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낙태가 화제다. 낙태가 불법인 대한민국이 낙태율 1위이다. 신생아 수는 40만 명인데, 낙태 수는 110만 건이다. 상황이 이런데 낙태가 합법화되면 하루에 죽는 태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태아는 그냥 핏덩어리나 제거해야 할 암 세포가 아니라 독립적인 생명체다. 이것은 생명과학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태아는 수정 된지 16일 째부터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40일이 지나면 뇌파가 측정된다. 심장이 뛰고 뇌가 살아 있는데 이게 생명이 아니면 무엇이 생명인가. 태아는 단순한 세포, 결정권, 자유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가장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 생명이다. 생명권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요 국가의 책임이다. 그뿐 아니라 낙태를 한 사람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미 모자보건법엔 임산부와 태아를 고려해서 낙태에 대해서 처벌 받지 않는 조항이 많다. 낙태죄는 유지돼야 한다.
태아는 세포가 아니라 아이(child)다
낙태는 가벼운 죄가 아니다. 낙태는 살인이라고 성경은 증거한다. 성경을 추적해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니라.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에게 정혼되었으나 그들이 동거하기 전에 그녀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아이를 가진 것이 발견되었더니”(마1:18).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어떻게 부르시는가? 태아(fetus)라고 부르시는가? 아니다! 마리아의 태속에 있는 그 작은 생명을 하나님께서는 ‘아이’(child)라고 부르신다.
침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사촌이었다. 엘리사벳이 임신한지 6개월 됐을 때, 마리아가 그녀를 방문했다. “그 무렵 마리아가 일어나 급히 산간 지방에 가서 유다의 한 도시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들으매 아기가 태 안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님으로 충만하여”(눅 1:39~41). 여기에서 아기(babe)라 번역된 그리스어는 ‘브레포스’(brephos)이다. 브레포스는 말구유에 있는 아기 예수님을 나타내는데도 사용된다(눅2:12, 16). 또 브레포스는 ‘유아들’(infants)로도 번역되어 있다(눅18:15).
위의 성경 구절들을 통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든, 갓난아이든, 어느 정도 자란 아이든 간에 그것을 표현을 할 때는 같은 단어가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뱁티스트 요한은 자기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기도 전에 이미 성령님으로 충만해 있었다(눅1:15).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 충만은 사람에게만 주신다. 하여 뱃속의 생명은 사람인 것이다. 사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 중 특히 이 문제에 대해 가장 관심이 있었던 사람은 아마 의사인 누가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사 누가의 손을 빌어 아이가 혼을 갖게 되는 시기를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이 세상에 태어나야만 그 아이가 혼을 갖게 되는 걸까? 아니다. 잉태되자마자 그 아이는 혼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욥은 이 사실을 적어 놓았다. 땅에서 자신에게 미친 재앙으로 인해 애통하면서, 그는 자신이 어머니 태속에서 죽었더라면 하고 바란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욥3:11a) 만일 욥이 태속에서 죽을 수 있었다면, 그 전에 태속에서 살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살아있지 않은 것이 어떻게 죽을 수 있겠는가? 살아 있다는 것은 욥이 혼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그 혼이 몸으로부터 떠나는 것임을 미루어 볼 때 이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욥이 태속에 있을 때에도 그는 분명 살아있는 혼(living soul)이었다.
“그들이 벧엘에서 출발하여 길을 가는데 에프랏에 조금 못 미치는 곳에서 라헬이 산고를 치르니 진통이 심하더라. 그녀가 난산할 즈음 산파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두려워 말라 그대가 또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더라. 그녀의 혼이 떠나려 할 때(그녀가 죽을 때) 그녀가 그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비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창 35:16~18). 라헬의 혼이 그녀의 몸을 떠났을 때, 그녀는 죽었다. 그러므로 만일 욥이 자기 어머니의 태속에서 죽었더라면, 태속에 있는 욥은 라헬과 마찬가지로 혼인 것이다.
그런데 욥은 죽음 이후에 자신이 “그곳”에 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 즉, 욥은 자신이 유산되어 죽었더라면, 그가 태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혼이 “그곳”에 가게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욥 3:12~17) 도대체 그곳이 어디인가? 구약 성경에서, 그곳은 스올(Sheol)이라고 알려져 있다. 스올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에 죽은 사람들은 모두 스올에 갔다. 스올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의로운 자들이 가는 낙원(paradise)이 있고 불의한 자들이 들어가는 뜨거운 불꽃 부분이 있다(눅16:19-31, 눅23:43). 만일 욥이 유산되어 죽었더라면, 그는 아브라함이 있는 낙원으로 갔을 것이다.(창 25:8).
태아는 혼(soul)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는 모든 구원받은 이들과, 거짓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 나이에 죽은 아이들은 모두 곧바로 하늘로 간다(마27:52, 53, 엡4:8~10, 고후12:2~4, 행7:54~60). 침례신문 시론, ‘어린 아이가 죽으면 지옥 가는가’를 참고하라. 자, 이제 다윗 왕이 자신의 어머니의 태에서 자신의 몸이 형성된 것에 대해 무어라 기록하고 있는가 살펴보자. “주께서 나의 장부를 소유하셨고 내 어머니의 태에서 나를 덮으셨나이다.”(시 139:13). 창세기 2:7에 따라, 이 구절에서 언급된 “나”(me)는 다윗의 혼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진짜 사람은 “몸”(body)이 아니고 “혼”(soul)이라는 사실이다. 몸은 단지 혼이 들어가 거주하는 집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몸으로 덮여진 “나”(me)는 바로 다윗의 혼이다. 만일 다윗이 어머니의 태 안에서 죽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스올(낙원)에서 몸을 주셨을 것이다.
“내가 주를 찬양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경외롭고 놀라움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가운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가장 낮은 곳에서 오묘하게 지음을 받은 때 나의 형제(육체적인 몸)가 주로부터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몸)이 완성되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의 모든 지체가 계속 형성되어지는 중에 곧 아직 그들이 하나도 있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나이다.”(시 139:14~16). 얼마나 명백한가? 잉태되자마자 다윗의 혼은 존재했다.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살아있는 혼이었다. 그 다음 하나님은 임신 기간 동안 계속해서 그 혼을 몸으로 덮어 주셨다 다시 말해서 몸이 자라난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2900년 전에 성령님께서 다윗을 인도하시어 이 구절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과학자들은 이제야 비로소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한다. 1968년판 브리태니커(대영) 백과사전에는 방금 잉태된 아이는 완전한 존재로서 단지 몸이 자라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 해줬다. “사람의 조직 세포 핵 안에는 46개의 염색체가 있다. 그 세포의 염색체 중 23개는 아버지에게서 오며 나머지 23개는 어머니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세포의 1/2씩을 제공하는 것이다. 잉태 시에, 이들이 결합하여 46개의 염색체를 갖는 하나의 새로운 세포를 형성한다. 이러한 수정란은 더 이상 아버지나 어머니의 일부가 아니며 새로운 인간의 첫 번째 세포인 것이다.”
그 아기를 혼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그 아기의 폐 속에 있는 공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존재이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곧 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레위기 17:11에서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에서 생명(life)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혼(soul)으로도 번역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혼이 피 안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방금 잉태된 아기는 자신의 피 안에 이미 46개의 염색체를 갖고 있으므로, 그는 혼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낙태는 살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엄마가 아이를 유산하면, 그 아이는 곧장 하늘로 간다.” 이것은 낙태된 아이인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출애굽기 20:13에서, 하나님께서는 “죽이지 말라”(Thou shall not kill)고 말씀하시는데,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히브리어에서 번역하면 “살인하지 말라”(Thou shall not murder)가 된다. 하나님 말씀에 따르면 “murder”라는 단어는 사람을 죽이는 경우에만 사용된다. “사람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람에 의해서 자기의 피도 흘리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라”(창 9:6).
그러므로 잡초를 죽이는 것(kill)은 살인(murder)이 아니다. 식물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니다. 물론 벌레를 죽이는 것도, 동물을 죽이는 것도 살인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명백한 살인(murder)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경우에만 피에 대해 피를 요구하신다. “사람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람에 의해서 자기의 피도 흘리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라”(창 9:6).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출 20장)을 알고 있다. 바로 그 다음 장에서 우리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명을 취하는 것이 바로 살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만일 남자들이 싸우다가 아이 가진 한 여자를 다치게 하면 그녀의 열매가 그녀에게서 나올 때 아무런 피해가 따르지 않았어도 그는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하리니 그 여자의 남편이 그에게 부과한 것에 따르고 재판관들의 판결하는 대로 지불할 것이니라. 그리고 만일 어떤 피해가 따르면 그때 너는 생명에 대하여 생명을 주어야 할 것이요”(출 21:22,23)
출산이 가까운 산모가 상처를 받으면 종종 미숙아가 태어난다. 경우에 따라 그 아이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 바로 위의 성경 구절에서, 어떤 해 (또는 재해)가 따르지 않으면, 해를 가한 사람은 화가 난 그 여자의 남편으로부터 해를 받는 것을 감수해야 하며 재판관이 결정하는 대로 재정적인 벌금을 내야 한다(산모가 다쳤기 때문에). 다시 말해 미숙아가 태어났더라도, 어머니와 아이가 살아있다면, 해를 가한 사람은 단지 육체적 및 재정적 벌만을 받게 된다.
그러나 만일에 어떤 해(재해)가 따른다면 (즉, 유산이 되어 아기나 엄마가 죽게 된다면), 해를 가한 사람은 생명에 대하여 생명을 줘야만 한다. 왜냐하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 아기의 생명은 어머니의 생명만큼이나, 아니 해를 가한 사람의 생명만큼이나 귀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오늘날 큰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낙태에 관한 의문점들이 모두 해소되고 만다. 낙태가 살인이 되지 않은 경우는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행해지는 것뿐이다. 그 외의 모든 낙태는 살인이다.
사람의 생각과 문화를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낙태에 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