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믿는 사람일지라도 우연이 겹치면 우연이라고 믿지 못한다. 필연이라고 믿는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며 섭리이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칙이라고 믿는다. 그렇다. 성경은 세상에 우연은 없다고, 뿌린 대로 거둔다고 가르친다.
1945년 8월 6일 이른 아침, 특별하게 제작된 B-29 폭격기들이 일본을 향해 이륙했다. 특별한 폭격임무를 위해 특별제작된 폭탄을 투하할 폭격기 ‘에놀라게이’를, 특별편성된 비행전대장 폴 티비츠 대령이 직접 조종했다. 이보다 1시간 전에, 3대의 B-29 폭격기가 먼저 이륙했다. 1대는 고쿠라, 다른 1대는 히로시마, 다른 1대는 나가사키, 이렇게 일본의 세 도시를 향해 날아갔다. 각 도시의 기상상황이 폭탄투하에 적합한지를 관측해서, 에놀라게이를 조종하는 폴 티비츠 대령에게 보고하는 것이 임무였다.
어쩌다 나가사키가 아닌 히로시마였을까?
폴 티비츠 대령은 고쿠라와 히로시마의 하늘에는 구름이 짙게 끼어 있었지만 나가사키의 상공만이 맑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히로시마 상공을 비행하던 B-29로부터 연락이 왔다. 히로시마 상공의 구름이 갑자기 걷히면서 시계가 아주 좋아졌다는 보고였다. 게다가 일본군 요격기도 보이지 않았고 대공포 사격도 전혀 없으니, 히로시마를 폭격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까지 해왔다. 폴 티비츠 대령은 즉각적으로 히로시마를 폭격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에서 16분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히로시마 상공 570m에서 핵폭탄 ‘리틀보이’가 폭발했다. 당시 히로시마 인구 33만명 가운데 14만명이 폭격 당일에 죽었다. 왜 하필 히로시마였을까? 왜 하필 그 순간에 히로시마의 하늘이 청명해졌을까? 우연이라고 할 것인가? 폭격지 선정의 결정권자 폴 티비츠 대령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날, 나가사키가 폭격에서 제외된 것이 다행일까?
일본제국 수뇌부는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핵폭격 지휘부가 괌에 모여 회의를 했고 제2차 폭격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8월 9일, 이번에는 ‘복스카’라는 별칭을 가진 B-29 폭격기가 ‘뚱뚱보’(팻맨)를 싣고 이륙했다. 3일 전과 마찬가지로 기상상황을 관측하기 위해 1시간 먼저 2대의 B-29 폭격기가 이륙해 일본으로 향했다. 3일 전에 히로시마에 ‘꼬마’(리틀보이)를 투하했던 ‘에놀라게이’가 고쿠라 상공의 기상을 관측하는 임무를 맡았다. 다른 한 대는 ‘나가사키’로 향했다.
어쩌다 고쿠라가 아니라 나가사키였을까?
핵폭탄을 실은 ‘복스카’가 일본에 접근할 때 두 도시 상공의 기상상황이 보고됐다. 고쿠라에는 아침 안개가 옅게 끼였지만 곧 쾌청해질 것으로 예측된다는 보고와 나가사키 역시 아침 안개가 끼였지만 약간 맑다는 보고였다. ‘복스카’의 기장인 척 스위니 소령은 고쿠라를 목표로 선정하고 고쿠라로 날아갔다.
그러나 막상 고쿠라 상공에 도착해보니 여전히 안개가 도시 상공을 덮고 있었다. 게다가 전날 있었던 폭격으로 파괴당한 제철소에서 연기가 올라와 고쿠라 상공의 시계는 매우 불량했다. ‘복스카’는 언제라도 핵폭탄을 투하할 준비를 한 채 고쿠라 상공을 세 바퀴나 돌았다. 50분이 지났다. ‘복스카’의 통신담당관이 일본 요격기들이 움직이는 것 같다고, 고쿠라 상공에 머무는 것은 위험할 것 같다고 보고했다. 척 스위니 소령은 고쿠라를 포기했다.
폭격기는 20분 뒤에 나가사키 상공에 도착했다. 하지만 처음 보고 때와는 달리 짙은 구름이 나가사키를 덮고 있었다. 육안과 관측장비로 목표지점을 찾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미 연료를 너무 많이 소모했다. 하는 수 없이 레이더 조준 폭격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나가사키 상공을 덮고 있던 구름의 어느 한 부분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부분에서 보니 나가사키의 도심지역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미 귀환할 연료가 부족해진 ‘복스카’의 척 스위니 소령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핵폭탄 ‘팻맨’을 투하했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에, 두 번째 핵폭탄이 나가사키의 마쓰야마마치 상공 500m에서 폭발했다.
그런데 폭탄이 하강하면서 바람에 떠밀렸다. 애초에 목표했던 평평한 도심지역을 벗어나 구릉으로 둘러싸인 ‘우라카미’라는 변두리 지역 쪽으로 다가가 폭발했다. 언덕이 막아준 탓에 나가사키 도심지역은 직접적인 타격을 상당 부분 피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우라카미는, 일본 최대의 천주교의 성지(聖地)이며, 천주교인들이 밀집했던 곳이었다. 하필 주일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나가사키의 폭심 반경 500m에, 일본 최대의 천주교회당 우라카미 예배당이 있었다. 하필이면 11시 2분에 폭발했다. 막 주일미사를 시작한 때여서, 2명의 사제와 8만 500명의 신도들이 한순간에 폭살당했다. 마치 개신교 국가 미국이 일본 최대의 천주교 성지이며 천주교인 밀집지역을 의도적으로 골라서, 일본 최대의 천주교회당에서, 미사를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몰살시킨 셈이었다. 우연히 겹치고 겹쳐도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어쩌다 우라카미였을까?
1597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오사카와 교토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을 체포해 800km 떨어진 나가사키로 끌고 와서 처형했다. 이때 일본인을 포함한 26명이 처형됐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쟁취한 뒤, 막부시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금교령과 함께 박해는 더욱 참혹했고 전방위적이었다. 혹독한 박해는 7대에 걸친, 250년 동안 계속됐다. 그런데 이때 생존의 방편으로, 영주들이 십자가를 그려놓고 밟으라고 하면 밟았고, 불상 앞에서 염불을 외우기도 했다. 불상 뒤에 십자가를 숨겨놓고, 불상에 절하며 불교도인 척하는 기독교인들이 생겨났다.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메이지 유신 때에는 나가사키 우라카미 지역에서만 600여 명이 순교했다. 그리고 1878년에, 기독교 금교령이 해제됐고 비로소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다.
‘순교’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혹독한 박해 앞에 신앙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배교한 이들은 초대교회 때에도 있었다. 하지만 박해 당시에도 박해가 지난 뒤에도 ‘배교자’에 대한 시선이 싸늘했고, 배교자들을 다시 교회로 받아들여 형제의 교제를 갖는 것에 대해 강한 반감과 의구심을 가졌고, 교회 안에서 심각하게 논쟁과 분열이 벌어졌다. 이것이 정상이다. 이렇게 해서 교회가 더욱 성숙해진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1세대가 지난 뒤에 그 실상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메이지 유신은 신앙의 자유를 주었지만 국왕을 하늘의 모든 신 위에 군림하는 ‘하늘의 황제’로 숭배하는 ‘신도’(神道)라는, 토착화된 변종불교를 국가종교로 만들었다. 우상숭배를 국민의 도덕이요 애국심으로 만들었다. 일본 천주교도들과 개신교들은 이러한 국가정책을 수용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도 예수님도 일본 왕의 통치를 받는 열등한 신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천황제와 신사참배라는 우상숭배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일본인은 없었다.
일본 기독교인들은 조선 기독교인들이 3·1만세 운동을 벌이고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자 이를 ‘구약적인’ 신앙이라고 조롱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조선이 독립하게 될 때까지는 일제에 순종하는 것이 국민의 도리라고 설파했다. 일제에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며, 일제의 무력탄압과 피흘림은 조선인들의 잘못된 신앙으로 인한, 자업자득이라는 것이 사실상 일본 기독교의 공식 입장이었다. 불법적인 정복과 침탈에 정면으로 항거한 일본 기독교인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섭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