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말씀으로 역사하는 침례교회(딤후 3:14~17)

라이즈 업 뱁티스트 설교 – 김선배 총장(한국침례신학대학교)

 

지금 우리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습 니다. 이 온라인 예배도 하나의 변화죠.

전국의 모든 교회들이 참여해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큰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성경 속에서도 여러 시대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출애굽 사건도 커다란 변화죠.

 

스데반 사건도 마찬가집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도 마찬가지죠. 이러한 변화를 통해서 우리는 또 다른 걸음을 걸어갈 때에 주님께서 새로운 도약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어지는 상황마다 어떻게 대응하고 대비해야 할 것인가 고민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 가지겠죠. 이 온라인 예배드릴 때 지금 얼마나 당혹했습니까?

 

그런데 기독교는 시대의 상황을 해석해 가면서 적응하는 놀라운 잠재력이 있습니다.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죠. 누가복음서는 시대적인 상황, 역사를 해석해 나가면서 주님의 놀라운 행적을 기록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역사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합니다. 오늘의 현실이 불안하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를 통해서 오늘을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관은 이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미래가 확실 합니다. 확정된 미래를 통해서 불확실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먼 훗날에 주님이 반드시 다시 오실 줄로 믿습니다.

 

기독교는 승리의 역사로 끝날 줄로 믿습니다. 이것만큼 분명한 것이 어딨습니까? 확정된 미래, 확실한 미래를 가지고 오늘 우리 현실이 어떻게 변화무쌍하게 변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승리의 발걸음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다가 스데반의 순교해서 당황하게 됩니다. 돌에 맞아 죽지요. 그런데 사도행전 전체 역사를 보면 스데반의 사건은 축복입니다. 어떻게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 축복입니까? 사도행전 전체를 보면 스데반의 사건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저자가 이것에 의도했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는 자신들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예수를 믿는데 유대교의 한 분파인지, 한 지류인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어도 성전에 출입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이냐? 사도행전 기자는 바로 스데반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인지 가르쳐 줍니다. 돌에 맞아 죽은 순교의 사건이 어떻게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줍니까? 그때 재미있는 내용이 나오죠.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 성령 충만하다가 나옵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까 열린 하늘에 서 계신 예수를 바라봅 니다. 하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께서 벌떡 일어나서 스데반을 맞이합니다. 서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 돌을 든 유대인. 그래서 그때 비로소 기독교는 성령과 더불어 기독교가 됐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뿔뿔이 흩어지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었는데 그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가 전 세계에 퍼져 나가는 동기가 됐던 것입니다. 이 코로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예측하고 있지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시대를 해석 합니다. 이제는 집단 영성에서 개인의 영성으로 강화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봅니다.

 

집단의 영성에서 개인의 영성으로 우리 열심히 모였습니다. 왜 모입니까? 흩어지기 위해서인 줄로 믿습니다. 모이는 강렬한 힘만큼, 강렬한 힘으로 흩어지는 것이 바로 침례교 정신입니다. 개인의 영성, 집단일 때 우리가 뜨겁게 기도합니다. 말씀도 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합니다. 이 모임 이후에 직장에서 정계에서 경제계에서 학교에서 개인의 삶, 일가 친척 만날 때 그 집단의 영성이 개인의 영성으로 바뀌어서 여러분이 속한 모든 영역을 바꿔야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차별 금지법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픕니까.

 

겉은 화려하지만 그 법 속에 또 다른 차별이 담겨져 있습니다. 교회가 나서기도 해야 하지만 이제는 교인 한 명한 명이 나서야만 될 줄로 믿습니다. 자기 삶의 처소에서, 자기 일터에서, 정치 하는 정치 현장에서, 경제인은 경제 현장에서, 선생님들은 자기 삶의 현장에서 복음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개인의 영성이 이 시대에 나와야만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은 십자군의 전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카타콤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 이를 통해서 이코로나 시대에 다시 한 번 침례교의 계절이 올 줄로 믿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답답해하는데 그래도 길에 나가면 차가 굉장히 많습니다. 저도 오늘 대전에서 오는데 경부선이 얼마나 막히는지 우리나라 도로가 참 발달해 있죠. 전국을 연결합니다.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정보와 정보를 전달합니다.

이러한 도로가 우리나라 전체를 연결 하듯이 성경 66권 전체를 연결하는 중요한 개념이 무엇일까요?

 

성경 전체를 이어주는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시간이란 개념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목 요연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누가 천지를 창조하십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천지 창조부터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시간이 흐르는 것입니다. 신구약 66권을 시간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가 그 땅 위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땅에 살아야만 됩니까? 새하늘과 새 땅. 그때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속히 오리라” 지치지 아니하고 속히 오리라.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분명한 말씀은 “속히 오리라” 이와 함께 100년 뒤에 200년 뒤에 오신다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께서 속히 오실 줄로 믿습니다. 하루가 1000년 같고, 1000년이 하루 같은 주님이시지만 천지 창조의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시간이 흐르면서 그 흐름 속에 사건과 인물들을 배열하고 있는 것이 66권입니다.

 

비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두 기둥이 견고하게 서 있는데 그 가운데 줄을 팽팽하게 연결합니다. 사람이 그 줄 위에서 온갖 묘기를 부립니다. 이것이 신구약 66권에 나오는 사건과 인물들의 행적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기대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 천지 창조의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자리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천지 창조의 축복이 아닙니까? 창세 기부터 계시록까지 지금은 심판의 판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장을 우리가 묵시문학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종말에 관한 내용이 나오죠. 근데 재미있는 것은 예루살렘이 파괴되는 장면입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 이루어졌죠.

 

이 말씀을 하신 대략 40년 후에 실제 예루살렘이 파괴됐습니다. 이미 종말은 시작됐습니다. 큰 판이 움직인다는 말이죠. 우리는 이 정신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면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지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해서 오시는 예수님, 이 구조 속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 구조 속에서 우리 삶이 규정되고 우리의 삶이 정해지고 우리 인생의 가치가 평가되고 판단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 인물 가운데 바울이 있지요.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정신의 투철했습니다. 대단한 인물이죠. 디모데후서 4장 7절과 8절, 보니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나니”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이제 그 인생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 게도니라” 흔히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유언과 같죠. 사도 바울, 복음의 사명을 마지막까지 다 했던 사람. 그런데 사도 바울만큼 고난당한 사람이 어딨습니까?

 

가끔 신학대학원에서 대학 면접을 할 때 “나는 바울처럼 살기를 원합니 다”라고 할 때 가슴이 철렁해요. ‘아 큰일 났구나. 앞에 어떤 고난이 놓여져 있는 줄 알고 저렇게 고백을 하는가.’ 고린도전서 11장 23절 47절에 보니까 그의 고난이 어마어마하게 나옵니다.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씩 맞습니다. 39대씩 이 구절을 읽어보면 눈물이 납니다.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의 개인 간증문입니다. 눈물없이 읽을 수 없는 편지, 그의 고난과 역경,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인생을 돌아보 면서 그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에게 편지하면서 “내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아느냐?” “내가 보릿고개를 넘었다” “고 난당했다” 이런 말 대신에 그는 바로 디모데후서 3장을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그는 깨달았습니다.

 

바울만큼 많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만큼 삼층천에 올라가서 신비로운 체험을 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모든 것을 다 경험한 사도 바울이 마지막 순간에 기록한 것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 침례교는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것에 알파와 오메 가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을 하고 있지요. 성경이 바로 그런 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변화하지 않지만 전달 방법은 무수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예배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희 대학에서도 작년에 3월 개강하는 데 한 주간 연기하는 것도 굉장히 많은 회의를 했습니다. 사상 초유의 일이죠. 어떻게 한 주 개강을 연기하느냐? 그런데 2주 연기를 했습니다. 한 달 연기했습니다. 수많은 회의를 했습니다. 중간고사까지만, 이번 학기만, 그러다가 1년 동안 비대면 수업을 했습니다.

 

전달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죠. 우리 상식을 초월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발생하면서 복음의 본질은 변화하지 않지만, 그러나 전달 도구는 무수히 바뀌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이 있었습니다. 지금 어떤 다락방이 나옵니까? 사이버 다락 방, 줌 다락방, 유튜버 다락방, 이제 한자리에 모이는 방법이 굉장히 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우리만 겪었던 것이 아닙니다.

 

신약시대의 변화는 지금의 변화와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됩니다. 온라인 예배에 비대면 수업, 우린 충격으로 받아들였지만 성경에 기록된 배경, 지금 성경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은 우리가 평면적으로 바라보지만 그 속을 파고들어 보면 어마어마 입체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가 그 당시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면 충격 때문에 매일매일 놀랄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보면 매우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하고 옛날 고전처럼 보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최첨단 변화를 수용한 전달 방법이 녹아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개역개정판은 참 어투가 좋은데요. 전에 개역한글을 보면 “할지니라” “가라사대” 따분한 것처럼 보였죠. 그런데 신약성경의 언어는 고전적인 언어가 아닙니다. 그냥 저잣거리 시장에서 사용되는 그런 코인의 헬라어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 신약성경이 기록될 때도 혼란이 있었습니다. 충격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한 이후에 세계화 바람이 불었습니다.

 

우리가 세계화라는 말에 지금은 익숙하지만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세계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말하는 세계화는 헬라 문화를 도입시키는 것입니다. 드디어 헬라 문화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왔습니다. 지식층부터 헬라 문화를 도입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헬라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저항 세력이 나옵니다. 이른바 하시딤들이 격렬하게 저항합니다.

 

그들과 또 다른 헬라화에 반대했던 분리된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헬라화를 반대한다” “헬라화는 잘못된 것이다” “율법대로 살아야 된다” 분리된 자, 이것이 바로 바리새파란 뜻입니다. 신약 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됐죠. 아이러니 아닙니까? 로마 도로를 통해서 전파됐습니다.

 

지금 인터넷 도구처럼 로마 도로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사상과 철학을 이용 했습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이방 문화적인 요소였는데도 불구하고 복음의 전달 도구로 사용됐다는 사실 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동물을 우상 으로 숭배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사람을 우상으로 숭배했습니다.

 

로마는 굉장히 관용적이었기 때문에이 두 가지를 다 숭배했습니다. 동물도 숭배하고 사람도 숭배하고 모든 신들을 다 숭배했습니다. 바로 요즘 말하는 종교 다원주의죠. 그들에게 유일한 신을 섬긴다는 것은 무신론을 의미했습니다. 반지성적인 물결이었습니다. 그럴 때 복음이 전파될 때 얼마나 치열했겠습니까? 그 장벽을 뚫어야만 했습니다. 이 코로나 시대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도록 모든 것을 변화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이 그러하듯이 이 시대도 그런 지혜와 통찰과 명철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십자 가입니다. 로마서 10장 4절을 보니까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에 마침이 되시니라” 고 말합니다. 율법의 완성입니다. 신약 성경은 구약의 개정판이 아닙니다. 구약 플러스 하나가 아니라 이제는 사명이 다 했다.

구원의 수단으로 쓸 법은 끝났고 이제는 새로운 도구가 출연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바로 로마서 10장 4절에서 “율법이 마침이 되었다”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반드시 예수의 피를 통해서 봐야만 하는 것이지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가장 원색적인 복음 선포입니다. 그런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신 사건이 선포가 되면서 사복음서가 출연했습니다.

 

한결같이 동일한 예수그리스도가 그 리스도이심을 선포하지만 각자 관점이 다릅니다. 얼마나 정교하고 세밀하게 복음을 전파했는지 사복음서를 보다 보면 감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세밀한 부분까지 복음이 기록됐기 때문에 이 복음서는 우리가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보화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얼마나 많은 두려움을 줍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넘어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뜨겁게 경외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주 만물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지금도 운행하시는 주님 아니십니까?

 

그 주님이 우리의 주권자이심을 믿습니다. 바로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주이신 초대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거 한 가지만 가지고도 복음이 선포됐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달라지고 지역이 확장되면서 어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됐나라고 확장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사복음서는 십자가 보혈을 듬뿍 뿌려야만 됩니다. 지금의 신약성경 순서는 기록된 순서가 아닙니다. 신학적인 가치로 인해서 배열이 됐는데 마태복음이 처음에 나왔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이뤄졌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성취를 마태복음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사복음서가 정교하게 그 시대의 관점을 반영하면서 다양하게 이뤄졌는가 우리 시대에도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사복음서를 바라보는 겁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 나오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정확히 말하면 족보 책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의 첫 번째 단어는 책이란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계보를 이어갑니다.

다윗은 정통성을 이어가죠. 법적 정통성을 이어갑니다. 믿음의 정통성과 법적 정통성을 이어가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다. 원색적으로 표현하면 그렇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성경을 보기 시작하는데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 참 지루하죠. 그런데 의미가 있습니다.

거기에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족보에서 여인들은 잘 등장하지 않습 니다. 그런데 훌륭했던 남자들은 빼고 다말, 라합, 룻, 밧세바가 나옵니다. 어떤 족보를 말합니까? 14대, 14대, 14대 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 알파벳으로 숫자를 의미했습니다.

 

14대라는 말은 다윗이라는 단어를 풀이하니까 14가 나오는 겁니다. 그 의미는 다윗의 족보, 다윗의 족보, 다윗의 족보를 반복하는 내용이죠. 이스라엘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에 감히 신사임당과 같지 않은 여인 4명이 들어갑니다. 이 말은 예수의 족보는 누구든지 들러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꿔 말해서 더 이상 이스라엘의 단순한 혈류 계통의 족보가 아니다. 이제는 성령을 통한 새로운 족보를 말합니다. 누구나 포함될 수 있다는 것, 그들이 포함됐다는 것은 우리도 포함될 줄로 믿습니다.

 

신약 성경은 복음이 전파되면서 이안에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너의 과거가 어떠하더라도 족보가 어떠하더라도 들어올 수 있다라는 포용성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마태복음의 복음 선포가 됩니다. 그러면서 예수가 누굽니까? 1장 23절에서 말합니다. “예수는 바로 임마누엘이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모든 민족을 포용하시는 포용성이 있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합니다.

 

28장 20절에 지상 명령이죠.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미 함께 있다는 걸 선포합니다. 마태복음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마지막에 말합니다. “그렇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이 코로나 시대 에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구를 배척하고 폐지하고 우리끼리만이 아니라 더욱더 이 시대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침례교인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가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성경의 첫 번째 시작은 굉장히 중요합니 다. 마가복음 1장 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입으로 전해지던 복음이 체계를 갖추면서 문서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얼마나 위대한 선언입니까? 그래서 마가복음서는 어떤 면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번에 볼 때 은혜가 더 넘칩니다. 누가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은 평등성을 말합니다.

남녀노소 구별이 없습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지 문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죠.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됐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거룩한 말씀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미 바울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성령의 사람이 돼야만 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지배할 때 하나님의 감동의 말씀이 우리에게 새힘을 줄 줄로 믿습니다.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이 하늘의 말씀대로 사는 우리 침례교인의 삶을 만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침례교회가 무엇입니까. 우리 침례교회는 신약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신약교회는 바로 사도행전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성령행전 교회이죠. 성령 충만한 교회가 바로 우리 침례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침례교회를 세계 제일의 교단으로 만들었습니다. 전 세계에 가장 많이 퍼져 있는 세계 최대의 교단, 최고의 침례교인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계최대의 교단이 되도록 하셔서 이 시대의 사명을 감당케 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우리 침례 교인들은 집단 영성을 넘어서 개인 영성을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이는 영성에서 흩어지는 영성을 통해 여러 분의 삶의 구석구석 현장까지 변화시 키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다시 한 번주님께서 우리 침례교를 통해서 이 대한민국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 면서 복음의 계절이 오게 할 줄로 믿습 니다. 성령을 통해 승리하는 우리 침례 교인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리=범영수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