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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거부로 수난당한 침례교인(5)

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15


4. 장석천 목사(張錫天, 1885~1949)
장석천은 1885년 11월 19일 충남 부여군 임천면 칠산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부여의 유서 깊은 향반이었고, 그의 부친은 한국침례교회 초대 감로 중 한 분인 장기영이었다. 그는 조상 잘 둔 덕분에 비교적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어려서부터 지병으로 고생했다. 1902년 초(17세) 부친 손에 이끌려 신명균 조사에게 기도를 받은 후 기적적으로 회복됐고, 이후 부친의 권유에 의해 신명균을 따라 원산에 갔다. 그가 신명균을 따라간 것은 지병으로 학문 배울 시기를 놓쳤기에, 그를 통해 한문과 성경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장석천은 신명균에게 약 5년에 걸쳐 학문을 익혔고, 철저한 신앙훈련을 받았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펜윅 선교사의 집에 들러 성경에 대한 의문점을 열심히 질문했는데, 머리가 명석했던 장석천은 특히 신약에 대한 지식이 해박해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주요 절수를 암송하고 신약에 있는 어떤 구절도 잘 찾아낼 수 있어서 “걸어 다니는 성구 색인”이라 불렸고, 펜윅 선교사는 그의 방문을 언제나 환영했다.


장석천은 1902년 봄 일본에서 활동하던 스테드만 선교사가 잠시 내한했을 때, 부친과 함께 그에게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1903년 2월 신명균이 원산에서 공주로 부임할 때, 함께 동행하였다. 그리고 공주성경학원이 개원했을 때, 황태봉·고문중과 함께 첫 입학생이 되어 신명균, 황상필, 손필환으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목회자로서 갖춰야 할 학문과 소양을 익혔다. 학업과 병행해 전도에도 매진했던 장석천은 1903년 공주 신영리 출신인 박노기와 손필환, 이영구를 전도해 결신시켰다.


1906년 ‘대한기독교회’라는 교단이 설립됐을 때, 장석천은 손필환, 이영구와 함께 교사(전도사) 직분을 받았고, 신명균 목사의 지도와 홍봉춘·장기영 감로의 보조를 받아 공주·강경구역으로 파송되어 활동했다. 장석천 교사는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부흥전도집회에서 그의 설교는 우렁찼고, 청중을 압도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그의 집회는 가는 곳마다 부흥의 불길을 일으켜 당시 유교의 박해와 다른 교단의 방해로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그는 낮에는 개인전도, 밤에는 전도 집회를 일과로 삼았으며, 밤마다 열리는 그의 전도 집회는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1909년 11월 4일 장석천 교사는 12명의 전도사역자들을 새로운 신자들이 생겨나고 있던 각 고을(郡)에 1명씩 파송했는데, 그 이름을 나열하면, 신시우·조병구·조영우·박영호·곽중규·김상웅과 예비 전도인 임경식·이종배·노성하·김창재·장진욱·김재덕 등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파송된 지역에서 교회개척과 전도사역을 펼쳤다. 장석천 교사의 부흥사역에 이들이 동참함으로 불과 넉 달 사이에 새로운 교회 36개가 개척됐다.


장석천 교사의 부흥전도 불길이 더욱 확산되고 있던 무렵인 1909년에 그는 목사안수를 받았다. 전라북도 용안에서 개최된 제4차 대화회(총회)에서 그는 손필환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고, 장석천 목사의 부흥운동이 예천구역에서 더욱 확산되자 1910년 충청남도 강경에서 개최된 제5차 대화회(총회)는 그에게 윤종두·김재덕·이만기·이종배를 파송해 그의 사역에 협력하도록 했다. 장석천 목사 활동 영역이 점차 넓어져 영동구역을 담임하면서 강경교회까지 순회목회도 병행했다. 이렇게 장석천 목사가 부흥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1911년 12월에 그만 참변을 당하고 만다. 무지몽매한 집안의 양반들과 일경에 의해 심각한 부상을 당해 개울에 처박혀 걷지도 못한 장석천 목사를 펜윅은 전킨기념병원(현 전주예수병원)의 의료선교사 어빈(Dr. Irvin)에게 데려가 치료를 받도록 하였다.


와병으로 쓰러진 이후 장석천 목사는 고향 칠산으로 돌아와 요양했다. 당시 칠산교회에는 부친 장기영 감로가 있었는데, 그는 부친의 정성 어린 간호를 받았다. 이런 돌봄 속에서 점차 회복되어가고 있을 때 돌연 부친이 소천했다. 그리하여 장석천 목사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부친 장기영 감로 사망 후 칠산교회 제6대 목회자가 됐다. 장석천 목사가 칠산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을 당시인 1918년 제13회 대화회(원산)에서 칠산교회에 출석하던 김희서 교사(전도사)가 박노기 목사·최응선 감로·김영태 총찰과 함께 간도·시베리아 지역의 전도사역을 위해 선교사로 파송됐다. 이들은 9월 임지를 향해 북방선교의 장도에 올랐으나, 안타깝게도 10월 20일 이들이 타고 가던 배가 파선함으로 포세트 해상에서 장렬하게 순교했다. 이는 교단 역사상 첫 순교자로 기록됐다.

 


1926년 제21회 경상북도 점촌에서 개최된 대화회(총회)에서 펜윅은 학교교육 폐지령을 내렸다. 이는 그가 1917년 5월 도미해 1923년 5월 돌아온 후에 결정된 것으로, 이는 장석천 목사에게 큰 부담이 됐다. 왜냐하면, 슬하의 맏아들 장일수(張一秀)가 당시에 미남장로회에서 세운 전주의 신흥중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석천 목사는 교단의 방침에 순종해 아들에게 학교를 자퇴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일수가 이를 거부하고 학교를 다닌 것으로 인해 교단의 징계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목사직을 완전히 박탈당하지 않고 얼마간의 정직 처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장석천 목사가 칠산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을 무렵인 1942년 9월 7일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그를 긴급 체포했다. 이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일제의 탄압으로, 먼저 잡혀 온 교단 대표들과 함께 감옥생활이 시작됐다. 장석천 목사는 당시 57세로서, 젊은 사람도 견디기 힘들다는 옥중생활을 50이 넘은 목사가 겪기에는 너무도 버겁게만 했다. 그는 체포된 이래 원산 헌병대 유치장에서 겨울을 보냈고, 이듬해인 1943년 5월 1일 함흥 교도소로 이감됐다. 15일간의 재판 결과 검속된 32명 중 김영관 목사를 비롯한 이종근·노재천·전치규·백남조·장석천·박기양·신성균·박성도 등 9명의 교단 지도자는 일본의 검사에 의해 예심에 회부되어 재차 투옥되고, 다른 23명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1943년 5월 15일에 석방됐다.


장석천 목사는 조선총독부 검사 와타나베 레이노스케에 의해 1943년 5월 28일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 예심이 청구됐는데, ‘예심청구서’에는 그의 범죄 사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4 피고인 장석천은 어렸을 때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성서 및 한문 등을 배우고 성장해 농업에 종사하던 중 침례파 기독교도가 되어 동아기독교회 창설을 하는 등 당초부터 이에 가입하는 동시에 목사가 됐고, 쇼와 15년(1940년) 10월 원로 겸 명예 목사로 선임된 이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칠산리 소재 칠산교회에서 포교에 종사하고 있는 자이다. 쇼와 16년(1941년) 5월 15일부터 쇼와 17년(1942년) 8월 말경까지 같은 교회에서 매 일요일 예배 시에 신자 장석철 외 약 80명에게 전기와 같은 설교를 했다(앞서 이종근 목사의 범죄 사실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및 천년왕국의 출현을 기원한 내용의 설교”를 말함).”

 

함흥형무소에 수감된 9인 중 가장 병약한 분은 장석천 목사였다. 모두 그의 건강을 걱정했으나 정작 득병으로 순교한 이는 전치규 목사였다. 훗날 김장배 목사는 이에 대해 말하기를, “이와 같이 처참했던 옥사사건 중에서 또 한 가지의 기적이라고 믿어지는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필자의 모교회인 칠산교회에 계시면서 그 교회에서 목회하시던 고 장석천 목사님은 오랜 지병으로 인하여 동절이 되기만 하면 온돌방 안에서도 방한복 모를 쓰시고 사시던 분인데 원산의 헌병대 감방의 추운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으니 그 때에 대 기적이 지금까지도 믿어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일제는 1944년 2월 15일 다른 6인(노재천·백남조·김영관·박기양·신성균·박성도)과 함께 장석천 목사를 병보석으로 임시출옥 시켰다. 출옥 후 그는 원산 반도의원의 차형은 원장(감리교 장로)의 호의로 병원에 입원해 여러 날 간호를 받았다.


점차 건강을 회복하던 차인 같은 해 5월 10일 함흥재판소는 동아기독교회에 교단 해체령을 공표했다. 그리고 임시출옥했던 장석천 목사는 1944년 8월 8일 일제에 의해 재수감 되어 공판이 계속됐고, 9월 7일에 이르러 재판이 종결됐는데, 집행 유예 5년으로 석방됐다.


만신창이의 몸으로 돌아온 장석천 목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와병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병 수발드는 분들의 도움으로 살다가 해방을 맞았고, 그런 와중에도 교단 재건에 힘쓰다가 1949년 9월 2일 향년 64세에 별세함으로 순교했다. 2007년 조용호 목사가 제19대 칠산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해 장석천 목사 순교자 기념예배 및 순교자기념비를 세웠다. 슬하에 1남 장일수 목사가 있다. 그는 1956년 교단 총회장을 역임했고, 교단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오지원 목사
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 소장
(사)침례교 역사신학회 이사
ohjw794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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