나무를 해왔어야 합니다. 여자들은 장작불을 때서 가마솥에 밥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연탄불, 곤로, 가스레인지가 생겼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중학교 1학년때, 제 친구집에 갔더니, 우리집에 없는 무슨 통인데, 앞에 유리로 안이 보여요. 내 친구가 거기다가 우유를 넣고 1~2분 만에 꺼냈는데, 그 차가운 우유가 아주 뜨거워진 겁니다. 그게 전자레인지라는 것이었죠. 깜짝 놀랐습니다. 화장실은 어떤가요? 휴지를 이렇게 맘껏 쓴 적이 없습니다. 4칸 이상은 사치였습니다. 그런데, 대학교 1학년 때 교수님 집에 가서 비데가 있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삶이 점점 힘들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단순히 삶을 어떤 편의성만 가지고 인간의 행복이 결정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은 아무리 좋아져도 원래 비관적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안식후 첫날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안식일 다음 날, 즉 한 주의 첫 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습니다.”(1절, 쉬운성경)


여기서 “동틀 무렵”, 동틀 때는 희망을 말하는 때입니다. 깜깜한 밤이 아니라, 동이 터오는 그 날도 우리는 겨우 무덤을 보러 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인류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비관적인 것을 보는 인생, 아니, 인간의 죄는 인간을 비관적인 것을 쫓는 인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 겁니다.


아주 유명한 책 가운데 한스 로슬링이 지은 팩트 풀니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세상에 전기를 공급받는 인구가 몇 퍼센트일까 조사를 해보니, 무려 80%가 넘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가난한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 생각하며 이 수치를 보고 놀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그 책에서는 그렇게 설명을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세상을 왜곡하는 10가지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간극본능, 부정적 본능, 직선본능 공포본능 비난본능 등” 그런 10가지가 우리의 삶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관점이 중요하다” 인간은 부정적 관점에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부정적인 도구를 가지고 산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틀 때조차 하루의 처음을 무덤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부정적 무덤에서 가장 밝은 부활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무덤을 향해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예수님이 부활을 하신 것 입니다.


6절(쉬운성경)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다.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와서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보아라.” 그리고 이 예수님의 부활을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과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그 후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그 후에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5장 3절 하반절 - 6절, 쉬운성경)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에게 나타나셨고, 한 번에 500명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부활의 증인이라는 겁니다. 부활을 본 제자들이 달라졌죠. 죽음 앞에 보편적인 사람처럼 무서워하고 떨던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적을 본 적이 없나요? 수많은 기적을 봤습니다. 물 위로 걸어도 봤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는 것도 봤어요. 별의별 기적을 봐도 죽음 앞에서는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서 자신들 앞에 나타나시자 그들의 인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가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음을 불사르는 이들의 담대함을 본 사람들은 정말 예수라는 청년이 부활한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부활전에 겁쟁이었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부활을 경험하고는 다들 순교하기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죽어도 사는 부활 신앙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교를 선택했고, 예수님의 12제자는 모두 순교를 선택한 것입니다. 부활 말고 이 집단적 변화를 설명할 길이 없다고 세속 역사가가 한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부활이 거짓말이라면, 초대교회의 말할 수 없이 몰아닥친 모진 핍박의 힘은 단숨에 교회들을 진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강력한 힘으로 진압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작은 사람도 큰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의 힘이었습니다. 그런 부활의 기적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축원합니다.

 

세번째, 부활은 우리의 삶을 규정해줍니다.
그들이 부활의 소식을 듣고 처음 한 행동이 뭡니까? 부활을 경험한 그들이 한 일을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재빨리 무덤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두려우면서도 매우 기뻤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려고 달려갔습니다”(8절, 쉬운성경)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행동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재빨리 무덤을 떠나 - 소망없는 곳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2. 두려우면서도 매우 기뻤습니다. - 두려움과 기쁨이 상존할 수 있는 감정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두려웠지만, 기쁨을 알았다는 겁니다.
3.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서 달려갔다는 겁니다.


부활은 사명도 바뀌었지만, 우리의 삶이 소망의 삶으로 기쁨으로 전도자의 삶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부활에게 정확하게 타격이 되면 우리는 바뀝니다. 소망의 사람으로 기쁨의 사람으로!


좀 전에 소개해 드렸던 팩트 풀니스를 쓴 한스 로슬링은 ‘세상은 좋아진다’라고 이 세상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본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한스 로슬링은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병원에선 2개월 더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운이 좋아도 1년을 넘기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남은 2개월 동안 이 책을 쓴 겁니다. 결국 쓰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책 어디에서도 어둡거나 절망스러운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시한부 선고를 받고 이 책을 썼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자는 기쁜 마음으로 썼다고 합니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면서까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세상은 우리에게 아무리 부정적인 뉴스들이 쏟아내도, 우리가 노력하고 관심을 가진 만큼 세상은 더 좋아질 거라고 말하는 겁니다.”


인간은 나쁜 소식을 듣고 걱정도 하지만 희망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과 환희를 동시에 품을 수 있는 역설적인 존재니까요. 이 책이 전하는 진짜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은 좋아진다 우리가 노력하는 것만큼!”


세상은 어두워지고 있다고 하지만, 저는 밝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을 노래하고 부활을 소개하는 순간 세상을 밝아질 것입니다. 그 부활의 기쁨을 가진 귀하고 복된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은 좋아집니다. 나의 삶은 좋아집니다. 나의 가정은 좋아집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이 큰 만큼! 우리는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을 가지십시오!


비관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실체가 없는 무덤 앞에서 소망을 가지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리는 날만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이 부활의 삶으로 희망을 간절히 노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삶이 어떠한 길을 걸어갈 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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