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는 남편의 침묵이 참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과묵하고 진득해 보였던 남자가 살아가면서 지루하고 무관심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어쩌면 변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속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터에서 들어오면 혼자 방에 들어가 컴퓨터 화면을 보며 지친 심신을 달래는 듯했다. 피곤해서 그러려니 배려하려고 애썼다. 혼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반응이 시큰둥한 남편 얼굴을 보면 맥이 빠졌다. 자신이 하루 종일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육아에 얼마나 지쳤는지, 때론 마음이 얼마나 싱숭생숭한지 도대체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남편이 점점 미워지기 시작했다.
과묵한 남편은 이제 사랑이 없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비쳤다. 자신이 하는 말을 무심하게, 그저 잔소리로 듣고 넘기는 남편의 주의를 끌려면 더 강한 말이 필요했다. K씨의 언어는 점점 거칠어지고 비난의 톤도 높아졌다. 그럴수록 남편은 더 적극적으로 K씨와의 대화를 피했다.
아내가 매사 부정적으로 투덜대는 말들이 듣기 싫고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K씨는 어떤 점을 걸고 넘어지면 말없는 남편조차 발끈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피곤하다고 늘어져 있는 남편에게 차고 청소를 시키던지, 집안에서 얼마나 형편없는 남편이자 아빠인지를 일깨워주면 되는 일이었다. 관심이 없는 것보다는 화를 내는 것이 나은 반응이었다. 흔히 벌어질수 있는 부부싸움의 예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 상대방의 인정이다. 관심이다.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을 서서히 찾아오는 죽음으로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우리는 이 인정을 받기 위해 치열해진다. 심리학자 에릭 번이 강조한 인정의 욕구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인정과 관심을 받지 못했을 때에 발생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필요와 욕구를 드러냈을 때 돌아올 수 있는 거절의 가능성 때문에 상대방에게 간단하고 명료하게 부탁하지 못한다. 건강한 인간관계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말해서 얻는다. 나 좀 봐달라고, 당신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당신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인간관계가 늘 건강한 것은 아니다. 오늘 내가 힘드니 잠깐만 나를 안아주고 위로해 달라는 담백한 부탁보다는 부정적인 말로 자극을 주어 남편의 주의를 끈다. 이런 패턴을 심리게임라고 부른다.
‘나는 왜 네가 힘들까’라는 저서에서 크리스텔 프티콜랭은 심리게임을 통해 일부러 싸우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한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 자극의 ‘할당치’를 채우기 위해 애쓴다는 것이다. 마트 계산대에서 잔돈을 찾으며 시간을 끄는 짜증나는 아주머니는 텅 빈 집에 돌아가기 싫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교회에서 말을 안 듣고 말썽을 부리는 아이는 야단맞는 것 외에 어떻게 해야 선생님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지 모를 수도 있다. 프티콜랭은 주로 남에게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사람이나 자극에 목마른 사람들이 게임을 벌인다고 역설한다. 극심한 정서적 박탈을 당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차선책이라는 것이다.
건강한 인간관계와 심리게임에는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관계는 위안이 필요할 때 누군가에게 위로를 부탁하고 실제로 받는다. 그런데 심리게임은 그 요구가 간접적이고 사람을 조종하는 양상을 띤다. 돌려 말한다. 엉뚱한 문제로 화를 내고 걸고넘어진다. 그런데 실제로 원하던 요구가 이뤄져도 내가 거절한다. 위로와 관심을 어떻게 있는 그대로 받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집안일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비난을 했더라도, 실제 남편이 차고를 깨끗이 청소했다면 문제가 생긴다. 그것이 진짜 원하던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이 게임에 어느새인가 휘말릴 때가 있다. 정신 차려 보면 싸우고 있다. 찔러보고 상대가 화를 내면 비로소 에너지를 얻는 사람 옆에 있을 때다. 마치 맘에 드는 여자 아이가 있을 때,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는 소년 같은 행동에 말려 드는 것이다. 목회자나 성도 간의 인정과 관심을 원해서 극진히 대접하고 섬기고 기도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그 인정을 받기 위해 끊임없는 불만을 제기하고 말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를 발전시키는 건전한 비판인 경우도 많다. 문제는 그 일이 해결된다고 해서 불만이 사라지지 않는 경우에 있다. 이번 연도는 재정관리, 다음 해에는 교육부, 그 다음해에는 부사역자 등등 부족한 것을 잡아내는 일은 끝이 없기 마련이다.
그 심리게임의 중심에는 두려움이 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했을 때 거절당하리라는 두려움이다. 그런데 심리게임은 대부분 우리를 소진시킨다. 곁에 있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실제로 원하는 인정과 사랑 대신 그 두려움대로 거절과 상처만 돌아온다. 소년이 자라나면서 고무줄을 끊거나 괴롭히는 일은 더 이상 소녀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네가 좋다고 말하고, 잘해주는 것이 그가 원하는 애정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게임이 존재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담백하게 말하고 기도하는 대신, 불평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비난할 누군가를 찾고 투덜댔다.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면 받으리라고 약속된 주님의 평강을 알지 못했다. 인정과 사랑의 가장 확실한 원천은 하나님이다. 우리가 찾기만 하면 인정과 사랑을 가슴 벅차도록 부으실 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도 엉뚱한 데 가서 생뚱맞은 사람들을 붙들고 게임을 벌이는지도 모른다. 용기가 없어 지름길 아닌 길로 돌아간다. 그냥 말하면 될 것을, 힘들게 엄한 데 가서 삽질한다.