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의 가치는 헤아릴 수가 없다. 그 가격이 평범한 사람의 상상력을 뛰어넘지만, 실상 명품의 가치에는 그 가치를 이룬 비할 수 없는 탁월함과 역사와 전통이 흠잡을 데 없이 스며들어 있기에 그 값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랜 세월이 명품의 수준을 뒷받침하지만 수많은 아류뿐만 아니라 자기 분야의 거의 모든 물건을 하류로 밀어버릴 만큼의 압도적인 기술력과 기량,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그 분야를 대표하고 주도하는, 위풍당당한 물건이 ‘명품’이라면, 그런 명품은 단순한 ‘럭셔리’와는 차별된 좋은 것이다. 그런 명품을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정말이지 복된 인생이다.
‘교회’에도 명품이 있을까? 교회가 정말이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지만 명품 교회라고 인정할만한 교회가 있다면 어떨까? 물론, 한국교회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교회가 있고, 세계 최대의 교회라는 타이틀을 기네스북에 올린 교회도 있다. 3000억 원가량의 건축비가 사용된, 그리고 건축상을 받은 교회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유명한 교회는 아직 ‘명품’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품격이 그 내면에 깊숙이 배어있으며, 교회다움을 아는 이들이 흠모하는 그런 명품스러운 교회가 아직은 없다.
미국의 독립전쟁을 이끈 지도자들 가운데는 장로교인들이 많았다. 건국 이전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아메리카인지라 건국의 지도자가 곧 그 나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니, 미국과 각 주의 역사를 시작한 이들, 그 가문의 역사는 오늘날 미국의 위광과 더불어 명품 가문으로서 자랑할 만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을 만들고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힘은 침례교회에서 나왔다고 자랑할 만하다. 미국 최초의 식민지라 할 수 있고, 미국 최초의 대각성 부흥운동이 시작된, 조나단 에드워즈로 상징되는 ‘뉴 잉글랜드 식민지’는 그 최초의 신학과 교회의 방식은 회중주의였으나 지역단위로는 장로교적 노회정치에 유사했고, 결국 미국 장로교회로 흡수됐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정치체제 및 사회제도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미국식 민주주의의 이념을 이끌고 있는 개신교파는 침례교회이며, 그 교파적 중심에 남침례교단이 있다.
미국의 주요 장로교단을 모두 합해도 그 교세가 남침례교단의 절반 정도의 수준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마치 개혁주의 신학이 존 칼빈 개인의 산물이며, 장로교단의 전유물처럼 간주되는 경향이 있지만 미국에서 칼빈주의(개혁주의)와 복음주의를 이끄는 지도력은 침례교회에서 나온다고 단언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미국 침례교인들의 그와 같은 저력은 ‘하나님 말씀’ 즉, 성경에 대한 존중심과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정신에서 나오지만, 그 정신을 단지 두드러진 특징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그 정신이 일정한 위력을 지속적으로 발휘하고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사회를 변혁시키고 나라의 기조를 움직이고 개선하여 더 좋은 나라를 이룩하는 ‘명품’ 정신이 되기 위해서는 빼어난 역사성, 대를 이어 계승하면서 숙성시킨 전통, 탁월한 신학이 없으면 안 된다.
우리 교단은 말콤 펜윅 선교사와 엘라씽기념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선교사역으로 시작했는 데, 당시 선교사들의 신앙은 미국 북침례교회의 신앙전통에 속했고, 거슬러 올라가면 그 최상류에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청교도 개혁주의까지 닿는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교단은 미국 남침례교회를 크게 의존하게 됐다. 본격적인 침례교 신학은 남침례교회를 통해 잉글랜드 특수침례교회를 접한다고 할 수 있다. 즉,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신학은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교회와 신학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정통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역사성, 신학의 진중함을 무시하고 성공지상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그 양적, 물질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에 ‘열등감’이 없는 사람이 없다. 그러한 열패감은 무의미한 경쟁심리, 근거 없는 병든 우월감, 비기독교적 염세주의로 드러난다. 물질적, 외면적 성공에의해서는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마음이 병든 사람이 명품으로 치장한다고해서 그 병든 됨됨이가 치유되지 않는다. 오히려 심지어 교회사를 왜곡하면서 무속에 가까운 신령주의로 자신을 치장하면서 그런 자신이 진짜 ‘명품’ 교회를 다니는 줄로 착각한다. 그런 착각을 유발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King James Bible Onlyism)이라는 기괴한 주장이다.
KJV이 명품성경인 까닭은 제임스 1세의 권위와 국가적 뒷받침 때문이 아니다. 제임스 1세 국왕의 가문인 스튜어트 왕가는 대를 이어 청교도들을 혹독하게 박해했고, 훗날 침례교인들을 박해했다. 왜 박해했을까? 교회를 국왕의 소유물로 삼고, 국왕이 지상교회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통치하겠다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권위와 국가권력을 동원했던 것이다. 스튜어트 왕가의 왕들은 자신의 교회 즉, 앵글리칸을 독재적으로 통치하되 종교개혁의 잔재를 쓸어내고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하려는 목적을 품었다. 즉, 1611년 킹제임스성경은 국왕의 사악한 야심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의 필요성 때문에 출현하게 된 성경이며, 국왕들로부터 핍박을 받은 번역자들의 적극적인 협력의 산물이다.
핍박과 추방을 당하면서도 끝 모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순결한 신앙을 지키고 교회의 순결성을 지켜온 이들이 더 나은 성경책을 후대에 물려주고자 하는 마음이 KJV을 만들어내고 수용하고 사용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아는 킹제임스 성경이 됐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명품 성경 이전에, 명품 신앙이 있었고, 명품 신앙을 간직하고 전수하기 위한 ‘피난민·나그네 교회’가 있었던 것이다. 이 신앙정신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 잉글랜드 침례교인들이고, 그 정신을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계승한 것이 미국 침례교회이며, 그 침례교 정신의 역사성과 신학성을 가장 확고하게 계승하는 것이 남침례교회인 것이니, 우리 교단의 선배님들이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남침례교회와 연결된 것은 정말이지 큰 축복이다.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을 그 본래의 역사적 의의와, 번역사적 가치를 떠나 거의 ‘우상화’한 것이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King James Bible Onlyism)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이단적인 사상도 문제지만 이 사상을 주창하는 주요 인물들 자체가 역사성, 신학성, 나아가서는 교회적 뿌리가 없거나 애매하다. 그러면서도 이들 집단은 ‘침례교회’라는 간판을 내건다.
특히 우리가 반성해야할 지점은, 이런저런 아류들이 ‘침례교회’라는 간판을 통해 현혹할 뿐만 아니라 어리숙한 침례교인들이라면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법한, 얼핏 듣기에 그럴듯하지만 ‘사이비 지식’에 불과한 거짓을 진짜인 것처럼 흔들며 미혹하는 것이다.
문제는, 사이비 지식에 한 번 미혹 당하면 계속해서 미혹 당하고, 이런저런 종류의 이단에 계속해서 휩쓸리게 된다는 것이다. 한 번은 혹은 몇 번씩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실수가 일상화되면 그것은 더 이상 실수가 아니다. 그리고 실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짓 지식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마치 거짓의 늪에 빠진 것마냥 허우적거리다가 진이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미혹된 사람들의 심사를 압축하여, 서사로 뒷받침한 것이 ‘1611년 킹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하자. 명품신앙, 명품교회를 추구하자. 바늘 한 땀까지도 때묻은 얼룩까지도 예사롭지 않은 연륜이 되게 하는 그런 명품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는 좋은 역사, 좋은 신학, 좋은 전통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