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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살리고 시대를 살린 것은

계인철 목사
광천중앙교회

로마 멸망의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양한 이유들을 제시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설, 쾌락의 대명사인 혼욕으로 문란한 성적 향락을 제공한 목욕탕 설, 납 성분의 수도관 구축으로 인한 납중독 설 그리고 극단적인 타락설 등을 말하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나카가와 요시타카의 ‘빵과 서커스(Bread and Circuses)’의 역자 임해성이 ‘이 책을 읽기 전에’를 통해 언급한 대로 로마의 멸망 원인이 꼭 그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미 앞서 언급한 것들은 로마 초기부터 있어 왔던 문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쇠락은 제국의 거대한 규모가 가져온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결과였다.  번영은 부패를 촉진한다. 정복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파멸의 압력은 늘어간다.”는 임해성의 로마 멸망 진단에 수긍을 하게 된다. 고작해야 9m 앞 밖에 볼 수 없는 코뿔소가 앞을 향해 돌진하듯이 7~80년대 한국교회는 오직 부흥이라는 대명제 아래 코뿔소처럼 눈앞만 보고 돌진하듯 달렸다.


그 결과 제2의 예루살렘이라는 세계의 찬사를 들으며 부러움의 영적 대국이 됐고, 로마가 정복전쟁을 벌이듯이 한국 기독교는 서로 앞다퉈 전 세계로 선교전쟁을 시작하여 미국 다음 가는 선교대국이 됐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자타가 공인하는 영적강국(?)이 되어 영적 대 부흥을 꿈꾸는 이들의 거룩한 순례국이 됐다. 가장 거대했던 공룡 아르젠티노사우루스 같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공룡 같은 교회들, 이름만으로도 영적 대부 같은 이들이 넘쳐나는 한국으로 몰려들었다.


한국은 교회 부흥과 성장이라는 상품을 판매하는 관광국이 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부흥과 성장이라는 관광 상품을 멋지게 포장하여 판매했다. 어디 그뿐인가? 교회마다 폭죽을 터뜨렸고 그때마다 질러대는 거룩한 탄성(?)들이 교회 밖 세상에까지 크게 들렸다. 말 그대로 부흥의 큰 물결이 한국교회의 얼굴이고 언어였다.
이런 교회는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하고 단단한 나라가 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기에 반성도 후회도 아쉬움도 뒤를 돌아봄도 필요가 없었다. 오직 앞으로만 전진하면 됐다. 하나님은 그의 곡간에서 부흥과 성장을 한국교회에 계속 넘치도록 쏟아 부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과 은사를 받은 목사를 따라 가기만 하면 교회처럼 자신의 삶도 부흥(富興)할 것이라 믿었고 그런 한국교회와 복주머니를 허리에 찬 성도, 즉 나는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목사의 능력으로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는 광경은 그 뒤를 쫓는 젊은 목사들이나 그 아래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에게는 지극히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이고 성경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성령의 역사로 간주된 종교적 흥분은 마약이나 다름없었다. 성령은 흥분제였고 인격 마취제였다. 목사는 신의 대리자로 그 앞에 절대 순종만 요구됐다.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은 로또 판매장이었다. 성도들은 로또의 당첨을 꿈꾸며 강단의 말씀을 자기 뜻대로 해석했고 자기 입맛에 맞는 말씀만을 골라 먹으며 자아(自我)의 포만감에 취했다. 목이 터져라 ‘주여’를 외치며 말씀이 자기 입맛에 꿀송이 같이 넣어주는 목사들이 있는 곳을 향하여 경쟁적으로 몰려갔다. 심한 갈증의 목마름, 배가 등에 붙은 굶주림으로 사나워진 들짐승들처럼 우르르 소문난 목사들을 찾아가서 신처럼 떠받들며 맹신자들이 됐다.


그들은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중세 성직자가 초서에게 들려준 꿀팁처럼 헌금 액수가 축복의 분량이라며 ‘기승전 헌금’은 ‘기승전 축복’이라고 달콤한 설교에 모든 것을 다 뜯겼다. 이렇게 교회는 어느새 서로에게서 오직 득을 얻고자 하는 모리배들의 거룩으로 위장된 난장판이나 다름없이 되어왔다.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신앙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거룩한 일에 쓰임 받는 교회와 성도가 왜 이렇게 갈 데까지 갔는가? 교회의 리더십이 그 중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그랬다. 교회의 구조가 담임목사에게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리더십의 종류들도 대부분 목사의 리더십과 연관된 것들이었다. 교회의 부흥은 목사의 리더십이 어떠하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르쳤고, 배웠고, 믿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교회의 주인은 언제부턴가 담임목사가 됐다. 진정한 교회의 주인 예수는 벽에 걸린 십자가처럼 벽걸이 장식으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책장의 장식으로 의미 없는 존재가 됐다. 그리고 새로운 주인 목사가 필요할 때마다 부르고 꺼내 쓰는 예수와 성경, 즉 말씀이 됐다.


모두는 아니지만 일부 새로운 교회 권력자가 된 담임목사는 자신이 원하며 목적한 구절들만 골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진리로 포장하여 팬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마크 뷰캐넌이 ‘우발과 패턴’에서 “역사를 쓰는 것은 대양을 마시고 한 잔의 오줌을 싸는 것과 같다.”는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그 말을 빌려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대양과 같은데 오늘 강단에 선 목사들은 자신들의 뜻에 맞는 구절들만을 골라 이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외쳐댄다. 그러는 사이 스타와 팬들은 공룡 같은 매머드(mammoth)를 탄생시켰다. 이것은 정의와 진리, 은혜와 능력으로 평가됐다. 그러다 보니 그 거대한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담임목사의 소유가 되어 세상도 웃는 코미디 아닌 코미디 집단이 됐다.


오늘 굳이 교회 안티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세상의 사람들도 교회에서 더 이상 희망의 촛불을 얻고자 하지 않는다. 리더십의 주체가 된 목사들에 의해 자행되어지는 각종의 추문(醜聞)들이 제공한 메뉴들은 차라리 촛불 없이 어둠에서 살겠다고 등을 돌리게 했다. 목사의 리더십은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필요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그 리더십을 내려놓았으면 한다. 더디 가더라도 원하는 만큼의 성장과 부흥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성경, 즉 본질을 따라 바른 방향으로 걸어갔으면 한다. 물론 그 길은 많은 인내를 요구하며 각종의 고난, 고통도 감당해야 하는 힘겨운 여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길에, 나를 비워 낸 그 길에, 언제나 약속하신 교회의 참된 주인이시고 나의 진정한 주인이신 임마누엘 주님이 함께 하신다. 그리고 그 길에서 진정한 승리를 이루는 교회와 목양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인 목사의 리더십이 아닌 진리인 예수와 그 말씀의 리더십으로 목양을 해야 한다.


목사는 치리자라기 보다는 본을 보이며 목자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목사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며 군림하며 강요하는 자도 아니다. 채찍이 아닌 지팡이를 들고 목자의 삶을 그냥 사는 존재다. 목사가 아닌 말씀 그 자체로 목양의 리더십이 발휘되도록 해야 한다. 말씀을 살고 말씀을 스스로 먹고 입으며 말씀을 말씀으로만 전하는 목양과 교회여야 하고, 자기 생각의 틀 안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말씀만을 듣고자 하고, 자기만족을 줄 수 있는 말씀만을 찾아 목사를 순례하는 성도가 되기보다는 오직 말씀 그 자체에 자신을 담고, 그 말씀으로 자신을 허물고 비우고 말씀으로 새롭게 되는 전인격을 이루는 성도가 돼야 한다.


교회는 말씀의 리더십이 이끌어가는 진정한 말씀 공동체와 구성원이 돼야 한다. 말씀을 버리면, 중세교회의 성직자와 성도들처럼 흑암의 깊음에 빠진다. 중세는 말씀 없이 오직 성직자들만 넘쳤다. 그런 중세라는 거대한 성을 허문 것은 다름 아닌 말씀이었다. 오직 말씀이 교회를 살렸고 시대를 살렸다. 중세의 첫 개혁의 촛불을 밝혔던 11세기의 페트루스 다미아니(Petrus Damiani)가 외쳤던 ‘복음’을 16세기 루터가 말씀 안으로 들어갔다가 그보다 좀 더 큰 횃불로 들고 대중 앞에 섰던 것처럼, 우리는 다시 복음, 즉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 말씀의 등대로 세상의 험한 바다를 비추며 주님의 항구로 인도해야 한다.


페트루스 다미아니(Petrus Damiani)의 “이 죄악을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복음으로만 가능합니다.”(중세교회의 뒷골목 풍경, 박양규)의 말은 오늘 우리의 심장으로 파고드는 성령의 외침이다. 이제 변질된 부흥과 성장의 주체였던 목사는 죽고 진정한 심령의 부흥과 성장을 이루는 말씀을 살리자. 그래야 모두가 참 생명을 산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죽음의 여신이 당신의 문을 노크하는 날 당신은 그가 내민 광주리에 무엇을 담아드리겠습니까?”라고 외친 그날이 왔을 때,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에서 읽을 수 있었던 “아시리아가 승전을 거듭하는데 본국은 망해 갔다. 그래서 전쟁에 이겨서 돌아가려고 하니까 돌아갈 조국이 없더라는 겁니다.”라는 이야기가 내 이야기, 우리 목회와 교회의 이야기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목사는 몽크(monk)가 될 수 없을까라는 고민 속에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고 읊조렸던 어느 목사의 절절함이 오늘 나의 절절함이 되었으면 좋겠다. 목사가 죽어 말씀이 다시 사는 교회와 목양 그리고 신앙과 삶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며, 그 자체가 참된 부흥이고 성장이다. 세상의 기준에는 한 없이 미달될지라도 내 주님께는 그렇다. 주님은 그것을 원하신다. 지금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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