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를 마치고 귀가 하는데 어머니가 집에서 키우던 닭을 잡고 집을 나서던 중 내가 물었다. “엄마! 닭은 왜 가지고 어디가?” “음 시장에 가서 팔려고 “ “ 왜 팔아?” “응 돈 쓸 일이 있어서…” 돌아오신 어머니 품에 닭은 없었다. 이튿날 학교 특활시간에 문예부에서 글짓기 시간에 닭과 얽힌 내 이야기를 원고지에 담아 써 내려갔다. 마침 문예부 지도를 하신 담임 선생님이 내가 제출했던 원고지를 주시면서 앞에 나와 읽으라고 하셨다. 200자 원고지의 대여섯 분량을 읽어 내려갔다. 선생님은 참 잘 썼다고 칭찬하시며 다음 글짓기 대회에 틀림없이 입상할 거라고 칭찬 하셨다. 그 후로 나는 원고지 칸을 채우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고 했다. 모든 가르침의 과정에서 어떤 과제를 학습하기 위해서는 학습자는 주어진 자극에 대해서 적절한 반응이 도출되어야 모든 학습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부활절에 성도들이 나눠준 계란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뭇 인생들에서 안에서의 ‘줄’, 밖에서의 ‘탁’이 되어 동시에 일어났을 때, 새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할 수 있다. 부활절에 달걀을 삶아서 나눠주는 풍습을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로마 멸망의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양한 이유들을 제시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설, 쾌락의 대명사인 혼욕으로 문란한 성적 향락을 제공한 목욕탕 설, 납 성분의 수도관 구축으로 인한 납중독 설 그리고 극단적인 타락설 등을 말하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나카가와 요시타카의 ‘빵과 서커스(Bread and Circuses)’의 역자 임해성이 ‘이 책을 읽기 전에’를 통해 언급한 대로 로마의 멸망 원인이 꼭 그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미 앞서 언급한 것들은 로마 초기부터 있어 왔던 문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쇠락은 제국의 거대한 규모가 가져온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결과였다. 번영은 부패를 촉진한다. 정복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파멸의 압력은 늘어간다.”는 임해성의 로마 멸망 진단에 수긍을 하게 된다. 고작해야 9m 앞 밖에 볼 수 없는 코뿔소가 앞을 향해 돌진하듯이 7~80년대 한국교회는 오직 부흥이라는 대명제 아래 코뿔소처럼 눈앞만 보고 돌진하듯 달렸다. 그 결과 제2의 예루살렘이라는 세계의 찬사를 들으며 부러움의 영적 대국이 됐고, 로마가 정복전쟁을 벌이듯이 한국 기독교는 서로 앞다퉈 전 세계로 선교전쟁을 시작
토종 게임기의 부활, 23년 만에 부활한 ‘공중보건장학제도’ 대량 미달! 세상 사람들도 부활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뭔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실체는 모르고 결과만 가져다 쓰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찬양한다. 주님과 함께 일으켜 세워진 우리는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간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갱이이다. 그런데 우리는 진정 성경적인 부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진짜 금요일에 돌아가셨는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금요일’(Good Friday)에 죽으시고 ‘부활절’ 주일 이른 아침에 죽음에서 일어나셨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보통 토요일) 전날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금요일에 죽으신 것으로 믿고 있다. 아니다. 예수님은 수요일 날 돌아가셨다. 그분께서 죽으신 다음 날의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정규 안식일 즉 토요일의 안식일이 아니었다. 그 날은 매년 한 번 있는 안식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안식일이 큰 날이었기 때문이다(요 19:31). 이러한 큰 안식일은 한 주의 어떤 요일이라도 될 수 있으며 그 해에는 분명히 목요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예비일(수요일)에 십자
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은 크게 3세대로 구분되어 있다. 오늘의 사회가 있기까지 과거에 수고하고 땀 흘리는 세대로 ‘공경과 섬김’의 대상인 1세대와 2세대는 지금 우리 사회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세대로 ‘격려와 협조’의 대상이다. 또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책임을 지며 땀 흘릴 제3세대는 ‘투자와 양육’의 대상인 것이다. 바람직한 사회는 이 3세대가 한데 어울려서 서로 공경, 격려와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함께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계층, 학력, 연령, 이념, 지역별로 나라는 사분오열로 갈가리 찢어져 있다. 사회 통합을 앞장서서 견인해야 할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따라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거나 심지어는 즐기고 있다. 그 결과 남북분단보다 남남분열을 더 우려하는 목소리가 비등해져가고 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교단과 교회는 함께하는 공생(共生)의 몫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 대답은 “아니요”이다.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반목과 대립 분열의 내홍을 겪지 않는 교회와 교단이 드물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부여받은 교회 내에서조차 함께하는 삶을 이루어가지 못한다면 교회 밖에서 공
조국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아름다운 전통은 존중하고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전통이 전혀 성경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진리가 전통이 될 수 있지만, 전통이라고 해서 항상 진리는 아니다. 많은 교회에서 사순절이 시작됐다. 사순절이 성경에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순절(Lent)은 성경에 없다. 그렇다면 사순절(四旬節)은 사람의 전통이요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 불과하다(골2:8).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받았던 고난을 생각하며 기도와 절제의 삶을 산다는 사순절! 사순절을 지내는 그 신앙과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성경에 없는 이교도의 절기를 지킬 수는 없지 않겠는가. 사순절은 어디서 왔는가 사순절(四旬節)은 부활절 이전 40일을 금욕하며 지내는 절기를 말한다. 사순절은 주일 6번을 빼고 계산하기에 실제로는 46일 간이다. 특별히 사순절 절기가 시작되는 날은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이라 불린다. 2019년 올해 사순절은 부활절(Easter)이 시작되기 전인, 3월 6일부터 4월 20일(부활절 이브)까지다. A.D. 325년 니케아공의회(council of Nicea)에서
새해가 됐지만 우리 사회와 교회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도리어 이전보다 더 못한 상황으로 흐르는 듯한 모양새다. 세계 또한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밝은 전망보다는 이전보다 못한 전망들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미중의 G2 및 무역전쟁에서의 주도권 싸움은 점입가경이다. 럭비공같이 예측할 수 없는 트럼프의 언행에 전 세계는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s)를 타고 있고, 증시 등 경제는 출렁거리고 있다. 남북관계는 서로 신년사를 발표하며 새해를 맞이했지만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의 파랑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막연한 미래의 행복만 꿈꾸게 할 뿐 아무것도 된 것이 없는 현재는 무미건조한, 일명 파랑새 증후군이나 다름없는 안개 속에서 휘청거린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진보수의 갈등은 새 해가 되었어도 그대로이고, 깨끗하고 좀 다를 것이라고 믿었던 진보 정권도 전 정권들에 비해 별 다르지 않은 모습과 태도에 기대만큼 실망감도 크게 다가오는 새해 벽두다. 한국교회는 과연 다른가? 한국교회도 한국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게 탁류 속에서 탁류 되어 함께 흐르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교회도 우리 사회처럼 진보수의 이념으로
아직도 건국일 하나 제대로 통일하지 못하고 둘로 나눠져 대립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길을 잃으며 방황과 갈등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느낌이다. 주변국을 비롯한 세계는 급변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전쟁터 아닌 전쟁터를 만들며 나라 밖으로 진군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저지와’(井底之蛙), 즉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우물 안에서 ‘좌정관천’(坐井觀天)하고 있다. 좁디좁은 우물 안에 앉아 우물만큼의 하늘만을 보면서 하늘이 이러니저러니 한다. 자기 좁은 세계로 하늘을 보며 하늘을 말하는 개구리가 바다를 알리가 있겠는가? 아니 바다에 대한 생각 자체가 있겠는가? 최근 대한민국과 한국교회의 모습이 꼭 우물 안에 앉아 우물만큼의 하늘만 보고 서로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개구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청와대와 정부는 남북문제에 정권을 몰입하지만 남북문제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것이 없고, 한반도와 세계를 위협한다는 북핵의 해결도 오리무중이다. 미중 무역 전쟁으로 촉발된 한국 경제는 연일 내리막길을 걷고 있어 이제 국민 대다수는 서서히 다가오게 될 경제 위기에 대한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그들만의 정책을 찬양하며
‘정의’는 인류의 끊임없는 갈망이며 논쟁이다. 정의(正義, justice)를 정의(定義, definition)하기가 쉽지 않음과 시대와 지역과 그리고 대상이 달라 항상 가변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범죄 이후 인간의 속성이 정의를 스스로 주장하거나 정의하기에는 그 정당성이 부족한 것이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정의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마이클 샌델도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텔로스’, 즉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이 정의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등을 언급 한 후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그 동안 있어왔던 벤담, 칸트, 롤스 등 여러 정의론에 자신의 견해 하나를 추가하는 것으로 책의 끝을 장식했다. 결국 정의를 독자의 몫으로 돌린 것이다. 이만큼 정의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끝없는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한 때, 법치가 사회의 정의인 것처럼 각인되어진 적이 있었다. 정작 그 정의를 외친 사람들은 정의롭지 못했음에도 국민에게 법치적 정의를 외치며 강요했다. 물론 법치가 이 사회를 정의롭게 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삼권분립이 분명한 민주제도의 국가이면서도 우리의 정치사는 정
오는 7월 16일, 서울광장이 음란과 죄악의 장소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한국교회 내에서 커지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서울광장 일대에서 열리는 동성애축제(퀴어축제)를 조건부로 승인했다. 서울시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시민위)는 지난 6월 15일 회의를 통해,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가 신청한 서울광장 사용 신청 안건을 수정, 가결했다. 시민위는 애초 조직위가 신청한 행사 기간(7월 12∼17일)을 7월 16일 토요일 하루로 줄이고, 신체 과다노출과 청소년보호법상 금지된 유해 음란물 판매·전시를 안 하는 조건으로 광장 사용 신청을 받아들였다. 시민위는 무대 설치 등 행사 준비 시간을 주기 위해 행사 전날인 7월 15일 오후부터 조직위가 광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동성애축제가 처음으로 서울광장에서 열린 것은 2015년부터이다. 지난 3년간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오프라인 집회가 금지된 기간을 제외하고 불허된 적이 없이 매번 시민위를 통해 사용신청이 통과됐다. 지난 2019년 당시 서울시의 다수의 공무원들이 서울광장 동성애 축제를 반대하며 발표한 성명서에 따르면 ‘서울특별시 서울광장의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에서 ‘서울광장은 시민의 건전한
말씀과 기도의 축제인 ‘라이즈 업 뱁티스트’ 침례교 연합기도회는 지난 6월 3일 세종꿈의교회(안희묵 목사) 집회를 끝으로 12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100만 뱁티스트 전도운동과 함께한 이번 연합기도회는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대면과 비대면으로 동시에 적극적인 참여로 말씀을 회복하고 기도로 은혜받은 집회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 같은 연합기도회가 열릴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코로나19로 인해 제한적인 교회 사역 가운데 나온 돌파구였다. 교회의 모임이 제한을 받고 대면 모임이 사실상 통제되면서 대규모 집회를 치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온 대안이었다. 그리고 이 대안은 지난해 12일 동안의 연속된 집회를 통해 침례교회가 ‘기도하는 교단’ ‘말씀으로 충만한 교단’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대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특별히 2022년 ‘라이즈 업 뱁티스트’는 주요 지역의 거점교회를 선정하고 인근 지역에 속해 있는 침례교회가 함께 연합으로 참여하는 자리로 마련하자는 취지로 10개 교회에서 집회가 열렸다. 교단 안팎에서 영향력 있는 목회자들이 말씀 증거자로 나서 침례교회와 한국교회를 위해 회개를 촉구하고 영혼 구령을 위해 교회 회복을 위해 한
2년 남짓 코로나19 상황을 겪으면서 교회는 심각한 목회 사역의 타격을 입었다. 현재 사회적 거리두기는 해제되고 일상의 회복이 이뤄지면서 외관상으로는 정상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아직 교회의 완전한 회복은 요원해 보인다. 최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와 기아대책 등이 지앤컴리서치(대표 지용근)에 의뢰해 조사한 목회자와 교인들의 현장 예배 참석에 대한 의식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3명만이 현장 예배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지앤컴리서치는 또 목회자 981명과 교인 1500명에게 설문한 결과 28.3%만이 ‘곧바로 현장 예배에 참석했다’고 답했으며 57.8%는 ‘일정 기간 지켜본 후 현장 예배에 참여하겠다’고 응답했다. 지난 5월 첫째주부터 교회는 마스크 미착용자나 발열증상이 있는 자를 제외하고 모든 인원에 한해 예배당을 개방하고 교회 자체적으로 방역지침을 준수하는 가운데 교회 사역을 정상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도 안되는 인원만이 현장 예배에 참석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온라인 예배에 길들어진 성도들의 주일 예배에 대한 인식이 현장 대면 예배가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대면 예배 참석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자신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그만큼 역사란 단순히 옛날 이야기를 뛰어넘어 현재의 거울이자 미래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 침례교의 역사는 영국의 비국교도운동 및 재침례파에 기원을 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교개혁 시기였던 16세기 당시 영국 국교회였던 성공회와 상충됐다. 침례교는 불세출의 설교가라 불리는 찰스 스펄전 목사(Charles Spurgeon)와 같은 설교가들을 배출하면서 점차 영국 전역으로 확장됐고, 그 세력은 장 칼뱅의 예정설을 극단적으로 해석해 선교가 필요 없다는 기존 영국인 선교사들에 반발, 세계침례회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세워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 선교사(William Carey)를 통해 전세계로 확산됐다. 한국 침례교의 기원은 1889년 12월 펜윅 선교사에 의해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된 ‘대한기독교회’(1921년 ‘동아기독교회’로 교단명 변경)로 펜윅은 한국인의 특색에 맞춘 선교에 집중했으며, 도시보다 산간 및 해안가 선교에 집중
5월은 가정의 달인 만큼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다양한 행사와 집회들이 열린다.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이후, 5월 첫째 주일은 각 교회마다 예배의 열기가 뜨거웠다. 수많은 성도들이 주일 영상예배가 아닌 현장예배로 함께 했으며 특별히 어린이주일로 지키며 다음세대를 위한 섬김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이와 함께 둘째 주는 목회자 주일로 준비하며 말씀으로 성도들을 양육하는 목회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침례교회에서 있어 5월은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달이다. 바로 일제 총독부에 의해 교단이 강제로 해체되고 재산을 몰수당한 일이다. 우리교단은 1889년 12월 8일 한반도 땅을 밟은 캐나다 선교사 말콤 펜윅의 선교로 시작됐다. 지금의 북한 원산에 본부를 두고 한반도 전역은 물론 해외선교에 주력하며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생명을 걸고 자비량으로 복음 전파 사역에 매진했다. 그러다가 1944년 5월 10일 일왕에 의해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교단이 해체되고 교회가 폐쇄를 당하며 수많은 지도자들이 투옥되는 좌절을 겪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말씀과 복음으로 세워진 침례교회의 정체성이자 성경적 신앙을 표방했던 선진들의 신앙고백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