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내일을 만나자

계인철 목사
광천중앙교회

지난 4월부터 시작된 홍콩시민들의 우산시위가 수개월째 계속 되고 있다. 며칠 전에는 거리에 설치된 스마트 가로등 20여 개를 시위대들이 쓰러뜨렸다. 그런데 그 이유가 간단치 않다. 최첨단 카메라와 감지기를 갖춘 스마트 가로등이 개인의 사생활 침해는 물론 안면 인식 기능으로 시위대를 감시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이렇듯 요즘 스마트 가로등은 어두운 거리를 밝혀 주는 편리함을 넘어 날씨, 교통정보수집 등 다양한 기능들을 가진 도구로 진화했다. 아날로그 시대의 단순한 기능만을 반복하던 생활도구들이 디지털 시대로 진입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기능들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렇게 4차 혁명시대, 즉 AI 인공지능 시대인 현대는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의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인간의 역할을 조금씩 대체하고 있는 로봇들은 진화의 진화를 하면서 반려로봇의 시대를 거쳐 다양한 분야에서 사람을 흥분시키고 있다.


미래학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 첨단화 되고 인간화 될 인공지능으로 인하여 수 백 만개의 직업들이 오래지 않아 사라질 것이라고 밝힌다. 이미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 친숙해진 다양한 사물 인터넷, 딥러닝(Deep Learning), 온전한 구조의 심장까지 만드는 3D 프린터 등을 비롯해 AI인공지능의 작품들이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지만, 결국에는 인간의 통제를 넘어 군림하게 될 것을 예상하게 한다.


아무튼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생각보다 아주 빠른 속도로 내 삶 속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들은 미래가 아닌 과거에 갇히거나 집착하고 있는 듯하다. 과거청산이라는 그럴듯한 명분과 개혁이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과거를 적폐로 몰아 정죄하며 괴력을 휘두른다.


미래를 위해 과거를 정리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거나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나치게 지나간 일들과 사람들에게 집착해 주어진 힘을 그릇되게 낭비함으로 미래를 향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잘못됨은 당연히 고쳐야 한다.


틀린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하지만 정의를 행한다는 자기명분과 확신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몰입하다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를 내면서 우리의 현재로 다가오는 미래의 벗이 아닌 밥이 될 수 있음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거대한 미래와 맞서기 위해서 우리의 과거를 잠시 접어 두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최건석이 “우리는 왜 과거에 갇히는가?”에서 말한 대로 과거로 미래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과거를 연료로 사용하는 지혜자가 돼야 한다.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지식, 상식, 풍습, 문화, 심지어 종교로도 상대하거나 대적할 수 있는 만만한 존재가 결코 아니다. 인간이 과거와는 달리 마음대로 주도할 수 없는 미래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상상을 초월하는 미래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신의 존재마저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의 말처럼, 지금 우리는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 새롭게 도전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과거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미래를 향한 비전을 새롭게 품어야 한다.


더 이상 개인적이든 공적이든 현재를 과거 것으로 물들이지 말고 미래에 대한 비전과 다가올 미래의 현실들을 맞이할 수 있는 내외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 물론 지나치게 미래에 집착하는 것만도 옳지는 않다. 하지만 시공간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미래 앞에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가능한 빨리 과거에서 미래로 눈을 돌려 집중해야 한다.


그동안 대한민국과 기독교단들은 미래보다는 과거의 것들을 위해 금보다 더 귀한 시간과 에너지들을 대부분을 사용한 듯하다. 미래를 준비한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외쳤기에 기대한 바가 컸으나 결코 만족스럽지 않다. 그래서 기대는 실망으로, 협력하며 공생해야 할 관계들은 서로 대적하며 싸움 아닌 싸움을 벌이는 오늘의 현실을 본다.


누구의 잘하고 못함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실재의 삶과 교회와 목회를 크게 위협하게 될 미래의 현재로를 향한 도전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손을 잡고 맞서며 미래의 종이 아닌 주인이 되자는 것이다.
이제라도 이 나라와 우리의 공동체가 서로를 향한 총질을 멈추고 내일을 만나기 위해 서로 다른 방향이 아닌 같은 방향을 보아야 한다. 특히 교회와 목회가 만날 내일을 위해서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


미래학자 최윤식은 창41장의 ‘7년 풍년과 7년 흉년’의 실현 가능성을 말하며, 2050년경에는 현재의 성도수가 3~400만 명으로 줄어들 확률이 높다면서, 교회의 재정은 이보다 더 빠른 2028년쯤에 반 토막이 날 것이라고 하면서 그는 목회와 선교의 엔진도 함께 꺼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 아닌 예언을 했다.


이같이 교회의 미래는 불안을 넘어 두려움 그 자체다. 그러기에 우리는 과거의 것에 매여 현재를 소비하며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여서는 안 된다.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의 “용서 없이 미래 없다”는 말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의 음성으로 듣고 잘못된 과거는 철저히 회개하고, 이제는 과거를 용서함으로 미래로 나아가 우리에게 주어진 내일의 사명을 더 뜨겁게 감당해야만 한다.


지금 우리는 내일에 대한 비전을 다시 강렬하게 품고 열망할 시간이다.
켄 블렌차드의 “비전으로 가슴을 뛰게 하라”는 저서의 같은 제목대로 다시 확신에 찬 미래의 비전으로 가슴을 흥분시켜야 한다. 더 이상 무력하고 무능해 절망하는 미래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과거에 대한 용서와 미래에 대한 비전과 기도로 다시 주님 앞에 서야 한다.


내일이 광속같이 다가오고 있다. 미래는 시간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이 시간의 주체가 되려한다. 더 이상 5G폰을 들고 80대 초반의 사고 패러다임으로 살거나 그리워해서도 안 된다. 미래는 더 이상 기적이 아니다. 현실이다. 과감히 과거를 벗어 던지고 미래를 입어야 한다.


주님은 미래의 주인이시다. 내일의 주인 되신 주님이 우리에게 내일을 만나라고 명령하신다. 더 이상 과거의 종이 되지 말고 미래의 주역이 되라고 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과거로부터 일어나서 내일, 즉 미래의 주인이신 주님과 함께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미래라는 놀라운 경험을 기대하며 내일로 향해야 한다.


“인생은 되돌아볼 때만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앞을 보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반추하면서. 지금 즉시.



총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