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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욕, 그 치명적인 바이러스

조대식 목사
신태인교회

절대적 지도력을 행사했던 모세가 죽은 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가 가나안 입국과 정착을 하는데 첫 번째 관문이었던 여리고 전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큰 전투였고 사건이었다.
그 여리고 전투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돌고 또 도는 칠일간의 워킹 후에 제사장의 나팔 소리를 신호로 온 백성의 함성으로 그 성이 무너졌다는 기적이다.


그런데 여리고 전투에서 그것과 양극적으로 비교되는 또 다른 사건이 바로 아이성 패배의 사건이며, 이 패배의 원인이 바로 ‘아간’ ([עָכָן] 아칸-Akan 은 ‘괴롭히는 자, 근심이나 두통거리’를 의미한다).이라는 한 사람이 탐욕으로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50세겔 되는 금덩이를 탐내어 자기의 소유로 감춘 것이었다.


이 아간의 사건은 그가 감춘 금, 은 시세의 가치나 아간의 목숨에 관한 문제보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완수해야 할 소명과 존재감이 개인의 사사로운 탐욕으로 인하여 좌절될 수 있다는 자각과 여운을 남긴다. 동시에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호흡처럼 붙어 다니는 소유욕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큰 재앙과 불행을 불러오는지를 성경은 각혈하듯이 호소한다.


독일 문학에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하인리히 빌’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소설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당시 사회의 양극적인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소설에 서른여덟 살인 ‘캐테’라는 여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자신에게 피부처럼 밀착되어있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남편마저 이 삶의 짐을 포기하고 가족을 버리고 가출하였고, 그 잔인한 가난의 피해자인 세 아이의 엄마로 하루하루의 생을 전쟁보다 더 치열하게 연명하고 있었다.


이런 그녀를 불쌍히 여겨 독실한 기독교인인 ‘후랑케’라는 60대 부인이 자기 집 부엌방에 살게 하여 얹혀 살고 있었다. ‘캐테’의 남편 ‘후레드’가 집을 나간 것은 아이들이 집안에서 노래를 불러 ‘후랑케’부인을 화나게 한 일로 자신의 아이들을 때린 것을 비관하여 집을 나갔고, 이 가련한 젊은 부부는 한 달에 한 번씩 밖에 있는 싸구려 여인숙에서 만나 부부의 정을 이어 간다.


이 불우한 ‘캐테’에게 방을 내어준 ‘후랑케’ 부인은 교회에서도 세력이 대단한 여자로 요즘으로 말하면 교회 일을 좌지우지하는 권사로서 ‘웃음’ 빼고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자였다. 그런데 이 ‘후랑케’ 부인은 손에 돈뭉치를 들고 그 지폐를 셀 때와 자기 집의 지하실에 보관하고 있는 300개의 과일잼 병을 셀 때는 얼굴에 웃음이 만연해지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이 가난하고 가련한 젊은 부부의 처절한 삶의 무게와, 기독교인으로서 이들에게 최소한의 사랑을 실천하느라 거처를 제공해주고 기독교인의 선행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하며 돈과 과일잼으로 인하여 삶의 보람과 즐거움으로 삼고 있는 ‘후랑케’부인의 모습을 비교해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는 또 이 두 양극적인 사람들의 신앙의 내면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 있다. 남편과 만나는 불결한 여인숙 방 벽에 기대서서 ‘캐테’는 가난으로 좌절과 실의에 변색 된 남편의 잿빛 얼굴을 보며, “당신은 왜 기도마저 하지 않는 거예요? 기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왜 믿지 않는 거예요?”라며 투정한다.


이 아내의 말에 남편 ‘후레드’는 “주님은 내게서 너무 멀리 계셔!”라고 냉소적인 한 마디를 내뱉는다.
반면에 ‘후랑케’부인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먼지처럼 가난을 마시며 살고 있는데도 비싼 과일로 300개의 잼을 만들어 지하실에 보관해가며 그것으로 삶의 희열을 느끼며 또 어떤 과일로 새로운 301개의 과일잼을 만들까를 생각하며 자신의 기뻐하는 소유를 더하려고 기도하는 이런 기독교인을 생각하면 왠지 마음이 답답해 온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나 그 시대를 투영하는 소설이 우리로 하여금 시대를 읽고 자신을 보며 깨닫게 하는 것도, 탐욕이나 소유욕이 하나님의 사람을 저주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 바이러스이며, 인간의 본성과 가치를 왜곡되게 하는 질병의 근원임은 분명하다.


결국 이 시대는 성경의 ‘아간’과 같이 개인의 탐욕을 위하여 거룩한 공동체의 사명과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하고 저버리는 불행을 향한 질주의 현장이며, 형식적인 신앙으로 자기중심적인 소유욕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신앙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종교인들의 축제의 무대가 되고 있지 않는가?


더욱 두려운 것은 이러한 탐욕과 소유욕 과시의 축제 현장 생중계 방송에 교회가 카메라에 비치고, 목회자들이 비친다는 점이다. 신앙의 목적이나 충성의 목적이 오직 축복이나 형통이나 성공을 위하는 기복에 두는 사상과 가르침, 자신의 사리사욕과 노후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거룩한 소명과 자기부정의 희생을 외면하고 현실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목회자의 주장들과 자기 합리화는 당장에는 반신반의 하는 애매한 논쟁거리이지만 분명 미래의 교회와 신앙을 병들게 하여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바이러스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소유욕의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부르심을 받은 소명에 진지하게 서서 지금 참전한 이 전투가 외투나 은금을 위한 것이 아님을 냉정하게 성찰하는 면역성을 키우는 것이 아닐까?
이 세상에서 내가 소유할 아간의 은금보다 후랑케 부인의 과일잼보다 주님의 심판대에 설 때 적어도 책망을 면하는 내 모습을 기대하며 좀 더 나의 것이라는 소유를 포기하고, 좀 더 바보스러운 모습을 수용하는 원색적인 영적 소망의 예방접종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주의 종들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 치명적인 소유욕의 바이러스는, 젊고 의욕적으로 일할 때보다 일생을 마무리할 때와 목회를 마무리할 때 더욱 왕성하게 감염시킨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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