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전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삶의 기술이란 고통을 피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언뜻 듣기에는 맞는 말 같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기술로도 고통을 피할 방법은 없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들은 대개 고통을 수반한다. 그리고 가장 깊은 고통은 몸보다 정서적이고 영적인 고통이다.
부모가 자녀를 기르면서 겪는 고통을 생각해 보라 옛말에 “아이가 어려서는 부모의 발을 밟지만 커서는 부모의 마음을 밟는다.”라는 말이 있다. 종종 고집을 부리는 자녀 때문에 억장이 무너지는 부모들을 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다. 고통보다 가정과 자녀를 통해서 얻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고통은 숭고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물론 고통 자체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지만 우리가 그리스도께 도움을 구하면 고통은 우리를 정결하게 한다. 그리스도와 가까워지게 한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은혜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고난을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닥친 고난을 기쁨으로 받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먼저 하나님께는 영광이 드려졌다.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에게는 만왕의 왕으로서의 영광이 회복됐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됐다.
특히 고난주간에 육신의 편안함과 유익만을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기뻐 받기를 소원한다. 고난을 통과한 사람은 강하다. 고난을 통과한 사람은 웬만한 일에 놀라지 않는다. 당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강해졌기 때문이다.
‘왜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가?’라는 책의 저자 헤롤드 쿠시너(Harold S. Kushner) 목사의 간증이 있다. 목회자로서 바르고 성실하게 목회하던 어느 날 그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그의 아들 아론이 3개월 되었을 때, 다른 아이들과 다른 체질임이 발견하고 병원의 진단을 통해 아들이 ‘프로제리아’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병은 빨리 늙어 가는 조로증이다. 3개월 밖에 되지 않는 아들이 열 살 이상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자 쿠시너 부부는 참담한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일을 통해 자신의 관점이 변화됨을 체험하게 된다. 500여 교인들의 가정을 다시 바라보게 되고, 그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그는 어느 가정이든지 모두 아픔과 고통을 짊어지고 있음을 알면서 모든 사람들은 위로와 사랑이 필요한 것을 깨닫게 됐다.
내게 닥친 고통과 위기는 나를 단련시키고 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무엘상 7장을 보면 사무엘이 국가의 위기 앞에 온 이스라엘 백성을 미스바로 모으고 기도를 한다. 이것을 본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무기도 없고 거기다가 굶어가며 기도하고 있으니 블레셋이 보기에는 비웃을만한 상대였다. 하지만 사무엘과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흔들림 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신해 싸워주셨다(삼상7:10).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과정에서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음을 깨닫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고난이 있다. 너무 힘들고 심지어 죽음을 생각할만한 고난도 있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고 기도하고 믿음으로 예수 앞에 선다면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것이다. 그리스도도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입으신 연약한 인간이셨다. 그럼에도 십자가를 지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시며 고통스러워 하셨지만 하나님은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하셨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만나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기쁘게 받고 잘 감당해야할 것이다. 그러면 고난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굳게 세울 수 있도록 고난주간 동안에 기도로 굳건한 믿음을 재점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